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가수는 사랑을 노래하고, 배우는 사랑을 연기하고, 작가는 사랑을 쓰고, 화가는 사랑을 그린다. 그리고 그런 사랑의 대부분은 아주 '낭만적인 사랑'이다. 낭만적인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누군가를 만나면서 만지고, 이야기하고,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꿈꾸며, 희망에 차서 행복해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를, 어느 순간 자기 자신에게조차 잊혀진 ‘나’라는 존재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이상의 세계 그 자체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는 낭만적인 음악과 낭만적인 영화, 낭만적인 문장과 낭만적인 그림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을 욕망하며 그런 사랑을 갈망한다—여기에 대해서는 곧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가 그런 낭만적인 환상에 너무 도취되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행복한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고통 또한 따라오리라…….
우리는 평생을 몰랐던 사람과 만나 사랑을 하고,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된다. 그러나 처음에 뜨거웠던 그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끝내 종말을 맞이한다. 그러한 수순을 밟는 연인들이 현대 사회에서는 굉장히 흔한 경우로 자리 잡았다. 통계적으로 보나 주변을 둘러보나 실제로 아주 오랜 기간 동안 행복한 관계를 이어가는 부부나 연인은 거의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를 하면서, 혹은 결혼 생활을 하면서 행복한 관계를 지속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을 잘 모른다. 자신이 대체 어떤 인간인지,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지, 시시때때로 변하는 감정에 대해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이해하는 것조차 벅차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에 인공지능처럼 일 초의 주저함도 없이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종종 자신보다 알고리즘이 나를 더 잘 이해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한평생 '나'로 살아온 우리는 왜 자신을 알지 못할까? 그 이유는 우리가 살면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의 이러이러한 태도는 적절치 못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보면서 자신을 객관적 판단의 심판대 위로 올려놓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그런 일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일시적으로 자신의 행동에 비판을 가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항구적으로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자기반성의 지속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미덕과 악덕은 인간의 기분에 의해 손쉽게 좌우될 수 있는 것이다.
내면, 그 복잡 미묘한 변덕쟁이의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포착할 수 있겠는가! 혼자 있을 때 화가 난다고 해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화를 내야 할까?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불안에 떨고 있을 때 불안의 원인을 찾기 위해 가만히 앉아 내면을 들여다봐야 할까? 아니, 오히려 정반대로 행동한다. 우리의 본능은 일단 감정이 격해지기 시작하면 마음의 고요를 되찾기 위한 방어기제를 발휘한다. 자아가 매우 취약한 상태로 전락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평소였다면 아무런 타격이 없을 법한 친구의 언어유희도 그 순간만큼은 중력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단테의 지옥으로 떨어뜨린다.
우리는 감정에 문제가 생기면 이성적 사고와 판단 대신, 일단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무엇을 찾는다. 이를테면 친구들을 불러 내면의 고통을 공유하고 친구들로 하여금 잠시나마 복잡한 마음이 진정되길 바랄 수도 있다. 혹은 술을 마시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게임을 하거나, 기분을 전환시킬 여행지를 알아보기도 한다. 혼자서 그 어두운 감정에 몰두하여 인정하기 싫은 현실의 괴로움에 빠지기보다는 감정을 환기시켜 하루빨리 일상으로 복귀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런 행동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는가? 나의 경험상 그런 행동들은 도리어 자기기만의 토대가 되었다. 문제적 감정에 다다를 때마다 자신을 깊이 있게 되돌아보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나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 결과 그런 행위들의 반복은 습관으로 낙착되어버렸고, 자기반성은 망각되고 말았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조용히 혼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는 파스칼의 말은 옳다.
이러한 인간의 생리적 방어기제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지?', '나는 어떤 사람이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지?', '내가 원하는 삶은 어떤 삶이지?'……. 자신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자신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나의 연인 또한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연인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당연히 제대로 된 사랑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사랑에 어려움을 느끼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사랑에 있어서 만큼은 낭만적인 태도, 즉 이성보다는 본능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사랑을 아름답고 낭만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순간적인 감정이 이성보다 늘 낫다고 믿는다. 사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느낌인데 이성이 개입하는 순간 그 느낌이 산산조각 난다고 생각한다. 감정을 너무 이성적으로 분석하려다가는 사랑의 감정을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체 왜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는 거야?', '사랑은 그냥 느끼고 표현하는 거지'……. 우리는 사랑은 충동적이며,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느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대한 인식이 이토록 낭만적일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할 것이, 우리는 단 한 번도 사랑에 대해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다. 우리는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삶을 윤택하게 살아가기 위한 오만가지 것들을 배운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서 만큼은 배우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토라진 마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사랑하는 사람을 가끔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안타깝게도 이전 세대의 사람들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 사랑에 적용시킨다.
우리는 어째서인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본심을 감추려 하는 이상한 태도를 취한다—이것을 낭만주의의 저주라면 저주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문제는 꽤 긴 시간 연애를 한 연인, 특히 결혼을 했거나 결혼을 준비하는 연인들에게 중요한 문제로 다가온다. 우리는 한 사람과 오랫동안 사랑을 할 때, 지극히 단순한 이유로 말을 잘 꺼내지 않는다. 그 대담한 침묵 속에는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존재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거야’…….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것보다 침묵에 의해 한결 더 진실하다. 그러나 이러한 침묵에는 매우 위험한 모순이 존재한다. 이 논리대로라면 사랑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말을 하지 않게 될 테니 말이다.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면 그건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듯이 서로에게 익숙해질수록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대화를 중단한다. 이 능동적 무언의 관계는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 같은 문제는 비단 오래된 연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초기의 연인들은 어떠한가? 가령 만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연인이 감성을 자극하는 고풍스러운 이탈리아 식당에 와 있다고 가정해보자. 우아하게 반짝이는 샹들리에 조명은 연인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워주고 잔잔하게 깔린 음악은 두 사람을 식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준다. 그런데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그 순간, 한 사람은 연인에게서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가령 기적적인 속도로 다리를 떨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눈에 거슬리는 사소한 행동 하나 때문에 현재의 아름답고 완벽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모습조차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낭만성이 부여된 사랑은 그 사람 안에 있는 매력을 재구성하고 그것을 계속 주시하려는 눈을 가지고 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침묵을 권고하기도 한다. 평소에 싫어했던 습관을 내비치는 사람에게서 매력을 찾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낭만적 사랑은 사람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이끌려는 욕구가 동반된다. 그러나 훗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일상이 더 이상 낭만적이지 않게 되었을 때, 즉 우리 모두가 경험했고, 경험 중이며, 경험할 예정인 그 냉소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거슬림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사랑이 삶 자체에 의해 위협당할 때가 있다. 자신들이 창조한 세계를 벗어나 다시 원래의 세계로 되돌아올 때,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은 전에 느꼈던 고독과 권태와 우울이며, 창조된 세계에 남겨진 사람이 느끼는 것은 일종의 정신착란 증세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느 시점부터 시작된 자신을 지적하는 상대방의 권태로운 언행에 실망한다. 그들은 '나에 대한 사랑이 식었구나', '이제 변했구나'라는 생각들을 안고 살아간다. 감정이 격해진 상태의 연인들의 공통점은 둘 다 자신의 입장만 주장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은 이 시대의 일반적인 갑론을박이다. 다툼은 대게 이런 식이다.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바꾸려고 들지 마!" 그런데 적어도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신뢰하는 사이라면 상대방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또 바뀌려고 노력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우리가 그렇게 완벽한가?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은폐되어 가장 사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가장 동떨어진 존재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못해 자기기만을 일삼고 자기모순을 의식하면서, 뻔뻔스럽게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다닌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려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정당한 자기반성의 발로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변화를 거부하고 자신과 더 잘 맞는 상대를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행복한 사랑 이야기는 늘 너무 지루하다. 우리를 열광하게 하는 사랑은 단조로운 행복이 아니며 다정스러운 화해도 아니다. 조용한 사랑은 권태에 의해 무너져 내린다. 사랑을 장식하는 이미지들 속에는 에로티시즘과 플라토닉 이상의 무엇이 존재한다. 아, 우리는 집착을 원한다. 새롭게 창조된 세계에 대한 집착,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심을 다해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집착은 고통과 쌍을 이룬다. 이것은 하나의 자명한 사실이다. 나에게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사랑에 ‘실패’하는 본질적인 이유로 생각된다. 우리는 실패를 원했던 것일까? 그러나 너무 그런 쪽으로 밀고 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