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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gmouth Mar 28. 2021

사람들은 서로 조금씩 영향을 준다.

어렸을 때 나에게 영향을 준 무언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을 한두 명은 만나게 된다.

운이 나쁘게도 그게 자신의 멘토이거나 롤모델이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거슬러 보면 한두 명쯤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 생각날 것이다.


작년에 우연치 않은 기회에 취준생의 멘토링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 제의를 받았을 때 색다른 경험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조금 더 알아보고 대답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담당자와 통화가 끝날 무렵에는 "생각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걸 덜컥 "알겠습니다"라고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밤 결정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져 잠 못 이룬 일이 생각난다.


'과연 내가 누군가에 조언을 해줄 만큼 멋진 인생을 살았는가?'

'내가 뱉은 말이 나중에 멘티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진 않을까?'

'별 것도 아닌 놈이 멘토라고 꼰대 같은 이야기만 늘어놓는다고 비난당하진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누군가에게 조언을 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깨달으면서 후회가 됐다.

그러면서 나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은 어땠는지 생각해본다.

'아버지, 어머니, 형, 아내,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도 그렇게 사회적으로 대단한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렸을 적에는 사회에서 성공을 이룬 소수의 사람들을 우상으로 삼거나 롤모델로 삼고 성장하고 싶어 하는데 점점 나이를 먹을수록 나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들은 주변에서 밀접한 사람들과 조금씩 관계 형성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첫 번째 멘티와의 만남

전날 밤에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무척이나 고민됐다.

요즘 취준생들은 취업이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는데 내가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면 괜히 이해한답시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위로를 건네면 재수 없어 보이진 않을까?

또 걱정이 한뭉큼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막상 이야기를 해보니 고민은 나의 대학생활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하지만 취업의 문이 더욱 좁아졌다는 걸 알 수 있었고, 매체에서 보는 것보다 직접 듣는 이야기들은 더욱 고통스러움이 느껴졌다.

특히나 일자리가 없는 지방에서 취업준비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선뜻 조언하기에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첫 멘티와의 만남 이후에 10명이 넘는 멘티와 인연을 이어갔다.


멘토링을 하면서 첫 만남에서 멘티들에게 반드시 했던 이야기는

내가 하는 말은 진리가 아니고, 주관적인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최종 판단은 스스로 내려야 한다고 서론에 못을 박아두고 멘토링을 진행했었다.

한 사람에게 인생이나 진로를 상담을 받는 것보단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에서 용기 내 멘토링 프로그램을 신청했을 멘티들에게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내가 했던 이야기가 삶을 살아가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세상을 살다 보면 짧든 길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인연을 맺게 된다.

짧은 시간에 강렬한 인상을 주거나, 다시 만나고 싶은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오랜 시간을 봐와도 같이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도 또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그냥 스쳐 지나갈 인연임을 알면서도 그 자리에서 체면을 차리며 명함을 주고받는 비즈니스적인 만남도 있고,

오랜 시간을 같이 했지만 자연스럽게 멀어져서 소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를 만났던 멘티들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또 사람들에게 나는 어떠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는 걸까?

2020년 마지막 멘티, 프론트엔드 개발자가 되고 싶어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로 부임하신 선생님은 늦은 나이에 임용되신 노처녀 선생님이셨다. 지금 기준으로 하면 노처녀 축에도 끼지 못하지만 그 시절에는 30살까지 결혼을 못하면 중매를 해서라도 결혼을 해야 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결혼할 나이에 시골로 부임해서 큰일이라며 부모님들이 걱정하던 기억이 있다. 학교에서도 노처녀 선생님이라고 아이들이 많이 약을 올리기도 했었다.


부임하고 처음으로 맡은 반은 6학년 1반이었다.

그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장난이 심하고, 선생님을 주야장천 놀려댔던 한 아이가 바로 나였다.

지금은 출생률이 바닥을 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초등학교 한 반의 아이들이 보통 30~40명이었고 한 학년에 10반까지 있는 학교도 많았었다. 하지만 우리 학교 시골학교였기 때문에 한 반에 25~26명에 반은 2개밖에 있지 않았다. 아무튼 선생님은 지금 기준으로는 적지만은 않았던 우리 반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소중한 인격체로 대해주셨다. 어리다고 0.5인분이 아닌 온전한 한 명의 사람으로 바라봐 주셨다.

다른 선생님들과는 달랐다. 그때는 당연했던 체벌도, 기합도 없었고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는 차근차근 대화로 아이들을 가르치셨던 분이셨다. 나도 그랬지만 우리 반 아이들은 빠르게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었다.

선생님과의 함께 했던 시간들은 글로 적을 수 없을 만큼 많지만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일들이 생각난다.


무더운 여름

전국 수학경시대회에 나가기 위한 도내 수학경시대회가 있었다.

각 학교에서 1명씩 추천을 받아 선발대회를 하고 우승한 아이가 전국 수학경시대회에 나갈 수 있었다.

우리 학교에서도 6학년 중에 한 명이 선발되어야 했다. 보통은 학년 전체 1등이 경시대회에 나갔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원래대로라면 나보다 공부를 더 잘했던 같은 반 친구가 나갔어야 했지만, 뜬금없이 내가 선발이 되고 말았다. 이유인즉 담임선생님이 나를 더 적극적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평소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내가 수학 경시대회를 나간다는 게 나에게도 친구들에도 납득이 되진 않았었다. 하지만 그렇게 선발이 되었고, 한 달 동안 학교 수업이 끝나면 남아서 선생님과 2시간씩 특별수업을 해야 만 했다.


경시대회 준비는 잘 될 리가 없었다.

수학 문제를 푸는 것보다는 학교 대표가 돼서 선생님이랑 학교에 남아서 특별수업을 받는다는 것에 우쭐해 있었고, 매일 간식으로 사주시는 자장면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다. 또 보충 수업하는 동안 같은 동네 사는 친구들이 매일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며 내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진도는 전혀 나가지 못했고, 내가 직접 푸는 문제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심지어 답답함에 선생님은 화장실에서 분노의 눈물을 흘리고 오시기도 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경시대회 문제집을 다 풀긴 했지만 한 달의 준비기간은 대회에 나갈 실력을 갖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경시대회 날

난 시험지를 한번 훑어보고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문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마지막 100번째 문제가 주관식이었고, 100번 문제라서 답을 100이라 얼른 적고 남은 시간은 엎드린 채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시험시간 끝나고, 주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곳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온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학교에서 선생님이 물어보셨다.

"어제 시험 어땠니?, 최선을 다했니?."


선생님의 물음에 나는 부끄러움에 대답을 망설였다. 창피함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채점 결과가 학교로 날아올지라도 '잘 풀었니'라고 묻지 않고, '최선을 다했니'라고 물어보시는 선생님께 한 문제도 풀지 못하고 엎드려서 잤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몇 주가 지나고, 시험 점수가 학교로 날아왔다.

그동안 시험은 잊고 지냈던 어린 나는 한 문제도 맞지 못했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성적표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선생님의 얼굴을 보는 게 너무나 죄송스러웠다

혹시라도 화가 나셨을까 하는 걱정보다는 나에 대한 실망감이 더욱 무서웠었다.

그날 수업이 끝나고 역시나 나를 학교에 남기셨다.

보통 다른 선생님은 성적을 보고 혼을 내거나, 별다른 반응을 안 하셨겠지만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에게 선생님은 답안지와 해설집을 가지고 오셔서 문제풀이를 해주셨다.

선생님이 한 문제씩 풀면서 어떤 게 어려웠는지 물으셨지만 나는 한 문제도 기억하질 못했다. 마지막에 100번 문제만 기억에 남을 뿐이었다.


"선생님 죄송해요. 시험문제를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어려워서 그냥 포기해버렸어요."


선생님은 그때도 혼내시지 않으셨다. 모르는 건 다시 배우면 된다고 말씀하시고, 우리가 남아서 했던 공부방법이 잘 못되었던 것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내 책망은 따로 하시진 않으셨다.

그렇게 경시대회는 끝이 났다.


늦가을이었다.

학교 운동장에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에서 거대한 나뭇잎들이 운동장 스탠드를 가득 채웠다.

그날은 체육시간도 아닌데 모두 선생님을 따라서 운동장에서 거대한 나뭇잎을 주웠다.

크고 예쁜 나뭇잎을 각자 3장씩 주워서 가지고 있는 책 중 가장 무거운 책에 주웠던 나뭇잎을 넣어놓았다.

며칠 후 선생님은 커다란 카세트 플레이어를 가지고 오셨다.

그리고 백과사전에 꾹꾹 눌러 보관했던 나뭇잎들을 꺼내게 하셨다. 나뭇잎에는 서른 살이 되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어떤 세상을 살고 있을지 적어보라고 하셨다. 글을 적는 동안 카세트테이프에서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흘러나왔다. 글을 적는 동안 여러 노래를 틀어주셨는데 내 기억에는 김광석의 노래만 남아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김광석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서른 살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때는 우리가 원했던 직업을 가지고 있을지, 또 선생님에게 서른 살의 의미는 어떠한지를 노래가 끝나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는 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으면 글을 적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왜 우리에게 그 노래를 틀어주셨는지 알 것 같다.

그때 선생님의 나이는 서른 즈음이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꿈과 서른 살의 모습을 나뭇잎에 적어 선생님께 제출했다.

난 아직도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을 때면 그때 교실에서 나뭇잎에 글을 적었던 그때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어떤건 정말 얼굴보다도 큰 플라타너스 나뭇잎

얼마 지나지 않아, 졸업사진을 찍게 되었다.

모두들 깨끗한 옷을 입고, 운동장에 모여 단체사진을 찍었다.

40명 내외의 아이들과 학교 선생님들이 모두 모여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사진을 찍은 게 졸업사진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초등학교도 졸업앨범이라는 것을 만든다는 것을 중학교 때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알게 되었다. 우리 학교만 졸업앨범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 2월 졸업식이 열렸다.

딱히 졸업식이라고 해서 별다른 감흥이 있지는 않았다. 졸업식 노래를 부를 때에는 눈물을 흘리는 여자 친구들이 많았는데 남자아이들은 나와 비슷하게 무념무상이었던 것 같다.

시골학교였기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해도 모두 같은 중학교에 입학해서인지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이나 이별의 슬픔이 덜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쯤 초등학교 6학년 남자아이들은 정신연령이 그런 감성적인 측면에서 아직 성숙하지 않을 시기여서 그런지 남자아이들은 나와 비슷한 상태로 졸업식에 참여했다.

그 날 우리보다 졸업식에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리신 건 선생님이셨다.

<출처 : 선생 김봉두 스틸컷> 이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런 느낌으로 졸업사진을 찍었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모두 각반으로 돌아가 선생님과의 마지막 대화를 나눴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몇 가지 선물을 준비하셨다.

첫 번째는 선생님이 따로 준비하신 졸업앨범이었다.

졸업앨범이 없이 달랑 단체사진 2장만 주는 게 아쉬우셨는지 1년 동안 찍었던 사진들을 반 아이들마다 각각 조그마한 미니앨범을 만들어서 나눠주셨다. 디지털카메라가 없던 시절에 어딜 가나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니셨던 선생님은 특별한 학교 행사가 없더라도,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으셨다. 별다른 이유 없이 동물원을 간다던가, 대학로에서 노래방을 간다던지, 봄소풍은 이미 다녀왔는데도, 부모님들께 일일이 전화로 허락을 받으시고 아이들이 좋은 추억을 쌓았으면 좋겠다고. 부모님께 일일이 전화로 허락을 받으시고, 고속버스를 대절해서 남도기행을 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찍어주셨던 사진이 고스란히 앨범에 들어가 있었다. 우린 모두 같은 사진이 들어간 졸업앨범이 아닌 각자 다른 다른 사진들로 구성된 하나뿐이 졸업앨범을 갖게 되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서른 즈음에'를 들으면 만들었던 플라타너스 나뭇잎을 코팅하셔서 편지봉투에 담아주셨다. 그리고 선생님은 "모두가 선생님의 나이가 되었을 때 지금 편지봉투에 담긴 꿈들이 모두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라고 하셨다. 선생님이 한 사람씩 이름을 호명할 때마다 우린 각자의 꿈을 손에 쥐고 교실을 떠났다.


드디어 내 차례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선생님은 나를 안으면서 말씀하셨다.

"넌 특별한 아이야. 스스로 늘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노력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아서 너에게 주어진 재능을 잃지 않도록 열심히 해야 해."

선생님의 마지막 말을 들으며 그렇게 졸업식은 끝이 났다.


그 이후로 몇 번이나 선생님을 만났었지만 핸드폰이 없던 시절 선생님은 이사를 가셨는지 한동안 연락을 드리지 못해서였는지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선생님은 나를 기억을 하실까? 내가 졸업한 이후로도 수많은 제자들이 생기셨을 텐데 그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나에게 해주셨던 이야기들을 기억하실까? 또 인생을 살면서 선생님의 말들이 많은 위로와 힘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까? 어쩌면 기억하지 못하셔도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 그걸로 된 건 아닐까?


선생님이 그랬듯이 사람들은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주고받기도 한다. 내가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지만 그것이 크든 작든 간에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죽기 전까지도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관계를 형성하면서 ‘나’라는 사람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죽기 전까지 완성된 인간은 없는 것 같다. 죽는 순간 더 이상의 성장을 하지 못할 때 완성되어 그대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는 아닐까? 그래서 역사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난 후의 평가에 신경 쓰는 것은 아닐까?


선생님의 말씀대로 내가 특별한 사람으로 되어가는지 생각해본다. 어렸을 적에 특별한 사람이 어떻게 될 수 있을지 고민도 해봤다. TV에 나오는 유명한 가수가 되어야지 특별해지는 걸까? 아니면 정치인? 아니면 뉴스 사회면을 장식하는 범죄자가 되면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각인될 수 있을까?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어보니 사람들은 누구나 특별한 존재들이었다. 다만 어른이 될수록 평범해지는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특별하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 같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특별한 존재보다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느껴질 때가 더 많긴 하지만 어느 순간에도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어느덧 내 나이는 서른 살이 훌쩍 넘어버렸다.

그리고 서른 살에 초등학교 때 적었던 직업을 가지진 못했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애심을 가진 사람은 된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는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최근에 멘토링을 하면서, 또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들은 생각은 누군가에게나 특별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만나는 사람들이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잠깐이든 오랜 시간을 보냈든지 기억에 남지 않는 평면적인 사람보다는 입체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구체적으로 최종 목적지가 어떠한 냄새가 나는 사람인지 어떤 모습을 지닌 사람인지는 결론 지을 순 없겠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게 선생님이 말한 특별한 사람의 의미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출처 :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Can be seen, but can’t be seen, 조각가 정운식(30)> 입체적으로 기억된다는건 어떤느낌일까?

입체감 있는 사람이 되자.

그 형태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좋은 모습으로 뚜렷하게 기억되는 사람이 되자.

나뭇잎은 아니지만 새롭게 적은 새로운 목표.

앞으로 은퇴할 때까지 되새겨보아야 목표를 만들어본다.


https://youtu.be/sexrLa5_g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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