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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띵꼽미Think of me Oct 02. 2022

사랑의 기원에 관하여 1

  사랑의 기원을 다루기에 앞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태도란 무엇인가? 나는 미리 꺼내놓은 생각—<왜 우리는 사랑하는가>—에서 일부 정신의학자와 심리상담가, 그리고 꽤 많은 설교자들이 사랑에 관한 문제를 다룰 때 지나치게 현대적인 사고방식, 예컨대 현대인의 뇌에서 관찰된 호르몬의 상호작용이나, 1-2세기 전에 분석된 내용들을 수집하여 마치 그것을 진리처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들은 그러한 정보들을 가지고 ‘보편적인 인간’에 관해서는 어딘가 통달이라도 한 것처럼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지만, 인간 ‘그 자체’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들은 ‘인류의 기원’이나 인간 ‘종(種)의 심리’를 말해주는 대가들의 생각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일까?


  니체는 그 이유를 저 위대한 저서들이 아무런 과장 ‘없이’ 쓰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저 은밀하지만 소름 끼치는 고발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인간이라는 동물의 뜻 모를 본성의 기원은, 우리가 대충 알고 있는 5천 년의 역사보다 아득히 먼 옛날에 등장했던 몇몇 유인원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가 기록된 시점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인간이 그렇게 많이 변한 것 같지는 않다. 역사상 최초의 문서가 세금 기록에 관한 문서였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저 소크라테스의 말이 오늘날까지 다분하게 인용되고 있는 사실만 보더라도—삶의 환경은 바뀌었을지언정 인간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대번에 알 수 있다.


  그런데 아마 독자들은 내가 여기서 다루게 될 모든 문제들이—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주된 주제, 즉 ‘사랑’과 관련해서 아무런 개연성을 찾지 못하겠다고 판단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와 반대로 이러한 작업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만 비로소 사랑에 대한 가치와 비전을 재발견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만큼, 다양한 관점에서 가치를 분석하고 재확인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독자들이 상상력과 공감력을 가능한 한 최대로 발휘해주길 간절하게 바랄 뿐이다! 어쨌든 우리가 이처럼 흥미로운 주제를 진지하게 다루어 보기 위해서는 굳이 현대적인 관념에 편승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최초의 사랑—굳이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하자면—행위는 고대 수렵채집 시대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국가도, 사회도, 법률도, 과학도, 종교도, 문자도, 그 어떤 목표나 신념도, 존재에 대한 의문도 없었던 시절—원시 인류에게 있었던 유일한 것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막연한 ‘충동’이었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이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것 같지만 말이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그의 이론은 받아들이고 싶은 유혹이 크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의 유전자 이론에 대해 그 어떤 긍정이나 부정도 하지 않겠다. 요컨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이 몸과 정신이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인간이 DNA를 후세에 전달해야 하는 생존 기계이든 아니든—유전자 하나하나, 세포 하나하나 조차 의식할 수 ‘없는’ 나로서는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별 볼일 없는 동물에게 그런 충동이 어떻게 부여되었는가를 따져보는 것은 여기에서 중요하지 않다. 무엇보다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할 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어떤 충동을 느꼈다는 것이고, 그 충동에 이끌려 움직였다는 것이며, 그것이 인간의 다른 복잡한 감정들로 뻗어 나갔다는 것이다.


  원시 인류가 느꼈던 충동은 무언가에 의해 강제로 억압당하거나 스스로 절제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누구도 그처럼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행위를 불편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마치 문명화된 인간이 다른 동물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같은 종(種)의 동물이 다른 성을 가진 동물에게 다가가는 이유와 똑같은 것이었다. 즉 교미와 번식,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원시 인류가 번식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교미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의 우리가 아이를 낳기 위해 성관계를 즐기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조상들 역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짝짓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충동하는 바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교미의 목적이었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즉 원시 인류에게는 본능 자체가 ‘의지’이자 ‘목적’이었던 것이다. 태초의 본능은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것, 즉 자유분방함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누구든지 예외 없이 표출할 수 있었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들의 먹고 싶은 본능은 그들로 하여금 먹을 것을 찾아 움직이게 하였고, 쉬고 싶은 본능은 보금자리를 찾게 하였으며, 하고 싶은 본능은 의도치 않게 종의 번식을 야기시켰다.


  내게는 인간의 근면함과 책임감이 이 같은 ‘단순한 충동’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인정받는 덕목들은 대체로 초기 인류의 생활방식에 그 기원을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우리가 그토록 부끄러워하고 억눌러야 하고 야만적으로 바라보기만 했던 인간의 본능에서……—? 현명하고 바람직한 사람이 위대한 스승 밑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여러 가지 소양을 쌓는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생각은 교육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편견에서, 그냥 그저 그런 줄로만 알았던 언어의 억측에서 비롯된 생각이 아니었을까—자본주의는 현대인의 그러한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지만 말이다—? 여기에서는 그저 암시만 하는 정도에 그치겠지만, 이 추론의 근거에 대해서는 나무에서 열매가 열리듯이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무르익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본능, 그토록 자유분방했던 원시 인류의 의지는 어떤 이유에서 억눌려야만 했던 것인가? 자유의 상징과도 같았던 그 능동적인 충동은 어째서 무언가에 의해 억압 ‘당하고’ 자의적으로 ‘참아야 하는’ 것이 되어 버렸단 말인가? 왜 현대인의 의식 속에는 저 태초의 것들이 미성숙하고 천박한 것으로 아로새겨졌단 말인가? 도대체 언제부터 행복이 우리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었고 삶이 끔찍한 것이 되었으며, 그러면서도 삶에 대해 집요한 애착을 갖게 되었단 말인가? 혹시 우리가 모르고 지나쳤던 인류의 과거사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이 시대의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그럴듯한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


  거듭 강조하거니와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사랑에의 충동—베풀고자 하는 충동, 망설임에 대한 충동, 기다림에 대한 충동, 부정에 대한 충동, 의심에 대한 충동, 죽음에 대한 충동, ……—, 그 기원을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물음들을 던지고 거기에서 답을 찾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랑을 신격화했던 이유, 중세 종교인들이 기독교적 사랑을 만들어내야 했던 이유, 중세 음유시인들이 낭만적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 낸 이유, 숱한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무의식적인 충동을 언어와 이미지, 음악의 형태로 붙잡아 두기 위해 노력했던 이유, 최종적으로 우리가 누군가의 사랑을 그토록 갈망하는 이유를 진심으로 헤아려보고자 한다면,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는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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