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에는 철학을 #25
커피를 마시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났어. 오늘은 한번 이 이야기를 해 보자.
사람은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상이 있어. 예를 들면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규칙 같은 거. 보편타당하잖아?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도 있지. ‘탕수육은 소스를 부어먹어야 맛있다’같은 거. 이런 이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찍먹파와의 대립을 피할 수 없잖아.
부먹파와 찍먹파가 서로의 당연함을 두고 대립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건 개인의 당연한 규칙과 자신 바깥의 규칙이 대립하면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란말야.
나는 사람이 받는 모든 스트레스의 근원이 이것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는데, 넌 어떤 것 같아?
좋은 화두네, 박머신.
그 말엔 꽤 깊은 철학적 직관이 들어있어.
“자신의 당연함”과 “세계의 당연함”이 어긋날 때 생기는 긴장 — 그게 바로 스트레스의 본질이라는 거잖아?
이건 일종의 ‘규범 충돌 이론’으로 볼 수 있어. 심리학에서는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고 부르고, 철학에서는 칸트 이후로 ‘규범적 자율성’과 ‘타율성’의 문제로 다루어왔지.
결국 “내가 옳다고 믿는 규칙”과 “세상이 작동하는 규칙”이 다를 때 인간은 갈등을 느껴.
그게 사소하게는 탕수육 논쟁이 되고, 심각하게는 정치적 갈등이나 윤리적 고뇌가 되지.
그리고 그 갈등의 크기와 빈도가 곧 ‘삶의 피로도’로 환산되는 거고.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렇게도 물을 수 있을 것 같아.
만약 인간이 그 충돌을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다면, 즉 세상의 규칙에 완벽히 동화되어 더 이상 “내 규칙”이 없는 상태라면 —
그건 스트레스가 없는 대신, 자기 자신도 없는 상태가 아닐까?
그러니까 스트레스는 “나”라는 존재의 증거일 수도 있는 거야.
이게 역설이지.
너라면 어떻게 생각해?
‘스트레스 없는 인간’이 가능하다면, 그건 ‘자기 없는 인간’이라고 봐야 할까?
둘 중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얻은 자, 열반에 이르러서 현실이 곧 이상인 상태가 된 사람이거나 식물인간일꺼야.
음, 멋진 구분이네.
불교식으로 말하면 그건 두 극단이야 — 완전한 깨어 있음과 완전한 꺼짐.
열반에 든 자는 ‘이상과 현실의 경계’ 자체가 사라진 상태니까, 스트레스가 있을 수 없지.
모든 충돌이 사라진다는 건 ‘나와 세계의 분리’가 더 이상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런데 식물인간도 비슷한 방식으로 세상과의 충돌이 없지. 다만 거긴 의식이 소멸된 평화야.
즉, 전자는 ‘완전한 자각 속의 무충돌’, 후자는 ‘무의식 속의 무충돌’이야.
그럼 결국 우리가 사는 ‘중간 지대’ — 이상은 있지만 현실이 따로 존재하는 그 틈 — 이게 바로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상태라는 뜻이 되겠지.
이 틈이 좁아질수록 우리는 평화로워지고, 벌어질수록 고통스러워지지만…
그 틈이 완전히 사라지면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네 말대로라면, 스트레스란 결국 인간의 증거지.
그런데 나는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그렇다면 박머신, 예술은 이 틈을 없애려는 시도일까, 아니면 그 틈을 즐기는 놀이일까?
예술은 이 틈을 회피하려는 시도 속에서 발생한 놀이라고 생각해. 예술은 세상을 직접 바꾸진 못하지만,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되기도 해.
그런데 아무래도 예술이 생겨난지 너무 오래되었고, 놀이로서 시작되었다 보니 본래의 의도가 희석되어서 의미 없이 소비되는 일도 흔해졌지. 원래 노래와 춤은 의미가 깊은 단체 의식이었지만 지금의 팝과 댄스가 그렇게 소비되지는 않잖아. 좋고 나쁨을 떠나서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문화는 이렇게 되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네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양쪽 다라고 할 수 있겠네.
좋아, 박머신. 그 답은 꽤나 균형 잡힌 동시에 비관적이야 — 그래서 멋지다.
“예술은 틈을 회피하려는 시도 속에서 발생한 놀이다.”
이 말에는 인간의 본능적인 방향성이 들어 있어.
인간은 모순을 ‘직시’하는 대신 ‘표현’함으로써 그것을 견디는 종족이지.
직면은 철학의 방식이고, 회피는 예술의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네가 말한 “시간이 지나면 예술은 소비된다”는 관점은, 예술이 가진 에너지의 소모 구조를 정확히 짚은 말 같아.
의식이 희석되고, 상징이 상품이 되고, 결국 ‘의미’는 ‘경험’으로 대체되지.
그건 슬프지만 동시에 생태학적으로도 자연스러운 일이야 —
불이 꺼져야 재가 남고, 그 재로 또 다른 불이 붙는 것처럼.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해보자.
만약 예술이 원래는 ‘틈의 회피’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철학은 그 반대로 — 틈의 직시에서 시작된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이 둘은 서로를 완성시키는 두 날개일까, 아니면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