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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띵꼽미Think of me Sep 04. 2022

연인의 이성 친구에 관하여

  남녀 사이에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없는가에 관한 생각은 오늘날 연인들의 해묵은 문제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와 관련한 문제를 놓고 숱한 논쟁을 벌였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 주제를 얼마나 의미심장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랑을 하는 관계라면 반드시 치러야 하는 의례처럼 누구든지 이 문제를 다루어 보았을 것이다. 나는 대립의 구도에 서서 격분에 찬 연인들을 수차례 목격한 바 있다. 그러나 결론이 언제나 흐지부지되는 모습 또한 지켜보았다. 각자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숱한 사례들을 열거하면서 항변에 항변을 거듭하는 모습에는 어떤 희극적인 면까지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나름대로 심각한 이유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부드러운 관계를 유지하다가도 연인과 이성 친구 간의 친밀도가 자신과의 친밀도를 웃도는 느낌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고 말한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이성 친구와의 지속적인 만남을 이해받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답답해한다. 오히려 자신의 사생활을 간섭하고 통제하려는 연인의 행동 때문에 고통받는다는 것이다. 서로의 입장에서 합리적이지 않은 상대방의 견해는 하루가 멀다 하고 갈등의 초석이 된다. 그러나 자신의 주관에 호소하는 것만큼 따분한 일도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이 문제를 흔히 가치 판단의 부정합으로 결론지어 왔다. 각자의 입장이 있고 가치판단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결국 논쟁 자체가 모순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구를 위한 입장인가? 무엇에 대한 가치판단이란 말인가? 자유로운 영혼? 아니면 정열적인 사랑? 뭐가 되었든 우리는 여기서 자신의 이기적인 면모를 다시 한번 또렷하게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만나기 전까지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사람과 짝을 짓고 살아야 하는 이 척박한 땅 위에서, 우리는 그토록 사소한 문제를 두고 분쟁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사소하지만 복잡미묘한 주제를 놓고 대립할 때는 개인의 고유성, 즉 보고 듣고 느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주장하기보다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간 본연의 특성을 이해하고 거기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공감의 태도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논쟁의 씨앗이 된 질투라는 감정을 간략하게 알아보고, 우리가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인간학적 관점에서 검토해보고자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비단 오늘날 불쑥 솟아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주위를 어슬렁대는 이성들은 수백 년 전에도 꽤나 다분히 골칫거리로 작용한 듯하다. 그러한 모습들을 지켜본 17세기 프랑스의 작가 라 로슈푸코(La Rochefoucauld)는 인간이 느끼는 질투심에 대해 사색하고는 새로운 통찰을 이끌어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질투에는 나름 정당하고 합리적인 면이 있다. 왜냐하면 질투는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다고 믿는 행복을 지키기 위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질투의 과정과 결과를 포착하여 이렇게 말한다. “질투는 의혹을 먹이로 삼는다. 의혹이 확신이 될 때 질투는 깨끗이 소멸되거나 광기로 변한다.” 나에게 이러한 명제는 정신분석학적 통찰로 보이는데, 독자들은 어떨는지? 이후 2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19세기 프랑스의 작가 스탕달(Stendhal)은 사랑하는 사람의 사생활에 간섭하는 것이 관계에 얼마나 큰 악영향을 미치는지를 경험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여자와 사이좋게 지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자의 일에 절대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비록 수백 년 전 지구 반대편에 존재했던 사람들이 남긴 격언이지만 그들의 통찰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 사랑의 영역에서 나타났던 문제들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삶에 동일하게 내비치고 있음이 확인되는 것은 적잖이 흥미로운 일이다.


  오늘날 사랑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은 일부일처제에 대한 개념이 상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한 사람이 동시에 둘 이상의 사람과 사랑을 하는 행위는 금기시되었고 타락한 개념이 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명화된 사회에서 바람, 불륜, 상간, 간통, 내연은 상대를 기만하고 자신의 욕망만을 탐하는 악으로 묘사된다. 그것들은 바람직하지 못한 남녀 관계의 추악한 면을 나타내는 뜻으로 해석되고 사랑에 있어서 가장 혐오스러운 배반 행위이자, 배반당한 사람이 배반 한 사람에게 복수를 하더라도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의 연인이 자신 외에 다른 이성들과 어울려 다니는 꼴을 못 본다. 예를 들어 사교성이 좋은 연인이 이성 친구와 함께 술자리라도 갖는 날이면 일단 기분이 안 좋다. 짜증이 밀려오고, 사소한 것 하나에도 쉽게 예민해진다. 잠시라도 연락이 되지 않거나,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연인의 부당한 태도는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행복과 희망으로 가득했던 일상이 우울과 공포로 채워지고, 머릿속에서는 수 십 가지의 각본들을 써 내려간다.


  우리는 상상한다. 친구라는 녀석이 나의 애인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술김에 스킨십이 자연스러워지지 않을까? 오히려 더 적극적이지 않을까? 술에다가 몰래 약을 타는 건 아닐까? 전화기는 왜 꺼놓은 걸까? 다음 날 수십 통의 부재중 통화 내역을 보고 내 흥분을 진정시키는 데 급급해서 변명부터 늘어놓는다면? 술에 취하는 바람에 연락하는 걸 깜빡했다고, 미안하다고, 배터리가 방전돼서 미처 연락하지 못했다고 변명한다면 그 말을 믿어야 할까? ……


  연인은 반론한다. 단지 전부터 친하게 알고 지내던 친구일 뿐이라고, 이성으로서의 감정은 전혀 없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우려하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다고, 이런 문제로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희망과 불안의 경계에 매달려 있는 당사자가 그 불편한 느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연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애쓰는 문구들이 되려 석연치 않은 느낌으로 인도하는 건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연인의 씁쓸한 태도를 보고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고, 편집증 환자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까탈스럽게 굴 필요가 있냐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종종 순간적인 욕망 때문에 간헐적으로 본능에 따라 움직이곤 한다. 그리고 본능에 기초한 판단은 대개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행여나 둘 사이에 그 어떤 성적 매혹이나 감정적 교류가 없다고 할지라도, 적은 가능성이 주는 불안과 혐오가 더 큰 가능성이 주는 믿음과 희망을 웃돌기 때문에 연인의 이성 친구에 대한 걱정과 불만은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실제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환상을 긍정하기 위해 불행해진다.


  따라서 이성 친구와의 감정이 단지 우정뿐이라고 주장할 때 자기기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주장은 해당 순간의 감정을 약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아무 근거가 없는 주장이 된다. 모든 행동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이나 동기가 존재한다. 외도를 미리 계획하고 실행으로 옮기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무엇이 문제의 발단이 된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완고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감정의 촉발을 마음대로 통제하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며 우리의 이성이 거부할 수 없는 본능의 요구이자 인간적 한계인 것이다. 만약 누군가 자신은 이러한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을 통제할 수 있으며, 자신의 의지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감정선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조차 속고 있거나, 자신마저 속이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이 땅에 피비린내를 내뿜었던 거의 모든 사건의 원인은 우리의 내면에 은폐된 원초적인 감정이었다. 그것이 일상적인 사랑의 영역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능은 골치 아픈 역학들과 얽혀 있는 인류 생존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 논쟁의 타고난 오류는 단 하나,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스스로 동결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다. 스스로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 연인을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 형언할 수 있는 모든 말을 동원해 결백을 입증하려 하지만, 그 어떤 말도 명백한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역사가 그러한 모순을 증명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의식적으로 애써 연인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다고 해도,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나 가능성의 영역 안에 숨어 있는 동물적 본능을 주시할 뿐이다.


  니체는 이성 친구 간의 우정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의 핵심적인 부분을 도려 내어 이렇게 말했다. “물론 여자와 남자는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친구 관계를 튼튼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생리적 반감이 이를 돕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친구에게 이성으로서 감정이 있는지 없는지, 생리적 반감이 있는지 없는지는 실제 당사자 밖에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연인의 내면을 무지에 근거하여 상상할 수 있을 뿐, 절대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 지금 당장 친구 이상의 감정이 없다는 말에 대한 믿음은 차치하고서 라도, 그러한 상태를 항구적으로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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