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의도하는 바를 기다리고 있는 세계의 비합리와 모순이 우리에게 정신적 피해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것, 나아가 삶 자체에 대한 의문과 공허함을 가져올 충분한 근거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과 세계를 개별적으로 인식하게 된 인간 스스로가 세계를 낯선 곳으로, 현실을 지옥으로, 사회를 아수라장으로, 존재를 무(無)로 생각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한다는 것—우리가 반드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것이다.
국가, 혹은 신에 대한 ‘믿음’이라는 미명 아래에서 산다는 것, 저 권력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 낸 규칙, 말하자면 해서는 안 될 반(反)자연적인 조항들을 약속하고 산다는 것은 좋은 삶인가? 그런데 역사는 피를 토해내며 답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좋은 삶이 아니었다고, 저들은 단지 자기들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구성원들의 충동을 억압하고 그런 상태가 유지될 수 있도록 오직 자신들을 위한 체계를 세우고, 공동체를 위한답시고 기존의 법률을 자기들의 입맛에 맞춰 교묘하게 수정하는 욕심쟁이들로 가득 차있다고,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을 좋은 것으로 간주하고 자기 자신에게 높은 가치를 부여하여 스스로를 우상화하는 저들과 우리는 사실 전혀 다를 것이 없다고, 우리가 옳고 그르다고 판단한 모든 것들은 저들이 시작한 몇몇 규칙들에 의해 생겨난 것이었다고, 그리하여 고통을 외부에서 내부로 전가시킨 가해자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었다고, 정의란 시작부터 이기적인 냄새, 독재의 냄새를 가득 품고 있었다고……
기존의 체제는 반자연적인 상태를 다시 자연적인 상태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붕괴한다. 그리고 자연적인 상태는 다시금 반자연적인 상태로 되돌아감으로써 기존의 체제를 밟고 올라선다. 그것은 믿었던 것에 대한 회의감이자, 더 이상의 불신이며, 진실에 대한 원한과 증오의 감정을 행동으로 옮긴 결과이다. 역사는 그러한 원상복귀의 반복이다. 국가에 대한 믿음이든, 종교에 대한 믿음이든, 이념에 대한 믿음이든 간에 이미 깨져버린 믿음은 언제나 새로운 믿음으로 대체된다.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을 관통하던 기존의 가치들은 필연적으로 탈피하여 새로운 가치(가령 계몽주의에서 낭만주의로, 전제국가에서 민주국가로 전환되는 것처럼)로 재해석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인류의 심리와 인간의 삶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공통된 풍습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문명이 발전하고 삶의 환경이 보다 유용하게 변화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공동체의 ‘지배 구조’는 항구적으로 유지되어 왔다는 것, 다시 말해 다수의 인류가 언제나 소수의 인류를 위해 희생되어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면 이것은 진리가 될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에게 사회적 지위의 구조적 관습은 시대에 뒤떨어진 악습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이 인간이라는 동물은 지배를 하거나 지배를 당하고자 하는 피라미드식 구조에서 단 한순간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역사는 소극적으로, 예술은 상징적으로 그것을 증명한다. 이 땅에서 양산되는 수많은 비합리와 오류들이 우리의 삶과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대를 지배하는 ‘진실’은 우리가 믿는 ‘민주주의적 상식’으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져 있으며, 따라서 양자가 추구하는 목적 자체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생의 부조리와 세계의 모순, 사는 것에 대한 정신적 고통을 이해하는데 이보다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명제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계에서 추구하는 ‘자유로운 삶’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우리는 자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러한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가 결과에 도달한다고 해도 눈앞에 보이는 것은 절망과 허무일 뿐, 그 어떤 희망이나 흥미도 성취하지 못한다. 자유에 대한 문제를 고민한다는 것은 사실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길들여진 동물에게 자유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며,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작업은 마치 새장에서 해방된 새가 자연 상태로 돌아가서는 새장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다시 새장으로 되돌아오는 격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다시 그런 식으로 살기에는 아예 글러 먹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루소가 언급했던 말—“우리는 자유를 얻어낼 수 있을 뿐, 결코 그것을 되찾을 수 없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사상가들 또한 자유에 대해 고민하고 정의하려고 시도했지만, 어떤 만족스러운 결과를 도출해내지는 못했다. 그들 역시 사유의 끝에 도달하자,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의식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기대했던 것들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으며, 발견하는 것은 자신의 무력함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유를 갈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자유를 원하는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유가 맞는가? 아니, 사실 우리는 자유 같은 것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지 누군가로부터, 혹은 무언가로부터 떠밀려 살게 된 이 삶에서 벗어나는 것일지 모른다. 더 이상 과거와 미래에 붙잡혀 고통받고 있는 자의식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자유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으니 생각을 관통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일지 모른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와해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반대로 더욱 견고하고, 깊숙하게 숨어 있는 저 관습의 지배 아래에서 지속되어 온 존재, 스스로 자연의 법칙에 징역을 선고함으로써 권태에 빠진 이 인간이라는 존재에게는 그러한 것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 세계를 벗어나 무언가에 취할 것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이 밤이든, 술이든, 음악이든, 그 밖의 무엇이든.
저 자학에의 의지와 모든 부조리의 타성이 오늘날 우리의 눈앞에서 ‘삶은 고통이다.’라는 음울한 명제로 나타나고 있다. 마치 운명처럼, 그리고 진리처럼. 그런데 우리에게 이 운명을 인정할 의지가 남아 있는가? 이 운명을 사랑할 용기가 남아 있는가? 아무래도 이 인간이라는 동물보다 가련한 동물은 없는 것 같다. 죄가 아니라 삶을 심판대에 올렸으니.
자기 자신의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