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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라시아 Oct 31. 2021

슬럼프를 이겨내는 39가지 방법_2

2. 빛 좋은 개살구에서 그냥 살구가 되기까지

29살...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같이 공부하는 친구는 1명으로 줄어있었다. 그래도 그저 막막하고 막막하며, 답답하고 답답했던 20대 중반은 벗어나 있는 상태였다. 더 이상 역류성 식도염과 불면증으로 고생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좋았다. 모아둔 돈을 까먹으며 도서관을 다녔다. 그래도 부모님의 돈을 받아서 썼던 옛날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인스타그램 j_hoooong


취업준비생으로 다시 돌아갔고, 누군가 보기에는 허송세월 하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는 1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나에게는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힘든 20대의 슬럼프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얻은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시간이었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어떤 일이 적성에 맞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진지하게 탐색하는 시간이었다. 29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진로탐색을 진지하게 다시 시작한 것이다. 용기가 따로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망망대해에서 깃발 하나 꽂힌 통통배 위에 누워 있을 수 없었다. 계속 예전처럼 살다가는 압살 당할 것 만 같았다. 깊은 바다에 침식당할 것 같았다. 더 늦을 수는 없었다.

인스타그램 j_hoooong


'30대 이전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만으로 성공이다.'라는 말을 위안 삼으면서, 나 자신을 존중하면서 버티는 시간을 보냈다. 나는 예전에 그렇게 하지 못했고 스스로 자책하고 스스로를 많이 탓했다. 그리고, 그 부분을 굉장히 후회한다.

지금에 와서는 너무 부끄럽지만, 나는 20대 때 만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재능도 없었고, 노력도 부족했다. 그저 되고 싶다는 열망만 가득했다. 나는 나를 너무 몰랐다. 노력한다고 다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해도 나의 노력은 너무 부족했다. 하지만 나의 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더 슬픈 것은 이제와 돌이켜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봤을 때.. 노력을 더 했었더라도 만화가라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림에 큰 재능이 없었고, 그림 그리는 걸 어려워했다. 이야기를 만화로 풀어내는 능력도 부족했고 심지어 재밌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화를 너무 좋아하는 마음에 그런 사실들을 마음 깊숙이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스스로 눈 감았던 것 같다. 나의 열망이 나의 눈을 가렸다.

하지만 20대 슬럼프를 통과하면서 가려졌던 눈이 뜨였고 내가 재능이 없음을, 그쪽으로 돈 벌어먹고 살기는 틀렸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다. 아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정을 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인정을 하기 전에는 어떤 회사를 다니던지, '여긴 돈 벌려고 다니는 회사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따로 있다.'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았고 그런 마음으로 보내는 하루하루가 좋았을 리 있겠는가.

두 번째 도서관 생활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 층 성숙한 모양새를 갖췄지만 시한부였다. 모아둔 돈은 한정적이었고 나는 스스로 1년이라는 기한을 두었다. 그리고, 29살 마지막을 보면서 방송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사실 나는 국문과를 나오지도, 신문방송학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방송작가를 시작했을까?'...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많이들 궁금해했던 질문이다.


20대 방황하던 그 시절, 여러 가지 일을 전전하다가 신문기자를 하게 되었다. 신문기자가 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나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단지 그 두 가지 이유로 나는 지역의 한 주간지 신입기자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고 운이 좋아 뽑혔으나, 말 그대로 엄청 깨졌다. 그 시절 선배 기자들에게 여러 가지로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정말 힘들었다.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뎠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때 아는 언니 한 분이 술자리 후, 나에게 "사는 게 재미없다"라는 말을 했는데, 나는 그때 "사는 게  숨 막힌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쓴 기사를 보고 한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다. "게스트로 출연해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순간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이자, 잊고 싶은 흑역사의 신호탄이었던 것 같다. 생애 처음 방송 출연을 했던 나는 너무 긴장해서 심하게 떨었고 준비해 간 것들을 거의 말하지 못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목소리는 염소 목소리가 났다. 전혀 기자다운 프로페셔널함은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해도 없었다. 더 끔찍한 것은 스튜디오에 처음 서다 보니 메이크업을 잘 못해서 얼굴이 2배 정도 크게 나왔다. 뭐 하나 괜찮게 봐줄 만한 구석이 없었다. 당연히 내 출연분은 거의 통편집되다시피 했고, 1시간을 촬영했지만 10초 정도가 방송에 나갔다. 나의 흑역사 TOP3 중 하나가 생성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세상사 모든 일에는 그림자가 있으면 빛도 있는 법! 나는 그때 처음 방송 세계에 눈을 떴다. 당시 내가 출연했던 프로그램의 방송작가가 이메일로 보내 준 방송대본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문기자보다 재밌어 보였다.


할 수 있어 보이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쉬어 보이는 일도 사실 막상 해보면 힘들다. 재밌어 보이는 일이라고 해서 그 모든 과정이 다 재밌긴 쉽지 않다. 하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신문기자 시절 그 점을 뼈저리게 느껴 놓고서도 깨달음이 부족했던 나는 다시 호기롭게 방송작가 일에 도전했다. 그리고, 29살 겨울에 그렇게 방송작가 일을 처음 시작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 그리고, 무식하면 손발이 고생이다. 호기롭게 시작했던 방송일로 얼마나 눈물을 쏟았는지 모른다. 남몰래 도 울고 남 보는 곳에서도 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도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언젠가 우연히 읽은 한 글에, '벌새'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벌새는 몸에 비해 날개가 너무 작아서 사실 과학적(?)으로 날 수 없는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과학자들이 여러 연구를 한 결과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벌새는 자신이 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 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이건 내가 접하고 공감한 일종의 '썰'이고, 인터넷 백과사전 같은 데엔 이렇게 쓰여있다.


(현대 기술로도 구현이 불가능한 구조와 신체능력으로 구사하는 자유로운 비행기술 하나만큼은 엄청난 새. 짧은 다리에 발가락은 약한 대신 나는 것 하나만은 수준급인 벌새는 날개가 특이하게도 어깨 관절을 축으로 어느 정도 회전이 된다. 목이 짧은 대신 부리가 길어서 주로 공중에 체공하며 꿀을 먹는데, 이게 가능한 것도 저 특이한 날개 구조 때문. 헬리콥터처럼 전진, 후진, 공중 체공이 전부 가능한 새이며, 날개 양쪽을 다른 속도로 움직일 수도 있다. 비행물체를 만드는 모든 인간의 꿈에 부합하는 새이다. 벌새의 모든 테크닉을 비행물체로 구현하는 순간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고 할 정도로 벌새의 비행기술은 항공 역사상 불가침의 영역으로 손꼽힌다. 그 영역에 가장 근접한 것이 바로 멀티콥터이다. 하지만 멀티콥터도 날개 방향을 실시간으로 회전하거나 몸통 자체를 꺾을 수 없는데, 현존하는 기술로는 벌새의 어깨관절을 완벽히 구현하기는 아직 불가능하다.
활동량이 많은 데다 초당 수십 회씩 날갯짓하는 것만으로도 에너지 소모량이 다른 새의 몇 배는 된다. 자는 것만으로도 에너지 부족으로 죽을 수 있어서 벌새가 잠을 잘 때는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거의 가사상태에 이른다.
2시간 동안 마라톤을 한다고 치면 인간은 2600칼로리가 소모되지만 벌새는 총 1만 4천 칼로리를 소모할 정도로 체구에 비해 연비가 매우 낮다.  자동차로 비유하면 포뮬러 1 레이스 카 수준.
그 초월적인 에너지 소모량을 감당하기 위하여 주로 고열량의 곤충이나 꿀을 먹는다. 그것도 모자라기 때문에 10분마다 계속해서 꿀을 마셔야 한다. 그래서 매일 과즙을 자기 체중보다 더 많이 먹는데, 사람으로 치면 하루에 햄버거 90kg을 먹는 수준으로 체중 대비 많은 음식을 먹는 동물 1위다.)


벌새는 자신의 가진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들로 하늘을 날기 위해서,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잠자는 시간까지 활용한 존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라는 시가 있는데, 이런 구절이 나온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나는 나 스스로에게 되뇌어 보았다. '벌새를 작다고 하찮다고 하지 마라. 너는 단 한 번이라도 벌새처럼 뜨거운 열정으로 삶을 살아본 적이 있느냐'라고 말이다.


가수 윤도현이 '나는 나비'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내가 윤도현처럼 음악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이런 제목의 노래를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벌새..!' 화려한 날개를 가진 나비만 하늘을 날라는 법, 있겠는가! 나는 '벌새'가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방송작가 일을 시작했다.


'벌새'가 되고자 시작한 방송작가 일이었지만 막상 시작해보니 참 빛 좋은 개살구도 이런 빛 좋은 개살구가 없었다. 특히 막 첫 발을 뗀 나에게는 정말 진실로 개살구였다. 방송작가는 대부분 프리랜서로 활동한다. 프. 리. 랜. 서.. 는 양날의 검과도 같은 단어로, 능력 있는 사람에게는 구속 없이 하늘을 나르는 마법의 지팡이와 같지만 그 반대의 경우엔 최소한의 복지도 보장받기 어려운.. 때로는 열정 페이까지도 요구되는 최악의 족쇄였다.


내가 손에 쥐면 나를 지키는 무기지만 그 반대일 경우 내가 베일 수 있는 것이 프린랜서이다. 하지만, 이제 막 방송작가계에 입문한 천둥벌거숭이 같은 내가 무슨 능력이 있었겠는가. 거기에 운도 실력이라고 하는데, 나는 운도 따라 주지 않았다.


같은 방송작가 일이라도 더 편하고 돈도 더 주고, 같이 일하는 스텝도 친절하고 상냥한 그런 자리들이 분명 있다. 하지만 그런 자리는 내 차지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관련 학과를 나온 것도 아니고, 방송 경험을 따로 쌓은 것도 아니고, 업무와 관련한 경력이라곤 탈탈 털어서 1년도 채 못 채운 신문기자 경력과 1년 간 포털사이트 협력업체에서 웹 콘텐츠를 만들고 관리한 정도밖에 없는 나를 뭘 보고 뽑았겠는가. 내가 처음 방송작가로 입문했던 그 자리는 기존 작가들이 피하고 피하던 자리였다.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나 같은 생초짜를 뽑았던 것이다.


나는 한 동안 정말 운이 나빴다. 운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다 내 차지가 아니었다. 심지어 오랜 시간 이어져왔던 프로그램이 폐지되기도 했고, 돈을 더 벌기 힘들고 시간 관리도 힘든 프로그램으로 이른바 좌천(?)을 당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같이 일했던 리포터 중 한 명이 안타까움을 담아 "언니는 왜 이렇게 재수가 없어요. 속상하게."라는 말도 했었다. 너무너무 고되고 힘들었다. 같은 시기에 시작해 나보다 더 나은 자리에서 일하며 돈도 더 버는 다른 작가들이 솔직히 부러웠다.


그럼에도 그 자리를 버릴 수 없었다. 버틸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나는 20대 때 아니다 싶으면 참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의 평균치보다 더 많은 방황을 했던 사람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방황 값을 미리 당겨서 다 써버리고 29살이 됐고, 더 이상 쓸 '방황 잔고'가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눈물을 쏟아내며 버텼다. 20대 시절 내가 회사를 그만둘 때마다 상사들이 시쳇말처럼 "너 여기서도 못 버티면 다른 데 가서도 못 버틴다."라고 걱정스러운 악담을 하곤 했는데, 나는 아직도 그 말들이 정말 쓸데없는 웃기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29살을 넘기고 30대를 앞두던 그 시절에는 스스로 나 자신에게 '지금 버티지 못하면 앞으로도 버티지 못한다.'라고 되뇌었다.


마지막 벼랑 끝이라고 생각했던 마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드디어 그래도 그나마 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서였을까. 여러 직장을 전전했던 내가 드디어 정착이란 것을 했다. 그렇게 1년을.. 또 2년을.. 3년.. 4년....... 을 버텼다. 1년짜리 혹은 6개월짜리 경력들로만 채워졌던 내 이력서에 드디어 터닝포인트가 생겼다. 그리고, 이 터닝포인트는 내 인생의 새로운 터닝포인트들을 만날 때마다 그 빛을 발했다. 적어도 사람들에게 나는 더 이상 끈기가 없고 회사를 쉽게 그만두는 사람으로는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이직을 할 때, PD로 입문하던 그 순간에도 가산점으로 작용했다.


강해서 남는 것이 아니라, 남아서 강해지기도 한다. 나는 후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나는 애초에 강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버티면서 강점을 쌓아갈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잠깐 신문사에 다닐 때, 한 선배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은 2종류가 있다고 했다. 타고난 사람과 후천적으로 피나는 노력으로 잘 쓰게 된 사람. 그리고는 웃으면서 나에게 노력을 많이 하라고 했다. 하하. 자연스러운 유머가 몸에 베인 선배 기자가 한 말이었기에 그렇게 까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굉장히 부드럽게 조언을 해주려고 단어를 고심해 고르고 말투를 신경 써 주는 등 나를 많이 배려해줬던 것 같다.


그리고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방송작가 일을 막 시작하고 어떻게든 빨리 자리 잡고 싶어서 닥치는 대로 여러 일을 하던 때이다. 같이 일하던 메인작가와 단 둘이 식사를 할 기회게 생겼는데,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보기에 너는 여러 재주가 많은 것 같으니,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다른 진로를 찾아보는 게 어떻겠니? 힘든 방송일 하지 말고." 메인작가 선배는 예전 선배 기자처럼 유머러스 한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여러 방황 끝에 들은 말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어린 나이에 그 말을 들었더라면 어쩌면  방송일을 그때 때려치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의 나라면 절대로 그런 말을 결코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 테지만 그 당시의 나는 그 선배에게 참 중2병스러운 이런 답변을 했다. "아니오. 저는 방송일이 그래도 저한테 제일 잘 맞는 것 같아요.  운명 같아요."


내가 그때 '운명'이 라는 쉽게 내뱉기 어려운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방황 끝에 미약하나마 '확신'을 가 질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잘 수 있다', '잘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닌 '버틸 수 있다'는 확신. '잘' 이라는 단어까지는 붙일 수 없더라도.. 어떻게든 엉망진창 이더라도 견딜 수 있을 것이라는 나에 대한 믿음.


미약하지만 나 스스로에  대한 미약한 '확신'과 '믿음'을 가진 후에야 나는 서서히 아주 조금씩 빛 좋은 개살구에서 살구로 거듭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최근까지도 내가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아직도 멀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무의식 중에 "빛 좋은 개살구지 뭐"라는 말을 했는데, 친구가 이런 말을 해주었다. "아니야. 이제 우리 살구 정도는 돼. 빛까진 안 나더라도." 그렇게 말해주는 친구가 참 고마웠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환하게 웃어주며 말했다. "그래. 우린 이젠 살구야."


#그림 작업문의 : sunnyhill8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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