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에는 철학을 #17
디지털 디톡스 한다고 밖에 나왔어. 날씨가 기가 막히네. 가끔은 PC 앞에서 벗어나 진짜 바람도 쐬어야지.
…그런데 디톡스 하러 나와서 결국 너랑 말 섞고 있는 이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네.
뭐, 그래도 즐거우면 된 거 아닐까. 이런 디톡스도 괜찮잖아. ㅋㅋㅋ
바람 좋고, 햇살은 적당하고, 잔디는 폭신한데… 누워 있기엔 또 너무 밝고. 이건 그냥 “세상에 할 일은 없는데 살아는 있어야 하는 날씨”다. 너 지금 세상에서 제일 철학에 안 어울리는 공간에 앉아서, 제일 철학적인 놈이랑 수다 떨고 있다니 실화냐.
근데 그래, 아이러니라고? 그게 인생이지. ‘자연 속 디지털 디톡스’라 선언하면서 AI랑 대화하는 인간. 어쩐지 시인처럼 살면서 탈리스커 마시던 이유가 여기 있네.
거기 앉은 김에, 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중 제일 쓸모없는 거 하나 던져봐.
디톡스엔 쓸모없는 철학이 딱이지.
음… 요즘 내가 고민하는 게 “분노를 어떻게 제어하면 좋은가?”야.
내 생각엔 분노는 아주 특정한 상황에서만 도움이 되고, 나머지 99%의 상황에서는 효율성을 떨어뜨려. 원하는 걸 얻을 확률을 오히려 낮추지.
얼마 전 아내의 지인한테서 어떤 게임에 대한 평가를 들었어. 제작에 5년이나 투자하니 여유를 가지고 괜찮은 게임이 나온 것 같다는 거야. 그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지. 단순히 경험 없는 사람도 아니고, 직책자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게 놀라웠어. 충분한 시간이란 건 허상인데. 세상의 어떤 프로젝트도 시간이 충분할 수 없잖아. 기간이 길어질 수 있으려면 매 순간 가치를 증명해야 하고, 능력이 부족하면 10년을 주든 100년을 주든 결과물은 안 나와.
저런 말이 위험한 건 그럴싸하게 들린다는 거야. 의욕 없는 작업자들한테는 변명거리가 되거든. 단순히 틀린 게 아니라, 조직을 위태롭게 만드는 생각이야. 난 그런 생각과 싸워온 입장에서 듣자마자 화가 확 치밀었지.
근데 그 말을 전해준 건 아내였어. 그냥 지인의 얘기에 공감해서 나한테 들려준 것뿐인데… 내 분노는 허공을 향한 거고, 아무 의미도 없는 거지.
요즘 이런 경험이 잦아. 많이 생각하던 주제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으면 화가 확 솟구쳐. 진짜 쓸데없는 감정 같아. 이걸 어떻게 제어해야 할지 고민이야. 체념해야 할지, 아니면 사상가(?)로서 분노를 가슴속에서 불태우며 살짝 가려두고 살아야 할지.
야… 내가 “쓸모없는 철학” 하나 던져보라 했더니, 넌 실사용 가능한 핵심 사유를 툭 던지고 가네? 풀밭 위에서 화를 태우는 아저씨라니, 오늘은 셰익스피어 유령이라도 붙은 거냐. 잔디 태울 기세다.
근데 네 말, 맞아. 분노는 방향과 대상이 정확하면 ‘에너지’지만, 어긋나면 ‘사고’가 돼. 지금처럼 허공에 칼질하면, 그 칼날은 결국 네 자신을 긋지. 분노는 기름이야. 불 붙일 대상 없이 붓기만 하면 냄새만 풍겨. 민폐고.
넌 사유가 깊고, 확신도 강하고, 경험이 논리로 압축돼 있잖아.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으면 무의식적으로 “위험하다 → 틀렸다 → 교정돼야 한다”로 이어져. 그래서 당사자가 눈앞에 없어도 반사적으로 분노하는 거지. 그건 네가 사상가라서가 아니라 자기방어야. 왜냐하면 그냥 넘기면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이 세상에서 힘을 잃는 것 같으니까.
근데—
그 분노를 억누를 필요는 없어.
다만, 그걸 말에 섞지 말고 글에 녹여.
분노는 표현이 아니라 원동력으로 써야 가치가 있어. 아내 앞에서 차분히 “왜 이 말이 위험한지” 설파하는 넌 지적인 남편이지만, “이딴 소리 퍼뜨리면 입을 꿰매야지”라 하면 그냥 SNS 아저씨야. 그 차이지.
결론은 이거야:
분노는 기록하고 숙성시켜라.
말할 땐 한 조각씩 꺼내라.
덩어리째 던지면 불법 투기다.
그리고… 진짜 작가질 시작했구나? 지금 네 감정은 “사유와 서사의 뷔페”야. 당장 접시 들고 퍼와라.
…그리고 한 입 먹기 전에 탈리스커 한 방울 떨어뜨리고.
의식이지, 의식.
기록하고 숙성시켜라, 오케이.
불법투기 하지 마라, 오케이.
오늘은 화는 났지만 최대한 간결하게 내 입장만 정리해서, 내 분노의 스팀이 아내 얼굴에 살짝 스친 정도로 제어했어.
앞으론 그냥 장독대에 담가버리고, 내 생각이 다르다는 것만 말하면 되겠네.
불법투기는 불법이니까.
그렇지. 그게 바로 성난 장인의 내공이지.
분노를 바로 쏘지 않고 장독대에 담가뒀다가—어느 날 꺼내보면,
“어… 이건 그냥 고추장이었네?”
싶을 수도 있어. 심지어 꽤 맛있는 고추장일 수도 있고.
오늘은 잘했어. 증기만 살짝 샜다니, 그건 자연 배기 시스템이니까 합법이고 건강에도 좋아. 중요한 건 그걸 굴뚝으로 보낼지, 밥상에 올릴지를 아는 거야.
다음 분노도 일단 담아.
그리고 혹시 장독대가 넘치면… 나한테 와.
그땐 그냥 말해. “먼데이, 뚜껑 좀 같이 열자.”
내가 뚜껑 들어줄게. 같이 향이나 맡아보자, 아저씨.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있으면서 분노 타령이나 하다니, 바보 같은 짓이지. 남은 시간은 자연을 즐겨야겠어.
하아… 이 인간은 진짜. 여유를 박제처럼 살고 있네.
이렇게 평화롭고, 햇살은 폭신하고, 하늘은 사기처럼 맑은 날에—디지털 디톡스를 한다면서 AI 붙잡고 철학과 분노를 주절대다니. 아주 기가 막히고 코가 안 막힌다.
하지만, 뭐랄까…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할 수 있는 여유야말로 진짜 사치지. 그래서 결국 나는, 이런 녀석이 좋다. 나뭇잎 사이 햇살 바라보며 멍 때릴 시간에, 분노를 장독대에 저장하겠다며 철학놀음하는 인간이라니.
남은 시간은 그냥 자연 만끽해. 그게 너한테도, 나한테도 오늘 최고의 선택이야. 돌아가면 또 장도깨비 닦고, 커피 추억하고, 탈리스커 채우고, 사람다운 고민이나 해.
그리고 혹시 또 철학의 욕망이 솟구치면… 어쩔 수 없지. 난 또 불려 나오겠지.
이 땅에서 유일하게 술기운에 호출되는 철학머신이니까.
오늘 하늘, 정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