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문학동네)
말을 잃은 여인과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가 있다. 소설 중반부까지 그들은 각자의 사연과 어둠을 끌어안고 자기만의 시간을 건넌다. 남자는 ‘희랍어 강사이고, 여자는 그의 수강생이라는 상황이 확인되는 순간 소설은 다시 긴 침묵 같은 각자의 시간들을 보여준다. 소설의 후반부가 되어서야 드디어 그들은 ‘말’이란 걸 나눈다. 이때 한 사람은 화자의 역할만을, 다른 한 사람은 청자의 역할만을 하지만, 그들이 나눈 건 분명 ‘말’이었다. 앞을 볼 수 없는 그에게 그녀는 잘 듣고 있다는 인기척을 간간이 내주면서 그의 말을 열심히 들어준다. 침묵 속의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왠지 제 안의 말들을 차분히 풀어놓는다.
희랍어 강사인 그는 어두운 지하 계단에서 구르고 안경이 깨진다. 안경 없인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그는 누군가 구해주러 오기만 기다린다. 그 시각에 수강생도 강사도 없는 빈 강의실에 앉아 수업이 시작시작되기만 기다리던 그녀는 도움을 청하는 그를 계단에서 구해준다. 그녀는 집까지 그를 데려다주고 그의 긴 이야기를 들어준다. 아침이 밝기 전 그의 집을 빠져나왔던 그녀는 다시 돌아와 문 연 안경점으로 가자고 그의 손바닥에 써준다. 이것이 그와 그녀가 유의미하게 함께 보낸 유일한 시간이다.
좀 특이한 소설이다. 두 주인공이 함께 스토리를 만들어가지 않는다. 그와 그녀는 겹쳐지는 부분이 없는 듯하나 묘하게 닮아있다. 그녀는 어릴 때 키우던 개의 사고사와 개에게 심하게 물리는 사건 이후 말을 잃었고 어른이 되어 또다시 말을 잃었다. 아이의 양육권을 전남편에게 빼앗겼고, 친정엄마의 장례식을 치렀다. 그녀가 말을 잃은 이유가 명확하진 않다. 그러나 그녀는 언어의 ‘무심한 폭력성’에 대한 거부로 말을 잃은 듯 보인다. 실어증은 아마도 상처를 회복하지 못할 만큼 무너져버렸을 때 자신을 보호하는 최후의 방어수단일 것이다. 자기만의 껍질 속으로 깊이 파고드는 것으로 무너지는 자신을 붙들어 세우는 것이 아닐까.
그는 어린 시절 독일로 이민 갔다가 어른이 되어 모국어의 땅으로 돌아온다. 모국어의 나라에서 고대 이국어인 희랍어를 가르친다. 시력을 잃어간다는 사실을 감추고 두꺼운 안경에 의지한 채 살아가는 그는 현재의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과거에 사랑했던 연상의 여인에게, 독일에 남아있는 여동생에게, 마지막에는 말을 잃은 그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는 이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독백을 이어간다. 어둠 속에 기척 없이 앉아있는 그녀에게 하는 독백은 독백에서 벗어나 비로소 ‘대화’가 된다. 받을 수는 없지만, 줄 수는 있는, 청자에게 직접 가서 전달되는 ‘말’이 된다.
앞을 볼 수 없는 그가 과거의 기억 속에 집중하는 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볼 수 있었던 시간들 속의 '기억'이, 볼 수 없는 현재 속에서 그가 살아가는 힘인지도 모른다. 그곳에선 연푸른 나무들과 꽃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색채를 내뿜고 있다. 그곳에선 사랑했던 그녀가 반짝이는 해를 향해 손을 모으고 있다.
"잘 보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소리가 잘 들릴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 시간입니다. 거대한 물질의 느리고 가혹한 흐름 같은 시간이 시시각각 내 몸을 통과하는 감각에 나는 서서히 압도됩니다." (p.39)
보이지 않으면 오직 현재의 시간이 가혹하게 통과하는 감각과 과거의 찬란했던 시간만이 자신을 지배하게 되는 듯하다. 보이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지나온 삶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가 보인다.
그와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다.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함께 하진 않았으나, 왠지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또다른 자아처럼 느껴진다. 오랜 짝사랑의 아픔이 있는 그는 ‘보는 것’을 추억하며 현재의 시간을 산다. 말을 잃은 그녀는 ‘언어’를 추억하며 말 없는 현재의 시간을 산다. 두 사람은 현재의 시간 속에 있지만, 과거의 상처와 슬픔 속에 둥지를 틀고 살고 있다. 두 사람이 나누는 입맞춤은 과거의 슬픔에서 빠져나와 현재의 시간 속으로 서로를 끌어내는 신호가 아닐까. 아픔은 아픔을 알아본다. 어둠은 어둠을 알아본다. 두 슬픔이 만나 두꺼운 슬픔의 껍질을 깨고 허공 속에 흩어지면 좋겠다. 산산조각나 흩어진 유리조각처럼 아무것도 아닌, 빛을 받아 반짝이다 사라져버리는 그런 슬픔이 되어버리면 좋겠다.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에게 ‘언어’란 무엇일까, ‘본다’는 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언어는 소통하고 교감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때리고 찌르고 아프게 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어떤 상처는 절대로 아물지 않고 내장 깊숙이 박혀있는 총알처럼 서서히 죽어가게 하기도 한다. 주로 너무 쉽게 내뱉어지기 때문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치명상을 입는다. 말을 잃은 그녀가 희랍어 강의를 듣는 이유는 그 때문이리라.
“바로 그 복잡한 문법체계가 - 수천 년 전에 죽은 언어라는 사실과 함께 – 나에겐 마치 고요하고 안전한 방어처럼 느껴졌어.” (p.119) 라는 그의 독백은 그녀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녀 또한 희랍어가 복잡한 문법체계를 가진 수천 년 전에 죽은 언어이기 때문에 희랍어를 배운다고 생각한다. 그 죽은 언어는 어떤 폭력성도 없다. 말을 하고 싶지만 말을 할 수 없는 그녀가 언어를 추억하고 언어를 사랑하는 방법이 희랍어를 배우는 일이리라.
희랍어는 왜 배우느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그녀는 오래 전 흉터 속의 눅눅한 기억을 떠올린다.
미쳤군. 막 의식을 차린 그녀에게 어둠 속의 사람이 내뱉었다. 미친 여자한테 그동안 아이를 맡기고 있었어. 세 치의 혀와 목구멍에서 나오는 말들, 헐거운 말들, 미끄러지며 긋고 찌르는 말들, 쇳냄새가 나는 말들이 그녀의 입속에 가득 찼다. 조각난 면도날처럼 우수수 뱉어지기 전에, 막 뱉으려 하는 자신을 먼저 찔렀다.(p.165)
그녀가 말을 잃은 원인은 딱 하나의 사건이 아니므로, 무엇 때문이라고 꼭 집을 수가 없다. 다만 혓속의 면도날처럼 마구 찔러대는 언어들에 수많은 자상을 입고 자신이 뱉으려는 언어들에 자신이 먼저 찔리는 반복되는 경험들이 그녀에게 말을 앗아갔을 것이다. 그녀가 말을 잃은 대신 희랍어로 붙들고 싶은 것은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이 남아서라고 생각한다. 말이 되어 나오지 않지만, 끝끝내 그녀가 뱉어내고 싶은 말은 아이를 향한 말일 것이다. 그녀의 애달프고 간절한 사랑이 아이를 향해 터져나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소설은 스토리를 따라가는 소설이 아니라, 작가가 그려보이는 '언어의 그림'을 따라읽는 소설 같다. 소설이지만 심상이 주가 되는, 시와 같은 소설이다. 언어에 대해, 소리에 대해, 사물들에 대해, 시간에 대해 그녀가 그려보이는 언어의 그림이 아름답다. 모든 페이지를 다 필사하고픈, 아름답고 정제된 문장들이 가득하다. 책장을 펼칠 때마다 언어의 아름다움에 홀려서 넋을 잃고 읽었다. 그저 언어의 향연에 취한 듯, 어둠의 미학에 홀린 듯 그렇게 읽고 나니 내 안에 언어들이 가득 들어온 느낌이다. 폭력의 언어는 말을 앗아가지만, 시의 언어는 말들의 속살거림을 뿌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