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우리는 이 사유가 적어도 황량한 사막의 한가운데로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사막의 끝에서 발견하게 될 양식이 인간의 삶을 보다 직접적으로 이해하는데 필요한 구실을 제공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잘 익은 열매를 맛보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과 다양한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모든 노력에 정직한 공들임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행해지는 나의 노력은 삶을 이해하고 사랑을 재발견하기 위한 노력이다. 따라서 나는 기존에 사랑을 다루었던 위대한 저자들의 모든 시도—사랑을 시대적 관념으로 설명하려는 시도, 남녀 당사자들의 문제만으로 바라보려는 시도, 두 사람의 서사와 문제점을 분석하고 궁극의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시도, 생물학적 증명으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시도 등—를 보류하고자 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을 어떤 심리적 체계라거나,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이며 다루기 어려운 감정이라거나, 혹은 나르시시즘과 에로티시즘으로 설명하려는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 그것과 관련이 있는 모든 측면에서 ‘인간’과 인간의 ‘삶 자체’를 먼저 살펴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사랑을 하는 주체이자 인간으로서—진실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가치를 판단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땅에서 ‘만들어진’ 모든 것—언어, 문자, 정부, 국가, 종교, 법률, 전쟁, 평화, 질서, 계급, 선, 악, 죄, 형벌, 도덕, 양심, 화폐, 학문, 진리, 이데올로기, 존엄성, 정체성, 자아, 사랑, ……—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 다루었듯이 인류의 생존 구조가 변질된 이후로, 그러니까 공동체의 삶이 저 미개한 야만인의 개인적이고 원초적인 삶 전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이후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인간(공동체의 구성원)’이 된 동물은, 가치 판단의 필요에 따라 모든 생물과 사물에 개념을 부여하고, 이름을 달아 두었으며,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마침내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칭송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인간이라는 동물의 본질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 생물학적 동물의 본래적인 의지, 그 정제되지 않은 충동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아, 그것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계약에 의해, 마술과도 같은 길들여짐에 의해 심연 속으로 가라앉게 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계약을, 이해를 부정하는 계약을,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계약을, 받아들이고 따라야 하는 계약을—우리 인간은 약속해야 했던 것이다. ‘부조리의 희생양’이자 ‘모순의 어린양’이 되기 위한 계약을.
모든 계약은 무르익게 되면 관습으로 낙착된다—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그리고 일단 관습이 만들어지면 최초로 계약을 만든 사람, 즉 지배자는 피계약자—공동체의 구성원—를 말하자면 ‘점유’한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계약 중 가장 강조되는 조건은 최초의 본질을, 그 동물적인 충동과 자율성을 감추어야 한다는 데 있다. 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구성원은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 되거나, 바로 잡아야 하는 오류로 취급되었다. 자신의 충동을 드러내는 구성원은 계약을 위반한 반역자로, 길들이는 자, 즉 지배자를 기만하고 위협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길들여지지 않는 자에게 온갖 폭력과 고문, 유배와 처형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사실 구성원들 간의 약속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공동체 내에서 언제나 예외적으로 특권을 행사하는 지배자의 의지이다. 그와 같은 일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서를 들여다보거나, 고대 신화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 신화 속에서 신들은 인간에게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지침을 제시한다. 그러나 인간은 필연적으로 그 규칙을 어기게 되는데, 그 모습에 분노한 신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간에게 끔찍한 벌을 내리는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신은 인간에게 말한다. “이 어리석은 자를 내가 벌하겠노라……” 죄는 언제나 인간의 몫이며 심판은 늘 신의 몫이다. 그런데 뻔뻔스럽게도 저 파렴치한 신들은 자기 자신에게는 결코 규칙 따위를 걸어 두지 않는 것이다!
저 그리스의 신화 하나하나는 단순히 신들의 변덕과 인간의 오만함을 보여주고 거기에서 교훈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고백에 가깝다. 신(지배자)의 진짜 얼굴과 인간(공동체의 구성원)이 지켜야 하는 질서와 규칙, 그리고 그것이 더욱 발전된 형태인 ‘법’이라는 것으로 하여금 권력을 가진 자가 어떻게 구성원들을 길들이고, 어떻게 그들을 우롱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문화적 고백이자, 은밀한 고발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도 자신이 길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본래 얼마나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존재였는지 알아차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모든 사실은 출처를 알 수 없는 규칙과 관행에 의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삶의 가능성이 무한의 영역에서 유한의 영역으로 바뀌었다는 사실, 생존의 분별력이 풍요의 땅에서 척박의 땅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 삶의 의지가 본래적인 충동을 벗어나 보다 다듬어지고 가공되어 길들여지고 있다는 사실, 모든 동물적인 충동이 이 땅에서의 계약으로 하여금 생각과 판단에 의해 망설여지고 표출되어서는 안 되는 무엇으로 억제되었다는 사실, 그리하여 동물적인 능동성이 인간적인 수동성으로 대체되었다는 사실……. 고로 내가 판단하건대 이러한 계약 관계야말로, 이러한 종속의 관계야말로—‘슬기로운 사람(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이다.
아,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빛을 가리고 쑥과 달래를 먹으며 견뎌야 한다는 저 단군 신화의 명령에서는 압제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그것은 지배자의 목소리인 것이다. 이 우둔한 동물에게는 ‘신’의 가르침과 다스림이 필요하다는 우악스러운 지배자의 목소리인 것이다! 새로 태어난 모든 어린아이—그 최초의 본질적인 존재에게, 태곳적의 충동과 생동감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저 순진 무결한 존재에게 오늘날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되고 지속되어 온 삶의 요령, 즉 무리 안에서의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관습’을 요구한다(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자유’라는 말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관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희생’이다. 태초의 명랑함을 부끄러움으로, 능동성을 수동성으로, 다양성을 통일성으로, 충동을 인내로, 감정적 동요를 이성적 성숙함으로—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자기 스스로 그러한 삶에 정당성을 부여도록 하는 보다 우아한 ‘자기희생’인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얻기 위한 희생이란 말인가? 그 대가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무리 안에 속해 있다는 통일의 느낌, 즉 소속감이다. 그것은 하나의 정신적인 안식이다. 생존을 위태롭게 하는 소외・독립・분리・고독으로부터 벗어나—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사회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생존’을 지속할 수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공동체가 우리를 무리 밖으로 내던지지 않겠다는 약속이고, 우리에게 공동체의 관습을 지속할 용의가 있다면, 언제까지나 자연 생태계의 위협으로부터 보살펴 주겠다는 약속이다. 그런데 그 약속이 잘 지켜졌던가—여기에 대해서는 곧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간략하게나마 고통의 가치가 인간 자신으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전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든 충동을 밖으로 표출시켰던 이 야만적인 동물은 공동체가 만들어 낸 질서와 규칙에 가로막혀 결국 모든 충동을 자기 안으로 되돌릴 수 있게 되었다. 고통 자체가 육체를 벗어나, 하나의 정신적 영역으로 이동한다. 육체가 감당할 수 있는 물리적 피로와 결점, 장애는 흔히 무리 안에서 소외되고 도태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정서적 불안을 야기시킨다. 우리는 더 이상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일찍이 지상을 정신병원으로 묘사했던 니체의 표현보다 적절한 묘사는 아마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