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비장의 카드
아이가 영어학원 숙제를 하다가 갑자기 울면서 뛰어왔다.
(흑흑) 너무 많아요. 원래 (페이지 수가) 하나, 두울, 세엣, 네엣 이랬는데 (흑흑) 오늘은 하나, 두울, 세엣… 열하나야. (흑흑) 다른 날엔 빨리 끝났는데 (흑흑) 오늘은 자꾸 안 끝나요. (흑흑) 아직도 2번이나 더 읽어야 해. (흐아앙) 너무 많아…(흑흑) 나 쉬고 싶어요. (흐으앙앙앙~~~) 눈 아파아~~~~
눈이 벌게져서 우는 아이가 처음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서 한참 듣다가, 내용을 파악한 다음부터는 갑자기 나도 아이의 마음에 훅 감정이입이 되었다.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전에 나도 모르게 아이와 한 편이 되어 욱한 마음을 쏟아냈다.
아니, 누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숙제를 내주신 거야~~ 갑자기 이렇게 양을 늘리면 어떻게 하라고. 너무하네 정말. 이게 초등학교 1학년이 할 수 있는 거 맞는 거야?? 이렇게 많은데?? 말도 안 돼. 짱짱이 말대로 엄마가 해도 오래 걸릴 만큼 엄청난 숙제네. 어우. 무리했네 우리 짱짱이. 푹 쉬어~ 푹 쉬어~ 눈 아플 땐 공부하는 거 아냐!! 얼른 눈 감아~ 엄마가 눈 따뜻하게 해 줄게~~ 일단 충분히 쉬자 우리~~
내가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동안, 아이는 약간 놀란 눈치였다. 엄마는 늘 차분하게 왜 해야만 하는지, 끝까지 한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알려주는 스타일인데, 예상에 벗어난 리액션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좋기도 했던 것 같다. 눈물은 어느새 쏙 들어갔고 내가 흥분하는 동안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잠깐 눈감고 안겨서 쉬더니 이렇게 물었다.
엄마가 보기에도 이거(숙제를 끝낸다는 게) 진짜 어려운 일이에요? 아무나 못해요?
이번엔 기회다 싶어서, 전략적으로(?) 얼른 대답해줬다.
당연하지. 누가 이렇게 많은 숙제를 할 수 있겠어. 이건 도저히 한 번에 할 수 없는 양이야. 엄마 정말 너무 깜짝 놀랐는걸.
(잠시 호흡을 쉬었다가 목소리를 약간 깔고 진지하게)
그런데 말이야... 숙제 양이 이렇게 많아진 걸 보니, 우리 짱짱이가 영어 실력이 많이 늘었나 보다.. 원래, 조금 잘하면 숙제도 조금이고, 많이 잘하면 숙제도 많은 법이거든. 근데 선생님이 이렇게 많은 숙제를 내 주신 거면.... (생각하는 척하다가) 짱짱이 영어가 정말 최고인가 봐.. (혼잣말하듯이) 보통.. 이 정도까지 하진 않는데, 이상하네..
아이의 목소리 톤이 올라간다.
정말 내가 잘해서 숙제도 많은 거예요? 그럼 나 많이 잘하는 건가? 숙제가 엄청 많은데?
그건가 봐! 엄청 잘하나 봐. 그러니깐 이렇게 많지. 엄마도 이렇게 잘하는 줄 몰랐는데, 대단하다 우리 짱짱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을 조심스럽게 얹는다.
이렇게 숙제가 많잖아? 그럼 여기서 친구들이 두 갈래로 나뉘게 돼. 숙제가 너무 많아서 포기하는 친구랑 잠깐 쉬더라도 끝까지 하는 친구. 포기하면 여기서 멈추는 거고, 힘들어도 끝까지 계속하면 아마... 영어를 좀 더 잘하게 되겠지?
아이는 내 눈을 말없이 바라본다. 나도 말없이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준다.
자, 이제부터는 엄마가 엄마 내면과의 싸움을 해야 하는 시간이란 걸 안다. 아이가 스스로 털고 일어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아이가 먼저 "이제 쉬었으니 다시 해볼게요" 하는 순간까지. 엄마는 허벅지를 찔러가며 "이제 다 쉬었으니, 다시 한번 해볼까?"라는 말을 삼킬 수 있어야 한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흐르고. 하지만 엄마의 시간은 마치 10시간은 흐른 것 같이 더디게 느껴진다. 이제 곧 목욕하고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시간이기에 빨리 숙제를 끝내버렸으면 좋겠건만.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아이 스스로 움직일 때까지 참아야 한다.
이렇게 내가 기다려줘야 하는 시간이 올 때면, 나는 일부러 다른 일을 막 찾아서 한다. 무언가 정리를 하거나, 갑자기 책을 읽거나, 미뤘던 집안일을 꺼내거나... 기다린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바삐 몸을 움직이는 편이다.
그렇게 한 30분쯤 흘렀을 때였나. 누워서 천장보고 뒹굴던 아이가 몸을 일으키더니,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한다. 마치 엄마가 꼭 들어줬으면 하는 목소리로.
아, 이제 쉬었으니~ 어디 한번 다시 해볼까아~?
아!!! 됐다!! 됐어!! 하지만 너무 기뻐하는 티를 내면 안 된다. 기분 좋은, 편안한 텐션을 유지하며 이제 마지막으로 아이를 칭송(?)하며 상황을 종료하면 미션 완료.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을 날리며) 정~말? 우리 짱짱이 다시 도전하는 거야? 세상에... 너, 너무 멋있다. 엄마가 반했어.
아이가 다시 영어책을 소리 내어 읽는다. 어쩐지 아까보다 책 읽는 소리가 맑다. 꽤 많은 분량의 책을 소리 내어 읽느라 목이 아플 텐데, 자발적으로 선택한 길이기에 기꺼이 참고 견딘다. 힘들어도 툭툭 털고 일어나 자기 할 일을 마무리하는 작은 인간. 조금 전 내가 아이에게 말한 것은 빈 말이 아니었다.
난 오늘, 정말로 아이에게 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