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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나를 유치원에 보내지 않은 이유

엄마는 늘 집에 있었다. 내가 태어나서부터 학교를 다니는 내내 엄마는 어느 때건 집에 있었다. 내 유년시절을 통틀어 가장 좋았던 기억이자 살아가는 힘은, 언제든 집에 가면 엄마가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가 집에 있는 것이 그냥 좋았다. 언제든 달려가도 같은 자리에 내편이 묵묵히 있다는 느낌. 아무리 속상한 일이 있어도 언제건 깡그리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변함없이 나를 기다린 다는 것.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엄마가 내어주는 따끈한 집밥 한 끼에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일상. 어린 내가 문 밖의 세상을 자신감 있게 박차고 나설 수 있었던 힘은 사실 엄마가 늘 집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말이 트이고 생각하는 힘이 생길수록 나는 엄마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갔다. 엄마는 어린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지 않고 늘 동등한 눈높이에서 바라보았다. 엄마와 대화하며 엄마의 말과 어휘를 배웠고, 한글을 깨치고 나서는 서재 가득 빼곡했던 엄마의 책들을 무작정 읽으며 엄마가 아끼는 글들을 읽어나갔다. CD장 가득했던 엄마가 좋아했던 음악을 들으며 엄마가 살던 시대의 감성을 자연스럽게 흡수했는데 지금도 내가 80년대의 아날로그 감성과 문화에 이토록 심취하는 것도 이때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나는 참 유별나게 까탈스러웠고 내성적이었다. 타고난 내향인에 사회성도 부족했던 내게 유치원이라는 낯선 곳에서의 생활은 너무나 스트레스였다. 보통은 아이의 사회성 발달을 위해서 억지로라도 유치원에 보내겠지만 엄마는 나를 유치원에 보내지 않고 편안하게 가정 보육을 했다. 비록 유치원은 건너뛰었지만 훗날 학교 생활을 하면서 특별한 어려움이 없었으니 이 또한 다행이었다.


유치원을 포기하면서 까지 엄마와 물리적으로 충분한 시간을 보낼 있었던 것이 이제 보면 너무 잘한 일이었다 싶다. 10대 때 유학을 떠나고 거의 반평생을 혼자 살아야 했던 훗날의 나의 삶을 생각해 보면, 몇 년이라도 더 엄마와 밀도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다.


엄마와 나는 서로가 각별한 사이인 만큼 성격이 불 같은 데가 있어서 갈등이 생길 때는 아빠와 여동생이 자리를 피할 정도로 격렬하게 싸우던 시절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내게 가끔 하던 말은 이것이었다.

 

"내가 사회적으로 능력 있는 엄마여도 네가 나한테 이런 소리가 나오겠냐"


사범대에 갔다가 학비가 없어서 꿈을 접고 도피하듯 결혼을 선택한 엄마에게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자는 늘 그녀의 자격지심을 건드는 존재였다.


그런데 엄마 스스로 느끼는 결핍과 달리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엄마가 이대 나온 여자가 아니어서, 사회적으로 출세한 여자가 아니어서 부족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엄마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오히려 엄마가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자아니어서 나는 너무 좋았다.


엄마가 집에 있어주었기에 엄마를 애달프게 그리워하며 자라지 않았다. 엄마가 집에 있어주어서 그냥 자라는 내내 힘이 났다. 엄마란 그런 존재니까. 식은 밥을 차려줘도, 때론 퉁명스럽게 말을 하더라도, 거실 소파 위에 앉아 있기만 해도 그냥 힘이 나는 존재이니까.


엄마가 나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오롯이 공들인 만큼 나는 얼마나 엄마에게 잘할 수 있을까. 아마 엄마가 내가 쏟은 사랑만큼 보답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자주 기억하려고 한다. 엄마가 나를 얼마나 진심을 다해 키웠는지를. 그 기억으로 험난한 세상을 다시 한번 살아내고, 무너지는 마음을 되잡고 일어나다 보면 언젠간 나도 엄마에게 든든한 산과 같은 아들이 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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