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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띵꼽미Think of me Oct 10. 2022

사랑의 기원에 관하여 2

  아무런 과장 없이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 믿고 싶은 진실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마주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상태를 항구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이것이 우리 ‘인식하는’ 동물에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역사를 거쳐간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이와 같은 문제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했다는 사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종종 그들의 작품과 모순된다는 사실은 독자들로 하여금 당혹스러움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작품은 언제나 독립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철학자들의 말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세계가 아닐까? 이러한 모순이야말로 날것의 세계이자, 자연이 인류에게 부과한 시시포스의 형벌이 아닐까? ……


  똑같은 충동을 가지고 있는 동물들이 무리를 지어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낙관적인 사람에게는 협동과 의리, 희생을 의미할 수도 있다. 비관적인 사람에게는 불평등과 갈등, 폭력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둘 중 어느 하나라기보다는 그 모든 것을 의미한다.


  충동적인 개체들의 만남, 말하자면 생존하고자 하는 자유 의지들의 만남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졌다. 먹을 것이 필요했던 이 힘없고 애처로운 동물은 다른 유약한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무리 지어 다니기를 선호했다. 냉혹한 야생의 생태계에서 홀로 먹을 것을 찾아 떠도는 것보다 서로 ‘합의’하고 힘을 모으는 것이 육체적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방법이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한 합의란 말인가? 먹이 사슬의 정점에 도달하기 위한 합의였을까? 만물의 영장이 되어 보자는 합의였을까? 수십만 년 후 경제를 발전시키고, 우주를 탐사하고, 인류의 번영을 도모하자는 합의였을까? …… 누구나 생각해 볼 수 있듯이 그것은 단지 살아 남기 위한 목적의 일치, 그 외에 다른 뜻은 아니었다.


  원시 인류의 사냥하는 모습과 채집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들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고 단순하게 움직였는지를 그려볼 수 있다면—우리는 장구한 역사의 배후에 가려진 또 다른 인간의 속성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뒤를 맡길 줄 아는 용기를, 위협 요소를 재빠르게 알릴 의무감과 그에 대한 책임감을, 자신이 맡은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심리적 안정감과 분업의 효율성에 대한 깨달음을 말이다. 이토록 놀라운 열매, 저 미개하고 우둔한 동물에게 이토록 경이로운 열매가 맺힐 것이라고는 당사자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이것은 ‘믿음’에 관한 하나의 추론이다. 믿음의 발생은 여기서 살펴본 것처럼, 살아남기 위해 남을 믿어야 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낯선 신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믿음 때문에 인류의 충동은 가장 먼저 자기 자신으로부터 ‘관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억압을 받는다거나 갑갑함에 시달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관리된 충동은 반드시 보상의 형태로 반환되었기 때문이다. 함께 고생하여 얻은 먹을거리는—그것이 썩은 고기라 하더라도—그들로 하여금 오히려 더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오직 충동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 왔던 저 능동적인 동물은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생존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기질을 갖추게 된다. 이와 같은 생존의 노하우는 자연선택의 원리에 따라 인간의 속성으로 낙착되었고, 인류에게 있어서 공동체 생활은 삶의 시작과 끝을 관장하는 가장 일반적인 생활양식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양식이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에게 전혀 다른 방식의 생존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바깥에서의 생존이 아닌 무리 안에서의 생존, 공동체 안에서의 생존, 다수의 안식처에서의 생존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합의라는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믿음으로부터 인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누구도 그 형성 과정을 눈치챌 수 없었던 인류 최초의 ‘모순’을 창조하였다. 공동체의 규모가 커질수록 합의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다른 뜻으로 변질되는데, 살아 남기 위해 서로의 뒤를 봐주는 의미에서 탈피하여 ‘가치’를 견주어 보는—보다 다듬어진 ‘거래의 형식’으로 새롭게 나타났다. 인류는 마침내 가치를 부여할 줄 아는 존재로 거듭난 것이다!


  이것은 우리 현대인들에게 쉽게 접근되지 못한 인간 기질의 오래된 역사이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증명된 가설은 아니다. 고고학과 정신분석학, 인류학과 역사학, 그리고 문헌학적 기록들을 살펴보고 재구성하여 세운 하나의 정직한 가설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베일에 둘러 쌓여 있는 원시 인류의 삶은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였다 하더라도 그 실상을 들여다보기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수십만 년에서 수백만 년에 이르는 원시 인류의 삶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가설은 보다 그럴듯한 가설로 대체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원시 인류가 남긴 흔적들을 모아 그들의 삶과 심리를 재구성해 보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가설을 세울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철두철미한 증명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백의 역사를 찾아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를 들어 아직까지 많은 교육자들이 인류가 불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선사시대의 가장 혁명적인 사건으로 다루고 있으며, 원시 인류의 변화 과정을 설명하는 대표 모델이자 대중적인 상식으로서 우리에게 설명한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러한 견해에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우리가 실로 놀라워해야 하는 것은 원시 인류가 그저 불을 사용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불에 가치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불은 자연 현상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의 터전을 모조리 태워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민감한 감각을 가진 원시 인류가 불에 대해 느꼈을 공포를 조금만 상상해본다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원시 인류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불을 사용했고, 음식을 익혀 먹으면서 영양분을 섭취했으며, 따라서 진화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은 고작 현대적인 관점에서 그들의 삶을 높게 평가하는 일에 불과하다. 애초에 저 미개인들은 그 뜨거운 자연물이 자신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우리는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면, 말하자면 그들의 심리, 즉 그들이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터득했다는 사실을 줄곧 간과했다. 우리는 그저 원시 인류가 우연한 계기로 불을 ‘발견’했고 따라서 불을 ‘사용’했던 것으로 이해해 왔지, 저 사이에 가치 판단에 대한 인식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외면했던 것이다! 이처럼 낡아빠지고 직선적인 교육 체계는 우리로 하여금 사고 자체를 녹슬게 하고, 그리하여 우리가 새롭게 던져 보아야 할 모든 의문들을 그릇되게 만든다. 즉 아무 쓸모가 없다.


  불에 대한 위험성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원시 인류가 불을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는지는 알 수 없다. 여기서 그런 시간적 거리감까지 세세하게 따질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인류가 스스로 사리를 ‘분별’하였고 그에 따라 ‘판단’하기 시작했다는 것, 즉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치의 발견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서로의 뒤를 봐주기 위한 단순한 ‘합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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