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옷은 동, 서양을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공공장소에서 내보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금기시되었고,
일부 계층에서만 속옷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가능했었다.
겉옷이 사회성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속옷은 보는 사람이 극히 한정되어 있는 아주 개인적이며,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20세기말에는 속옷을 겉으로 드러내 입는다는 것이,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특수한 계층에서만 선택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 일반적인 레이어드 방식으로 인식되어 지금까지 패션의 한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의복의 형태는 사회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20세기 후반 버블경제의 위축과 급변하는 정세에 사람들의 정신적 긴장감이 고조되고,
다음 세기에 대한 기대감 등으로 사회적 정체성이 불안정해지면서, 정신과 물질이 분할되어 가치관의 혼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문화, 예술에 있어서도 절충주의와 함께 기존의 규범에 대한 해체양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고
이러한 현상을 세기말적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이처럼 현실에 대한 불안과 회의로 인해 사람들은 좀 더 자극적인 패션을 추구하게 되었고,\
과거에 일종의 여성 고문 도구로도 여겨졌던 코르셋 등이 더 이상 억압과 학대의 상징이 아닌, '로맨티시즘(Romanticism)으로의 승화'로 패션에 표현하였다
1980년대 이후 패션에 현저하게 나타나는 속옷의 겉옷화 현상으로 1990년 미국의 인기가수 마돈나(Madonna)가 코르셋 드레스를 입고 공연하였다.
이는 ‘속옷과 겉옷을 구분해 오던 기존의 가치관을 파괴함’으로써 패션에 부각되었다.
그 무렵 패션계에서는 1994년 ‘인프라 어패럴(Infra-Apparel)'이라는 테마로 대규모 전시회가 개최된 바 있으며 실험정신이 강한 서양의 디자이너들이 다양하게 속옷을 겉옷으로 표현하였다.
속옷이었던 의복을 일상에서 그대로 겉으로 꺼내 입고,
속옷에 주로 사용되었던 얇고, 가벼우며, 비치는 소재를 겉옷의 소재로 사용하여 신체를 감추어진 듯 드러냄으로써, 공적인 영역에서의 노출을 극대화하여 표현하게 되었다.
이러한 유행은 80년대 초에 시작되어 90년대 이후에 속옷의 겉옷화 현상으로 새롭고 강력한 트렌드로 부각되었으며 현대 패션의 한 흐름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1900년대 세기말, 속옷 노출 패션 트렌드가 조선여인들에게는 1700년대 후반부터 이미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신윤복, 김홍드의 풍속화를 살펴보면, 은밀한 속옷이 겉으로 드러나는 착장방식이 그 당시 대부분 여인들의 한 스타일로 자리매김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신윤복의 풍속화에는 겉치마를 걷어 올려 속바지를 겉으로 드러나게 입은 모습, 저고리 길이가 너무 짧고 가리개를 하였으나, 가슴살이 보이거나 가리개용 허리띠가 겉으로 드러나게 묘사되어 있다.
가슴을 가리기 위한 용도라면 저고리의 길이를 좀 더 길게 하고, 둔부를 가리려면 치마길이가 발목을 가리는 정도이면 충분할 것 같다.
하지만 풍속화 속 여인들은 저고리를 아주 짧게 하여 따로 가리게를 드러나게 착용하였고, 치마를 과장되게 부풀리고 길게 입었던 스타일은 어떤 미의식을 추구함일까?
풍속화에 보이는 여인들은 대부분 기녀들이지만 양반가의 부녀 모습에도, 일반 부녀의 모습에도 이러한 스타일이 대부분인 것을 보면 그 시대의 미의식과 부합附合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의 사대부가 이익李瀷은『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부인의 의복이 소매는 좁고 옷자락은 짧은 것이 요사한 귀신에게 입히는 것처럼 되었다.
나는 이런 옷을 비록 좋게 여기지 않으나 대동(大同)으로 되어가는 풍속에는 어쩔 수 없겠다”라고 한 기록에서 조선여인들의 트렌드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여성의 살을 절대로 타인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관습과 부녀의 정숙함을 덕으로 강요하는 사회에서 이에 따라 신체를 은폐하기 위한 여성의 내의가 가장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속옷이 위생적, 실용적 목적을 넘어 다양함을 보이는 것은 여성들에게 폐쇄된 생활을 강요했던 사회적 현상을 반영한 것이며, “몸을 철저히 단속해야 한다”는 유교적 관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풍속화 속 여인들 옷매무새는 허리를 중심으로 상체 부분의 최대한 압박하였고, 하체 부분은 치마허리에 풍성한 주름을 잡아 둔부를 과장되게 부풀린 형태이다.
마치 그 시대의 백자 항아리를 엎어놓은 듯한 실루엣이다. 이러한 옷맵시를 연출하려면 얼마나 다양한 속옷이 필요했을까?
실제로 조선여인들은 상의上衣인 저고리를 착용할 때도 대개 "삼작 저고리"라는 것을 입었다.
‘삼복더위에도 한 겹만을 입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것’이며 ‘여성의 살을 절대로 타인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관습'에 따른 것이다.
정숙성에 대해 그 당시 사대부가의 이덕무는 “유순하고 정숙함은 부녀자의 복”이라 하여 여성의 정숙함을 중요한 가치 덕목으로 지적했다.
조선시대 중 후기의 여인들의 속옷 차림새는
상의上衣로 가슴을 가리는 가리개용 허리띠를 두르고 속적삼 위에 속저고리, 속저고리 위에 겉저고리를 착용했다.
가리개용 허리띠는 일반적으로 의례용儀禮用 대대大帶와 일할 때와 외출할 때 옷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치마 위에 매는 허리띠와 저고리와 치마 사이의 맨살을 가리기 위한 용도로 착용하였다.
그 위에 속저고리, 속적삼을 입었다.
다음 사진은 파평윤 씨(1735~1754)의 출토유물 가슴가리개( 가슴싸개),
전주 이 씨((1722~1792)의 출토유물에 보이는 삼작저고리 유물 사진이다.
출토 당시 삼작저고리를 착용하고 그 위에 포를 착장 한 상태이다.
따라서 가슴가리개와 속적삼을 재현하여 착장 한 모습은 다음과 같은 모습이다.
삼작저고리는 아래처럼 입고, 그 위에 속저고리, 겉저고리를 착용하는 것을 일컫는다.
하의下衣는
다리속곳→ 속속곳→ 속바지→ 말군→ 살창고쟁이→ 단속곳→ 너른 바지→ 무지기 치마→ 대슘치마가 있으며 성장盛裝 할 때에 이들을 순서대로 두루 갖추어 입어야 했다.
다리속곳은 내곤內褌이라고 하며, 하의 속옷으로는 가장 기초가 되는 속옷이다.
형태는 홑으로 된 2편(片)의 천을 꿰매어 허리에서 묶을 수 있도록 허리띠가 달려 있다.
요즈음의 속 팬티 용도이다.
속속곳은 다리속곳 위에 입었다.
단속곳과 거의 같은 형태이나 치수가 단속곳 보다 약간 작고, 바대와 밑 길이가 길게 되어 있다.
속속곳은 다리속곳 위에 입었다.
속속곳은 단속곳 보다 직접 살에 닿는 부분이 많아서 소재를 옥양목, 무명, 광목 등으로 하였으며 명주처럼 부드러운 감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속바지는 속속곳 위에 입는 속옷으로, 착용했을 때 속속곳을 완전히 가려주어야 했으므로 속속곳보다는 크기가 더 컸다.
속바지는 서민들 사이에서는 '고쟁이', '고장바지' 등으로 불리었다.
형태는 허리 부분의 통이 넓고 밑으로 내려오면서 바지통이 좁아져 자연스럽게 속바지의 아래 부분이 여며지도록 되어 있다.
살창고쟁이는 모시 4폭을 한쪽 가랑이로 만든 통이 넓은 속바지인데, 양쪽 끝을 허리말기에 달고 가운데 주름 부분을 오려내어 이 부분은 손으로 곱게 말아 감쳐 만들었다.
속바지 위에 입었고, 소재는 모시나 삼베로 만들었다.
살창고쟁이는 주로 여름철에 착용하는 속바지이다.
주로 모시나 삼베로 만들었는데 통이 넓은 속바지에 구멍을 내었다.
이는 통풍이 잘되도록 기능을 도모함과 "당 시대 시집살이의 고생스러움이 구멍으로 숭숭 빠져나가 시집살이를 수월하게 하라는 기원"과
"새댁이 시집에서 예를 갖추기 위해 여러 벌의 속옷을 입으면 통풍이 되지 않아 더울 것을 우려해서 친정에서 입혀 보냈다"는 속옷으로 '고생스러운 시집살이'를 상징하기도 한다.
단속곳의 형태는 양 가랑이가 넓고 밑이 여며지거나 트여있다. 길이는 바지보다는 길고 치마보다 약간 짧다. 일 반적으로 홑으로 되어있다.
단속곳은 속바지 위에 입었으며 서민 부녀자들은 단속곳을 치마 바로 밑에 입는 속옷으로 서민들 사이에서는 단속곳을 ‘겉속곳’으로 부르기도 했다.
너른 바지의 형태는 단속곳과 바지를 겹쳐 놓은 것 같은 가랑이가 넓은 바지인데, 보통 겹으로 되어있고, 앞은 막히고 뒤는 터져있다.
너른 바지는 주로 상류층에서 정장正裝때 착용했던 밑받침 옷이었으며 하체를 풍성하게 보이도록 단속곳 위에 입었다.
서민들은 너른 바지를 입지 못했으며 오늘날에도 옛 풍습을 찾는 가정에서는 혼수에 너른 바지를 넣어주기도 했다.
무지기 치마는 상류계층에서 성장을 차릴 때 치마 밑에 입는 속치마의 일종이다.
무지기치마의 형태는 모시 12폭으로써 3층, 혹은 5층, 7층으로 길이가 다른 여러 겹의 천을 층층으로 차이를 두어, 한 허리 말기에 단 것으로 겉치마를 풍성하게 하기 위한 속옷이다.
현대의 '페티코트 Petticoat'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무지기치마는 너른 바지 위에 입었다.
대슘치마는 특히 귀족계층에서 사용하던 속치마의 일종으로 성장盛裝할 때 착용했다.
대슘치마는 무지기 치마 위에 입었고, 소재는 모시 12폭이며, 길겉치마보다 짧게 입었다.
이처럼 조선 중 후기의 여인들은 신체를 단속하기 위해, 예를 갖추기 위한 성장을 할 때 10여 벌의 속옷을 갖추어 입었다.
조선시대 여인들은 다양한 속옷을 갖춰 입으로써 몸단속을 철저히 하면서도,
상박하후上薄下厚의 옷맵시를 연출하여 그 당시의 미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상의는 너무 짧아서 겨드랑이 살이 보이고, 이를 가리기 위한 용도로 가리개 허리띠로 조여 매고,
하의는 백자항아리를 연상하게 하는 둔부의 앞, 뒤 볼륨을 위해, 치마 밑에 속옷을 얼마나 많이 갖추어 입었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속옷을 겹겹이 껴입어 상체는 동여매고,
하체는 여러 벌의 바지와 치마를 입어 부풀려서, 상체는 슬림하고 하체는 풍성하게 보이는 실루엣을 지향한 것으로 보인다.
몸을 가리기 위한 긴 치맛자락은 걷는데 불편했을 것이고, 해서 치맛자락을 추켜올려 앞으로 끌어당겨서 허리띠를 매는 착장 방식은 걸을 때 거추장스러움을 줄이는 방편이었을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겉옷 사이로 속옷이 드러나게 되고, 속옷이 드러남에 따라 여성들은 노출된 속옷을 의식하여 속옷에 장식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복식은 당시 사회의 문화, 사상 등 사회적 변화양상과 밀접한 영향을 받는다.
조선 후기는 임진왜란 이후 실용을 중시하는 실학사상 등이 사회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실학자들의 휴머니즘, 민족주의, 실용주의, 리얼리즘 정신과 같은 그 당시의 사상적 변화로 인해,
복식에서도 인체의 구속과 격식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실용을 중시하는 조짐이 나타났다.
즉 복식을 통하여 예禮를 갖추기 위해 ‘격식에 따라 의례화儀禮化하여 신분과 외관적인 효과’를 나타내려 했던 이전 시대의 복식과는 다른 경향을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여성의 복식도 간소화簡素化를 추구하게 되어, 저고리 형태가 단소화短小化뿐 아니라 의복 중복성의 간소화가 함께 이루어졌다.
치마도 허리끈과 ‘거들 치마’와 같이 긴치마를 걷어 올려 착용하였다. 또한 서민 부녀들은 ‘두루치’라는 길이가 짧고 폭도 좁은 치마를 착용하였다.
거들치마 치마는 신윤복의 풍속화 <정변야화>와 <기다림> 그림에서 여인들이 치마 위에 착용한 지금의 앞치마 형태의 치마이다.
긴치마 위로 덧입어 치맛자락을 단속하고 보행의 편리함을 도모하였으나, 추켜올린 치맛자락 사이로 종아리가 드러나게 자연스럽게 속옷이 노출되었다.
당시의 사대부가의 박규수에 따르면,
내의內衣로 입은 속저고리나 속적삼은 겉저고리 보다 조금씩 작게 입었는데, 이런 제도에 근본적으로 혼란을 가져온 것이 임진왜란 이후 사회 현상으로 보았다.
"사부가의 부녀자의 경우 임진왜란 이후에 겉옷이 없어지고, 속에만 입던 오랑캐의 복식 모양이 겉으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규수가 오랑캐 제도라고 하는 것은 바로 속옷이다. 겉옷이 없어지고 속옷이 임진왜란 이후에 겉으로 드러나 가릴 것이 없게 되면서 ‘옛 중국의 제도가 오랑캐의 제도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때의 속옷은 길이가 몹시 짧고 통이 아주 좁은 것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속면 저고리라는 것으로 그 소매는 겨우 팔뚝을 가릴 정도요, 그 옷자락은 가슴에도 채 내려가지 않는 정도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에도 “적삼은 날이 갈수록 짧아지고 치마는 날이 갈수록 벌어지기만 하는데, 이런 모양으로 제사 때나 빈객을 대접할 때 행사를 하니 한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여
겉저고리뿐 아니라 속에 입는 적삼까지 작아지고 있으며, 치마 입은 모습도 '벌어진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裝館全書』에 의하면 “여름에는 유방이 보일 정도로 짧았다”하여 이런 제도가 항상 사대부들 간에 문제가 되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세상 부녀들의 저고리는 너무 짧고 좁으며, 치마는 너무 길고 넓으니 의복이 요사스럽다.
소매에 팔을 꿰기가 어려우며 한 번 팔을 구부리면 솔기가 터지며 간신히 입고, 혈기가 통하지 않아 부풀어 벗기가 어려워 소매를 째고 벗기까지 하니 어찌 그리도 요망한 옷일까!
대저 복장에 있어서 유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창기들의 아양 떠는 자태에서 생긴 것인데,
세속 남자들은 그 자태에 매혹되어 그 요사스러움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처첩에게 권하여 그것을 본받게 함으로써 서로 전하여 익히게 한다.
시례時禮가 닦이지 않아 규중 부인이 기생의 복장을 하도다 모든 부인은 그것을 빨리 고쳐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 당시 사대부 학자들이 부녀자의 짧은 저고리와 좁은 소매에 대하여 예의에 어긋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모두 그 당시 복식에 대한 풍속의 변화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대부가의 비판이 있었음에도 풍속화에서 볼 수 있는 노출 현상은
은폐를 위한 도구로써 많은 속옷을 입어야 했던 여성들이 생활 속에서 짧은 저고리와 긴 치마가 흘러내리고,
거추장스러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겉치마를 걷어 올려 끈으로 묶어 입었을 것이고,
이에 따라 자연스레 속옷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윤복 풍속화 속 여인들의 옷매무새는 저고리 길이가 겨드랑이 살이 보일 정도로 짧고, 배래는 곡선이 거의 없는 직선형이다.
도련 밑으로는 흰색 치마 허리띠를 조여 매어 허리를 날씬하게 보이게 하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치마는 하의 속옷을 여러 벌 입어야 했기에 부풀려진 치마는 대부분 허리띠로 치마 끝을 추켜올려 매어 하체를 더욱 과장되어 보이게 입었다.
이는 전형적인 상박하후上薄下厚 실루엣이다.
즉, 이러한 착장방식은 편리를 도모하였으나 은밀한 내의(內衣)가 노출되었고, 허리끈이나 거들 치마는 여성의 신체 곡선을 강조하게 되어 선정적인 아름다움으로 연출되었다.
따라서 여인들은 사회변화에 따른 정신적 가치와 복식에 대한 미의식이 달라지면서,
복식의 간소화와 신체미를 강조하는 옷매무새를 지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 풍속화 <야금모행夜禁冒行>에 서 있는 여인의 추켜 올린 치마사이로 가는 줄 선이 보이는 누빔 속바지이다.
누빔을 한 속바지가 풍성한 치마를 허리띠로 동여매어 상대적으로 슬림해 보인다.
길고 넓은 치맛자락을 활동하기에 편리하도록 허리끈으로 묶었을 때, 자연스럽게 속옷이 노출되고, 이는 보이는 타인을 의식하여 드러나는 속옷을 곱게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신윤복, 야금모행>
김홍도의 < 큰 머리 여인>의 단속곳과 바지는 겉옷만큼이나 화려한 색감의 단속곳이다.
통이 좁은 연노랑의 속바지 위로 좀 더 진한 노란 비단 단속곳으로 보인다.
<김홍도, 큰머리 여인>
실제 출토된 유물에도 여인들의 단속곳은 화려한 비단무늬, 누빔의 단속곳도 볼 수 있다. 누빔은 보온을 위함이거나 실용을 위함이기도 하지만 장식의 효과도 도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속옷은 보는 사람이 극히 한정된 아주 개인적이며,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것’, ‘정숙성과 성적매력’을 드러낼 수 있는 옷이다.
그러나 속옷을 겉옷만큼이나 장식을 했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이를 보여줄 가능성과 노출을 의식한 꾸밈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풍속화 속 여인들의 옷매무새에서 현대의 세기말에 등장하였던 속옷의 겉옷화? 패션이 이미 조선 시대 후기에 유행되었음이 흥미롭다.
여인들은 여러 겹 속옷을 갖춰 입음으로써,
당시 사회에서 부녀의 도로 여기던 정숙한 몸단속을 위해 신체를 감추었으나, 생활의 편리를 도모한 복식의 착장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속옷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속옷의 노출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여 장식하게 되었을 것이고,
자연스러운 노출은 은폐의 답답한 부담을 해소하는 방편으로 한몫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여인들에게 정숙을 강요하기 위한 다양한 속옷이,
착장방식에 따라 은폐와 정숙, 노출과 관능 사이 경계를 넘나드는
스타일링의 한 방편으로 활용되었음은 사뭇 아이러니하고 새삼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