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ER 20140416
지독한 입덧을 견디던 어느 날 아침, 어쩐지 개운하게 잠에서 깨어났다.
드디어 입덧이 끝인가?
그런데 이렇게 하루아침에 뚝 끊긴다고?
역시. 그럴 리가 없었다. 혹시나 해서 찾아간 병원에서 나는 더 이상 심장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그날로 바로 수술대 위에 오르며 임신을 ‘종료’하게 됐다.
12주.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이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의사는 위로했지만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이따금씩 배를 어루만지며 멍 때리다 보면 힘없이 눈물만 흘렀다.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특별히 슬퍼하거나 힘들어하진 않았다. 그저 무기력하고 멍하게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으며 기계처럼 일하는 기분이었을 뿐. 사람들과 먹고 이야기할 땐 그럭저럭 즐거웠지만,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나 남편 없이 혼자 시간을 보낼 때면 세상이 멈춘 듯이 몸을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다. 누워서 눈물만 흘렸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해서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뉴스속보가 떴다. 제주도로 향하던 배가 사고 났고 그 배에는 고등학생 아이들이 타고 있으며 현재 구조하고 있다는 뉴스였다. ‘큰일이네, 그래도 금방 구조되겠지?’라고 생각하며 나는 급한 일부터 처리하며 업무를 시작했다.
점심때였나, 밥 먹다 식당에 켜놓은 TV를 통해 아이들이 모두 구조되었다는 뉴스를 확인했다. “다행이네. 시간 지나면 애들한테 엄청 큰 추억이 되겠는걸. 나도 어렸을 때 반 친구들이랑 산에 갔다가 길 잃어서 헬기 뜬 적이 있었거든…” 하면서 커피까지 야무지게 마시며 오후 근무를 이어갔다. 유난히 바빴고 회의가 많은 날이어서 숨도 안 쉬고 일했던 기억이 난다.
퇴근길. 남편과 만나서 오랜만에 즐겁고 맛있게 외식을 했고 그날따라 엄청 수다를 떨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 점심에 뭘 먹었는지, 주말에 뭘 할지, 올해는 어디로 휴가를 가면 좋을지 등 남편도 나도 오랜만에 찐으로 기분 좋게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 근데 아까 보니깐 사고 난 거 같던데 애들 다 구조됐나? 하루 종일 바빠서 확인도 못했네.
웅. 아까 전원 구조됐다고 속보 뜨던데.
그래?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
그리고는 남편이 핸드폰 몇 번 터치해서 확인하더니 한숨을 크게 쉬며 이렇게 말했다.
자기야, 뉴스 보지 마. 알겠지? 오늘은 보지 말자.
뉴스를 보지 말라고? 뭐야 이 불길함… 틀리길 바랬던 내 예감은 결국 맞았고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나는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나는 고작 12주였다. 그런데도 아이를 잃으면 이렇게 아픈데, 18년 가까이 키워온 아이를 갑자기 잃으면 도대체 그 슬픔은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 것일까. 세상을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회사에서는 별 다를 것 없이 지냈지만, 집에서 뉴스를 접할 때마다 정말 많이 울었다. 그 아이들의 죽음이 나의 유산과 오버랩되면서 애써 태연하게 넘기고 싶었던 슬픔이 수면 위로 올라와 터져 버렸다. 어떤 날은 참지 못해 목놓아 울고 또 어떤 날은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보내고는 밤에 자다 일어나서 멍하니 앉아 울기도 했다.
8년이 지났지만 4월 16일이 되면 여전히 나는 슬프다. 그때 많이 아파했던 내 마음이 기억난다. 그리고 언제 다시 내 아이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이제는 두려움까지 느낀다. 난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닌데, 세월호 사건이 터진 4월 16일 하루는 아침부터 밤까지 모두 다 기억이 난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잊지 않는 것뿐이라, 내 손목엔 여전히 노란 팔찌가 자리하고 있다. 고무줄이 늘어나면 미리 사둔 새 걸로 교체하며 8년을 내 몸 같이 함께한 팔찌를 보며 오늘도 마음으로 빌어본다.
사건의 전말이 한 치의 의심 없이 다 밝혀지고, 오직 너희가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난 것을 애도하는 데 온 마음을 다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