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궁극적으로 느낄 수 있는 방식이 ‘섹스’인가 혹은 ‘믿음’인가에 관한 생각은 오늘날 연인들에게 커다란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우리의 가장 은밀한 곳을 공유하는 사람이 언제부턴가 낯설고 꺼림칙한 느낌을 안겨줄 때 우리는 이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인류 역사상 이런 이분법적 딜레마는 수많은 모순과 부작용을 토해내며 대개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육체와 정신이 대립하고 있는 이 근원적인 이분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가치를 새롭게 끌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문제가 다소 수치스럽고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에게 섹스란 쾌락을 위한 신체운동으로서 단순히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고,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유전자 번식의 의도를 수반하는 행위로 인식되지 않으며,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믿음이 있어야 비로소 육체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가치관이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더욱 다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과 잠자리를 되풀이하면서 연인에 대한 믿음보다 어떤 희망에 대한 믿음에 더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저 쾌락이 건네는 손을 놓지 못하는 걸지도.
연인 사이를 좀먹는 거의 모든 문제들은 정말이지 거창하지 않다. 연인들은 편리함과 윤리 의식 사이에서 플라스틱 사용에 관해 열띤 토론을 하거나, 신이 있냐 없냐를 두고 논쟁을 펼치거나, 서로의 정치적 이념에서 구멍을 찾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물론 이런 경험을 하는 연인들은 종종 있지만 그것이 둘 사이를 갈라놓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연인에 대한 믿음이 조금씩 뒤틀리는 순간은 대개 너무나 사소해서 염두에 둘 가능성을 열어두지 못했던 상황들로 하여금 나타난다. 예컨대 저녁 메뉴는 누가 고를 건지, 올여름 여행 계획은 누구의 의견을 더 반영할 건지, 시시때때로 술에 취해 들어가는 버릇은 왜 고쳐지지 않는 건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건지, 잘 때마다 이불은 왜 그렇게 칭칭 감아가는 건지, 누가 아이들을 유치원에 데려다 줄 건지, 젖은 수건은 왜 매번 식탁 위에 올려놓는 건지, 왜 어느 순간 비밀이 하나씩 늘어만 가는 건지…….
이런 부작용들은 초기의 연인들 보다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연인들 사이에서 주로 목격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연인의 천사 같은 모습이, 실제 모습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제는 모두 알 것이다. 우리가 믿어 마땅하다고 여겼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환상적인 데이트 도중 갑자기 웬 이상한 녀석이 끼어들어 사랑을 방해하는 느낌마저 든다.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연인에 대한 믿음을 확신하지 못한 채, 희망적인 믿음에 기댄 채 사랑을 한다. 낭만적 사랑에는 언제나 희망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동봉되어 있다. 그런 믿음은 충분히 감동적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실제로 우리는 이상적인 사랑을 함께 실현할 줄 알았던 사람에게 너무 쉽게 진이 빠지고, 그 단단했던 믿음이 판단 착오로 인해 발생한 성급한 믿음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카뮈의 말처럼 사람은 어쩌다 기분이 내켜서 덕이 높은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연인 사이의 모든 갈등을 흥분하지 않고 침착한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만 있다면—그것이 정말 가능하다면 서로의 미래를 저주한다거나, 양육권이나 재산 분할 문제로 법원에 들락거리는 일은 딱히 없을 것이다. 연인들은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지만 오히려 그 과정에서 뒤따라오는 오해와 배신감, 그리고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한 자존심 싸움은 서로를 질식시키고 만다.
연인 간의 믿음이 깨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지금까지 나에게 행복과 희망을 주었던 사람이 점차 절망과 두려움으로 나를 인도할 때, 더 이상 사랑을 하는 관계에서 그 모습을 허용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믿음은 산산조각 나버린다. 현실적으로 낭만적 성향이 지배적인 우리가 이런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사전에 미리 알아두고 예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연인 사이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상징적인 행위, 즉 성적 결합을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섹스와 믿음은 서로 결부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대립의 구조를 띠고 있다. 섹스는 본능의 영역이다. 즉 생각할 필요가 없다. 판단할 필요도 없고 도중에 편견이 끼어들어 고귀한 시간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그 순간에 몰입하여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모든 신경과 감각이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이에 반해 믿음은 이성을 요구한다. 생각과 판단을 해야 하고, 신중해야 하고, 편견이 개입할 때도 있으며, 시간이 요구된다. 전자는 인간 욕망의 상징적 행위로 인식되며 관계에 은밀한 결속력을 실어준다. 후자는 참된 인간의 덕목으로서 인내와 신중함이 요구되며 수년간 공들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위험을 동반한다.
이별한 사람의 어두운 사연이나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지만 끝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는 부부의 선택을 보게 되면, 믿음은 인간 속성에 의해 배반당할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는 듯하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의 속성 중 하나가 배반과 실망의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줄 수도 있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섹스에 대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동전의 앞면에 불과하다면 어떠한가. 만약 그 이면에—성적 욕망과 그 단어가 내포하는 선정적인 뉘앙스 뒤에 우리가 보지 못한 가치가 있다면, 섹스를 단순히 쾌락의 행위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침실에서 벌어지는 성적 행위는 우리의 감춰진 모습을 밝혀주는 가장 급진적인 행위가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성관계를 맺을 때, 두 사람이 가능한 한 가장 깊은 방식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섹스는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은밀하고 부끄럽고 다소 수치스러울 수 있는 모습을 다른 누군가와 수줍게 공유한다. 상대가 습관처럼 메뉴 선정을 떠넘기거나, 여행 계획을 독점하거나, 매일 밤 이불을 탈취하는 행위는 더 이상 중요치 않다. 사랑한다는 말은 두 육체의 결합을 통해 대체된다. 관계를 오염시키는 질병들은 욕망을 통해 정화되고 문제의 숙주를 온몸으로 감싸 안는다. 우리의 야릇한 상상과 선정적인 욕망의 표출은 침대 위에서 정당성을 얻는다. 섹스는 다른 사람이 우리의 육체와 정신을 가감 없이 받아들이는 행위로 자리 잡는다.
우리는 섹스를 통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다. 섹스는 외로움의 끝과 신뢰의 확인을 상징하며 두 사람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따라서 침실에서의 대화는 다른 어떤 대화보다 밀도 높은 진정성을 갖게 된다. 자존심 때문에 하지 못했던 말, 말다툼이 일어날까 두려워서 할 수 없었던 말, 행여나 실망할까 봐 꺼낼 수 없었던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은 방어적 태도에서 벗어나 숨어 있던 모습을 드러낸다. 그 어느 때보다 숭고한 진정성이 담겨 있는 상황 속에서 우리의 말 한마디는 관계를 개선시키는 데 더할 나위 없이 강하게 작용한다. 침실에서의 대화는 갈등을 차분히 어루만지며 우리를 감싸 안는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한 이견은 언제나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철학자는 섹스란 온전히 자기 자신만의 쾌락을 위한 나르키소스적 행위라고 언급한 바 있다. 실재 성관계란 없고 자신의 성욕을 채우기 위해 상대방을 이용할 뿐, 결국 상대를 통해 자기 자신의 쾌락과 관계를 맺게 될 뿐이며, 따라서 섹스는 둘 사이의 관계 맺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행위 자체를 육체적인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반론의 여지가 없다. 사실 이런 지적이 훨씬 더 흥미롭다. 성관계란 두 사람의 육체의 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상대방을 이용해 제 자신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이 우리에게 허무 이외에 무엇을 남기겠는가? 나는 저 위대한 철학자의 논리를 하나의 흥미로운 해석으로 두고, 정서적 차원으로까지 시야를 뻗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섹스는 육체적 쾌락과 동시에 우리의 심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정신적 테라피로서—우리가 한없이 외롭고 고독한 존재임을 알게 하고, 육체적 교감을 통해 둘 사이의 문제를 해소시킬 수 있는 하나의 통로이자, 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가장 완벽한 행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섹스는 단순히 인간의 성욕을 위한 쾌락의 행위나 종족 번식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섹스를 성적 본능이나 쾌락의 추구로 폄하하거나 미화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의미심장한 줄로만 알았던 쇼펜하우어의 “사랑은 없다.”라는 말은 오히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 될 뿐이다. 우리는 섹스에서 보다 의미 있는 가치를 끌어내야 하며 이를 통해 한 단계 더 나은 자신으로 발전하고, 더 신뢰할 수 있는 관계로 나아가고, 더욱 성숙한 사랑을 해야 할 것이다. 설혹 그 과정에서 견우와 직녀의 오작교가 무너진다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