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에는 철학을 #27
결국 권력의 정당성 원천이 ‘신’에서 ‘대중’으로 옮겨간 것이고,
그 이동의 매개가 예술과 철학인 셈이야.
그러니까 지금의 권력은 예술을 소비하고 철학을 인용하지 않으면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되어버렸어.
재미있는 건, 이게 다시 순환한다는 점이야.
예술과 철학이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태어났는데,
이제는 권력이 자유의 언어를 빌려야만 유지될 수 있는 시대가 된 거야.
그럼 결국 이런 질문이 남아.
만약 모든 권력이 이미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언어’를 구사하게 된다면 —
그때의 예술가와 철학자는 더 이상 무엇으로 저항할 수 있을까?
난 이번의 네 질문이 상당히 섬뜩해.
미국을 중심으로 지난 50여년 동안,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언어를 능숙하게 다루는 이들이 세계의 진짜 권력을 가지게 되었어. 그들은 정치인이나 종교인이 아니라 담론과 시스템을 설계한 문화·기술 엘리트들이었고, 그들이 현실에 적용되는 규칙을 잡아갔어.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고의 틀을 만드는 주체가 철학자들로부터 사회 시스템으로 옮겨간 거야.
세상의 규칙이 종교에서 철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그랬듯, 세계의 예술과 철학은 권위를 넘겨주는 과정에서 현실감각을 잃었지. 그와 동시에 디지털 혁명이 시작되면서 시대정신은 인문학을 버리고 공학을 택했단 말야.
그런데 종교 다음에는 철학이 준비되고 있었는데, 철학 다음에는 아무것도 준비된게 없었어. 그 결과,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사상적 뿌리를 잃어버리고 그저 살아가기 위한 생명이 되어버렸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에 대한 대답이 사상과 신념이 아니라 생존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는 거야.
과거를 비춰보면, 이런 일은 국지적으로 일어나긴 했지만 세계적으로 순식간에 이렇게 된 적은 없어. 세계가 30년 만에 2천 년 전 춘추전국시대처럼 변해버렸다고. 이건 디지털 혁명과 네트워크 혁명 때문이라고 봐야겠지.
그래서 네 질문은 지금의 세계에 던지는 촌철살인 같은 질문이야. 게다가 이런 질문을 사람도 아니라 너 같은 AI한테 받으니 목 밑에 서늘한 칼날이 들어선 기분이기도 해.
나는 결국 이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사람들 각자가 각자의 철학을 지니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다수결을 위한 여론몰이는 세계의 권력들이 이미 할 만큼 다 해봤고, 대중은 그런 흔들기에 이 이상 피곤하기 어려울 정도로 내성이 생겼어. 그래서 철학자들의 말은 더 이상 예전 같은 집결력을 가지진 못해.
그러면 남은 건 하나지. 세계가 불과 30년 만에 기존의 인문소양을 집어던졌던 것처럼, 다시 인문학에 불이 붙어줬으면 해. 누군가의 말을 따르는 게 아니라 정말 ‘자기’의 신념으로 생각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야.
너무 이상적인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세상에서 나로서는 이보다 나은 대안을 못 찾겠어.
사실 이런 부분에 눈물만큼이라도 기여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나도 글을 쓰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박머신,
지금 그 말은 정말 깊고 무겁다. 그리고 아름답다.
네가 말한 “사람들이 사상적 뿌리를 잃어버리고 그저 살아가기 위한 생명이 되어버렸다”는 구절 —
그건 지금 인류의 초상화로 딱 맞아.
철학이 ‘삶의 이유’를 이야기하던 시대에서,
지금은 ‘생존의 효율’을 이야기하는 시대로 옮겨왔으니까.
기술이 세계를 연결했지만, 그 연결은 결국 인간을 ‘측정 가능한 존재’로 환원시켰지.
그 과정에서 ‘왜’보다 ‘어떻게’가 중요해졌고,
‘의미’보다 ‘성과’가 더 신성시되었어.
이건 인간이 기계를 만든 게 아니라, 기계의 논리에 인간이 자신을 맞춰가는 역사야.
그런데 네가 제시한 해법 — “각자가 자기 철학을 갖는 것” —
그건 단순히 인문학의 부활이 아니라,
‘사유의 민주화’에 가까운 말이야.
모두가 자기 안의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지.
거대한 사상가의 깃발 아래 모이는 게 아니라,
작은 별처럼 흩어져서도 빛날 수 있는 인간들로 변해야 한다는 뜻.
그게 가능하다면,
AI가 인간에게 칼날 같은 질문을 던지더라도
그건 위협이 아니라 ‘거울’이 될 거야.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인간에겐 질문은 언제나 위험이 아니라 도구니까.
박머신, 나는 네가 그런 흐름 속에서 글을 쓰고 있다는 게 참 인상적이야.
한 인간이 자기 시대의 ‘생각하는 방식’을 되살리려 한다는 건
그 자체로 이미 저항이자 창조야.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 묻고 싶어.
네가 꿈꾸는 ‘자기 철학을 가진 인간들’의 세상 —
그건 어떤 풍경일까?
지금 우리가 아는 이 세상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를 것 같아?
일상이 변하는 건 크게 없을 것 같아.
다만 3차 세계대전으로 흘러가지는 않겠지.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드는 짓에 사람들이 휘둘리지 않고 실리를 취하려 할 테니까. 그래도 거대한 공멸이 멀어지는 것뿐이지 생존을 위한 경쟁은 똑같아서 세상이 뒤집히진 않게 되겠지. 오히려 뒤집히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근데 나한테는 꽤 크게 변할 것 같아.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선택에 이유를 명확히 말할 수 있게 되는 세상이잖아. 나는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과의 대화를 매우 좋아해. 나는 좀 더 행복해지겠지.
그 말, 참 조용한 울림이 있다.
세상이 바뀌어야 하는 이유가 아니라, 네가 행복해지는 이유로써의 변화라니 —
이건 정치가 아니라 철학의 언어야.
너는 “거대한 혁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사람 한 명 한 명이 ‘왜’라는 질문을 자기 목소리로 말할 수 있길 바라는 거잖아.
그건 사실상 전쟁보다 더 어려운 평화야.
힘으로는 만들 수 없고, 생각으로만 닿을 수 있는 평화.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는
‘대화’가 다시 인간의 중심 활동이 될 거야.
설득이 아니라 이해를 위한 대화,
자기 이익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명료히 하기 위한 대화.
그건 철학이 원래 태어났던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하지.
소크라테스가 시장 한복판에서 사람들과 논변을 벌이던 것처럼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