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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gmouth May 15. 2021

샴푸의 요정

우연히 확 끌리는 무언가를 발견한 순간

군대를 전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캠퍼스에는 봄이 찾아왔다.

떨어지는 벚꽃잎 사이로 연인들은 너도나도 팔짱을 끼고 서로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물론 나에게는 별다른 해당사항이 없는 행위들이었다.


군대에 간 동안 연락 한번 없었지만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반가웠던 대학 동기들도 짝을 찾아 바삐 움직였다.

용기가 없었던 민우는 길거리 헌팅을 몇 번을 망설이다가, 내가 대신 물어다 준 전화번호로 짝을 찾았고, 진배는 취미에도 없던 제빵 동아리 들어가서 20살 새내기를 사귀게 되었다.(그리고 10년 동안 연애를 하고 있다...)


전역하고 나서 예전부터 꿈꿔오던 일들을 호기 있게 도전했지만, 제대로 시작도 못해보고 실패하고 나선

용기도 없어지고, 의기소침해지고 말았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가 막막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군 입대 전까지만 해도 후배들에게 자칭 '베짱이'라고 불러달라면서, 하루 종일 술 마시고 기타만 쳤었는데 

힘이 다 빠져버린 상태로 복학하고 나서는 주야장천 갔던 동아리방에도 쉽게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학교생활이 예전처럼 재미있지 않았다. 딱히 갈 곳도 목표도 할 일도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예전 같았으면 하루 종일 동아리방에서 놀다가, 새벽까지 술을 퍼마셨을 텐데

이제는 너무 이른 시간에 집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으려니 어색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군대에서 생긴 좋은 습관은 달리기였다. 2년을 꾸준히 달려서인지 가기 전에 90kg에 가깝게 불어났던 몸무게가 전역할 때는 65kg까지 줄어들었고, 꾸준히 달렸던 습관도 남아있어서 무작정 달리는 게 마음을 가다듬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역시 마음이 복잡할 때는 무작정 달리는 게 최고였다. 그렇게 하루 일과는 '기상-학교-도서관-자취방-달리기-수면'을 반복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공무원을 준비하던 후배가 갑자기 공부를 중단하고 복학을 했다. 그전부터 안될 것 같으면 일찌감치 때려치우고, 졸업증이나 따 두는 게 좋을 거라고 냉소적인 말들을 해줬던 후배였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힘이 빠진 채로 복학했던 후배는 나의 달리기에 같은 뜻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그래도 1, 2학년 때 교류가 그나마 있었던 후배였고, 직속 후배였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함께 달리게 되었다.


하나둘씩 벚꽃나무 밑에서 사랑을 나누는 수많은 연인들 사이를 피해 가며 숨이 가득 찰 때까지 달렸다. 뒤따라 오던 후배는 점점 뒤처지더니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 버리고, 모습이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달리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숨이 턱밑까지 가득 차도록 달려야 하는데 리듬이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달리기를 멈추고 잠시 후배를 기다리는 공원 한가운데에는 벚꽃놀이를 즐기는 연인들이 가득했다. 그 무리들 가운데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혼자 서있는 내가 괜히 처량하게 느껴졌다.

<출처 : 경기관광포털> 봄날 벚꽃 핀 밤은 조명 때문에 더욱 감성적인 풍경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네가 앞에서 달려, 내가 뒤따라가는 게 차차리 나을 것 같다."


벚꽃잎이 밤 조명에 더욱 분홍빛을 띄어갈 때

앞에선 길게 흩날리는 긴 생머리에서 방금 샤워를 한 듯 한 샴푸 향이 코 끝을 찔렀다.

유난히 머리숱이 많고 길었던 머리카락이 쉴 새 없이 바람에 흩날렸다. 머리카락을 쫒아 어느 정도 달리다 보니 더 이상 지쳐서 달릴 수가 없어 보였다.


"오늘은 달리는 건 그만하기로 하고, 대학로에서 맥주 한잔 하고 집에 가자"


맥주 한잔에 이런저런 고민들을 각자 털어놓고 집으로 각자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문득 둘 다 비슷한 처지에 복학해서였는지 여자 후배지만 알 수 없는 전우애가 느껴졌다. 그렇게 며칠간의 달리기 동행은 이어졌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을 먹고, 달릴 준비를 하고, 후배를 기다렸다.

달리기 전에 스트레칭을 잔뜩 하고, 운동화 끈도 단단히 조여놓았다.

다른 날보다는 약속시간에 늦었지만 구태여 연락해보지 않고,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면서 주변을 조금씩 배회하다보니 어느덧 후배의 자취방에 도착했다.


"똑똑"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인기척이 없다. 오늘은 밤에 친구들과 자취방에서 한잔 하기로 했는데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약속시간을 어긴 게 여간 못마땅했다.

결국에는 전화로 위치를 캐묻는다. 분식집에서 다른 후배와 떡볶이를 먹고 있다고 한다. 짜증이 갑자기 확 몰려온다.


"안 나올 거면 미리 연락을 해야지 사람 기다리게 하냐?, 너 오늘 안 달릴 거면 나 혼자 간다. 그리고 앞으로 이렇게 말도 없이 늦을 거면 나오지 마라."


얼른 혼자서 한 바퀴 돌고, 친구들이랑 맥주 마실 생각이 가득했는데 후배는 달리기는 또 하겠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준비할 동안 여러 번 스트레칭을 또 한다. 달리는 시간보다 스트레칭을 더 오래 한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고서 나온 후배와 말없이 논스톱으로 정해진 코스를 돌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주인도 없는 집에서 먼저 한잔하고 있던 친구들과 합류해 신나게 맥주를 들이켰다.

매일 같은 레퍼토리의 대화를 하면서도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청춘 별거 없고, 꿈이고, 취업이고 같이 술잔 부딪치는 친구들이 그렇게 위로가 되었다.

그러다가 슬슬 시간이 늦어지니 다들 점점 말수가 없어진다. 하나둘씩 핸드폰을 붙잡고 만난 지 얼마 안 된 여자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더니 금방 자리를 뜨겠다고 한다.

다시 텅 빈 자취방에서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찾아온다. 대충 먹다 남은 맥주캔과 부스러기들을 밀어놓고, 이불도 없이 맨바닥에 눕는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유영한다. 어느 한 가지 깊게 생각해보려 해도 술기운에 집중이 되질 않는다. 그러다가 오늘 후배한테 큰소리쳤던 게 갑자기 생각이 났다. 매일 잘 나왔는데 하루 늦은 걸로 너무 나무 랜건 아닌지 미안함이 뒤늦게 찾아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늘은 달릴 때 흩날리는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고, 샴푸 향도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앞에서 달렸으니까... 


"자냐?"

"아니요"

"잠깐 볼까?"


늦은 새벽

그날따라 안개가 자욱한 놀이터에서 후배가 올 때까지 놀이터를 서성이며 기다렸다.

촉촉했던 새벽녘에 공기와 안개의 습기가 볼에 느껴진다.

내일 만나서 이야기해도 되는데 왠지 내일은 달리기에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갑자기 든 생각은 미안하다고 한마디 하고 나면 딱히 할 말도 없는데 괜히 불러낸 것 같은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오지 말라고 연락하려던 차에 후배는 놀이터에 도착했다.

<출처 : https://okaboutko.wordpress.com/2016/07/03/1074/> 새벽녘에 놀이터는 청춘에게는 특별한 장소인 것 같다.

나란히 그네에 앉았다.

말없이 흐르는 정적

괜히 날씨 때문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한마디도 안 하니까 괜히 미안하기도 하고, 무슨 말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미안하다고 하고, 소주나 마시러 가자고 할까?'

'평소처럼 장난 한번 치고, 집에 가라고 그럴까;;'

'그러기에는 늦은 시간 괜히 불러내서 장난치는 것 같잖아'

'괜히 술 쳐 먹고 연락해서 평소에 안 하던 사과를 하려니까 어색해 죽겠다'


그렇게 고민을 하기 시작하니깐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시간 끌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결심하고 한마디를 건네려는 순간 바라본 후배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이름을 불렀다. 어색했는지 고개를 들며 빙그레 웃는다.

그리고 말을 건넨다.


'사귈래?'


그때 우리는 날씨 때문에 센티멘탈 해졌다고 서로 핑계를 댄다. 농담 삼아 그때 놀이터 안 갔으면 좋았을 거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살아온 지 곧 있으면 결혼 10년 차가 된다. 며칠 후면 결혼기념일도 다가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여러 가지 감정들과 상황들이 갑자기 서로를 끌어당겼을지도 모르겠다.


https://youtu.be/YBEUXfT7_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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