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계획 없는 신년 맞이

방향은 있지만 목적지는 없습니다

by 그레이스

영국의 직장인에게는 매년 25일의 휴가가 주어진다. 보통 나는 공휴일이 있을 때 앞뒤로 연차를 내어 짬짬이 쉬고, 남은 휴가는 연말에 몽땅 몰아서 쓰는 편.


크리스마스에 신년 휴일까지 더해지면 통으로 2-3주 정도를 쉬는 셈이다. 12월 중순이 지나면 다들 휴가를 가기 때문에 진행되던 일이 멈춘다.


나는 그보다 조금 빨리 자리를 비우기에 딱 첫 주만 신경쓰면 나머지는 마음 편히 휴가를 만끽할 수 있다! 이 때를 틈타 한달 살기를 하거나 긴 여행을 가곤 한다.


작년엔 샌프란-라스베가스-LA를 여행 했고, 23년과 21년에는 케이프타운에서 한 달 살기를 했다. (22년은 영국에서 조용히 보냈다.) 어쩌다보니 올해도 캘리포니아에서 연말을 보내게 되었다.

행사가 있었던 라스베가스 숙소에서 본 스피어

지난 주 금요일, 라스베가스 행사가 끝난 후부터 연말까지 연차를 썼다. 사실상 주말부터 휴가에 돌입한 셈! 틈틈이 끝내지 못한 업무를 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마음만큼은 여유가 가득해서 좋다.


매년 휴가를 가서도 나는 늘 바빴다. 날이 밝을 땐 열심히 돌아다니며 놀고, 저녁에는 뭔가를 꼭 했다. 책 원고를 마무리 했고, 강의를 만들거나, 레터를 썼었다.


휴가의 마무리는 신년 계획을 세우는 것이었다. 만다라트에 영역별로 목표를 적고, 노션에 새해 계획을 꼼꼼히 적었다. 그리고 새해가 시작되면 매달 회고를 하며, 얼마나 계획을 이뤘는지를 점검했다.


그랬던 내가 처음으로 계획 없이 신년을 맞이한다.


2026년에 반드시 이루고 싶은 목표를 따로 정하지 않았다. 월별로 해야할 일을 빽빽하게 적지도 않았다.


올해는 나에게 정말 의미있고 특별한 한 해였다.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고, 이는 또다른 기회로 이어졌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일이 이렇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풀릴 줄이야. 누군가 작년의 연말 휴가를 보내는 나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을 귀띔해줬더라도 나는 믿지 못했을거다.

팜 스프링스에서 머물렀던 숙소의 수영장

이런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이 달라졌다.


지금껏 고수하고 지켜왔던 원칙과 사고방식, 내가 맞다고 생각했던 믿음들을 다시 생각해보는 아주 귀중한 계기가 되었다.


2025년의 배움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열심히 계획하고 실천하려한 노력이 부질없다는 건 아니다. 분명, 그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나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계획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조금 내려놓기로 했다. 뒤돌아보면 그 믿음이 스스로를 괴롭게 할 때가 많았다.


물론 새해에 이뤄졌으면 하는 희망사항은 있다. 하지만, 미래를 계획하는데 집착하기 보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히 하는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큰 방향은 생각하되, 정확한 목적지는 없는 것. 목표는 있지만 도달하는 방법까지 미리 정하려하진 않는 것.


매 순간,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기회가 오면 (잘 알아채고) 절대 놓치지 않기. 이 두가지가 내 2026년 계획의 전부다.

조슈아 트리 국립 공원에서 트랙킹 중

늘 누가 보지 않아도 성실히 살면 반드시 기회는 찾아온다. 그 기회를 알아보는 것도, (마침 준비가 되어있어서) 잡을 수 있는 것도 재량이자 능력이다.


그 기회는 내가 미처 예상치 못한 미지의 세계로의 문을 열어줄거다. 그러니 나는 그저 저항하지 않고, 그 변화의 흐름을 잘 따라서 흘러가면 된다.


사람도 상황도, 늘 변화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자.


고정된 생각과 경직된 태도를 경계하고, 유연한 마음으로 어떤 변화도 기꺼이 맞이하기로 한다. 그리고 처음엔 조금 부대끼더라도, 변화한 환경에서 배울 점을 악착같이 찾아내고 하나라도 더 배우기로 한다.


계획없는 2026년이

나는 설레고 기대된다.


P.S.

이 글을 쓰며 로버트 H. 프랭크의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라는 책이 떠올랐다. 여러모로내 가치관에 좋은 영향을 준 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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