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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천소년 Jul 12. 2024

한 번뿐인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하며 살고 있나

스토너, 존 윌리엄스


 나는 어릴 때부터 꿈이 없었다. 누군가 초등학교 때 장래희망을 물어 보면 고속도로 톨게이트 직원이라고 했다. 스스로도 내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거나 유명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 인생이 마냥 시시하게만 흘러갈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특별한 무언가가 내가 가는 길목에 놓여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한 번 정도는 우주의 모든 기운이 나를 향해 그럴듯한 성취를 보여주지 않을까 예상했다. 인간은 원래 자기 위주이고 자기 객관화를 하기가 쉽지 않기에 막연히 나는 잘 될 거라 믿었다.


 20대의 끝자락 때 1급 정교사 연수를 갔다. 연수에 참여한 남자 중에서 내가 제일 어렸다. 연수 과정 중 전라남도 진도에 간 적이 있었다. 진도로 떠나던 버스 안에서 연수에 참가한 교사들이 돌아가면서 마이크를 잡고 자기소개를 했다. 국어교사가 아니랄까봐 다들 어찌나 말씀을 잘하시던지. 형님들, 누님들의 굴곡 있고 파란만장한 자기소개를 들으며 나의 삶은 정말 평탄하고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났다. 여전히 내 인생은 단조롭고 평이하다. 특별한 열망이나 꿈 없이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에서 홈런이나 타점을 기록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대신 감독의 지시에 따라 희생번트를 대고, 단타에도 1루까지 전력 질주를 하며 근성 있게 인생이라는 프로 무대를 버티고 있다.


 직장에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쌓여가는 피로도와 회의감도 상당하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티나지 않게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 위에 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자신의 이익과 얄팍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개소리를 크게 떠들고 다니는 사람이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좋은 선생님이 되겠다는 젊은 시절의 포부와 달리 부조리한 판때기와 교권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해가 갈수록 무기력하게 변해갔다. 아동 학대로 신고 당할까봐 잘못된 방향으로 행동하는 제자를 바로잡겠다고 적극적으로 다가서지도 못한다. 불의 앞에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새로운 도전보다 기존에 해 왔던 방식을 지키려는 무력한 스승이 되어 버렸다. 직장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정치적인 행보를 보여야 하고, 그 시류에 편승하지 못할 경우 무기력한 삶을 보낼 가능성이 높다. 지금 나는 후자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 


 40대가 되니 큰 포부 없이 작은 행복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도 되는 건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생의 마지막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나의 지난 선택과 인생을 후회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확실한 것은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확신이었다. 마흔 살을 기점으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책을 읽으며 어떻게 살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고, 블로그에 그 과정의 흔적들을 글로 기록하고 있다. 최근에는 독서 친구의 추천으로 '스토너'라는 소설을 읽었다. 대학 교수인 '스토너'라는 평범한 사람의 일대기를 담고 있는 소설이었다. 이 책은 지난 과거의 결정들을 후회하고 다가올 미래를 불안해하고 있던 나에게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오늘은 평범한 이야기라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던 '스토너'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까 한다.



우연히 발을 들인 대학에서 스스로 삶의 방향을 결정하다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중략) 노장교수들에게 스토너의 이름은 그들을 기다리는 종말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고, 젊은 교수들에게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일깨워 주지 않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도 전혀 없는 단순한 이름에 불과하다. 

스토너, 8~9쪽


 소설은 주인공인 스토너의 삶을 한 페이지로 요약한 대목으로 시작한다. 미주리 대학에 입학한 스토너가 교수가 되어 평생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다가 특별한 업적이나 사건 없이 생을 마감했다는 내용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일대기를 무덤덤하게 소개한 이 부분을 완독 후 다시 읽기를 추천한다. 분명히 먹먹한 감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스토너의 평범한 인생을 세밀하게 묘사한 작가의 역량과 그의 삶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럼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스토너는 별다른 열망 없이 그저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농과대학 진학 권유로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물론 대학생이 되었다고 해서 스토너의 삶이 특별히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캠퍼스의 낭만 따위는 없었다. 그는 친척 집에 머무는 조건으로 그 집의 허드렛일을 맡아서 해야 했다. 대학 입학 전과 마찬가지로 그저 묵묵히 학교 공부와 가사 업무를 해냈다. 


 하지만 우연히 듣게 된 영문학 강의를 통해 스토너의 삶의 방향이 달라졌다.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이라는 지도 교수의 말을 듣고,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부모의 뜻을 거스른 것이다. 농과대학에 입학했던 그는 영문학 전공으로 전과를 한다. 원래대로라면 농과대학 공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의 농사일을 물려받는 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학교에 남아 계속 문학 공부를 하겠다고 결정했고, 부모님은 침묵으로 그의 결정을 묵묵히 지지해 주었다. 


 스토너는 진짜 어른이 되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에 따른 책임도 온전히 짊어져야 하는 어른 말이다. 자식이 자신들과 다른 삶을 살겠다고 선포하는 순간 부모는 낯선 타인처럼 변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부모라는 세계와 멀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실감을 통해 스토너는 부모의 사랑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되었다. 부모의 잣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설득하고 압박하지 않고 자식의 선택을 믿고 인정해 주는 것이 부모가 자식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태도임을 배울 수 있었다.


 스토너는 석사를 마치고 박사 과정에 들어갔고, 강의를 맡게 되었다.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면서 그는 알게 된다. 본인이 강단에 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아주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강의를 할 때 느꼈던 경이로움과 놀라움의 감정을 계속 이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스토너가 살았던 세상의 변화는 빨랐다.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개입하며 많은 젊은이들이 입대를 하게 된 것이다. 스토너는 전쟁 때문에 대학의 일들이 중단된 것에 매우 화가 났다. 한창 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기로 선택했는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잊으면 안 되네.'라는 교수의 조언을 들은 스토너는 입대 대신 대학에 남기로 한다.



결혼이 꼭 행복한 결말은 아니다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아 보겠다는 이유로 입대한 그의 절친 매스터스는 주검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었던 절친의 죽음은 스토너의 인생 내내 아련한 슬픔으로 남아있게 된다. 교수가 될 자질과 역량이 가장 뛰어났고 긍정적인 사고를 지녔던 젊은 매스터스의 죽음은 허망하고 부조리하다. 


 이 대목을 읽으며 20여 년 전이 떠올랐다. 나의 대학 동기 중에 가장 눈에 띄었고 재능이 특별했던 친구의 죽음이 생각났다. 당시 절친의 죽음을 피부로 느끼며 말도 되지 않고 상상도 못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삶이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슬프지만 원래 인생이란 것이 부조리한 것임을 인정해야 했다.


 머릿속에 학문과 강의로만 가득했던 스토너에게도 첫사랑이 찾아왔다.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이디스에게 첫눈에 반한 것이다. 우유부단한 면이 있던 스토너는 첫사랑 앞에서 상남자가 되었다. 불도저처럼 이디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녀에게 돌진했다. 여행을 온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들이댔고, 결국 청혼까지 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였임에도 은행장이었던 이디스 아버지로부터 쉽게 결혼 승낙을 받을 수 있었다. 결혼을 서두르는 이디스의 모습에서 뭔가 싸한 느낌을 받았다.


 성급하게 사랑에 빠진 만큼 막상 결혼을 앞두게 되자 스토너는 갑작스러운 불안감에 빠졌다. 역시나 그 불안함은 현실이 되었다. 신혼여행 때부터 최악이었다. 서로 성관계 경험이 없던 두 사람은 미숙하게 관계를 시도했고, 이디스는 첫 경험 이후 화장실로 달려가 토했다. 두 사람에게는 충분히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도 부족했고,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한 채 결혼을 서둘렀다. 이비스에게 결혼은 그저 지금의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한 달도 안 돼서 그는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1년도 안 돼서 결혼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렸다. 그는 침묵을 배웠으며, 자신의 사랑을 고집하지 않았다. 

스토너, 107쪽


 이 대목이 무척 슬펐다. 스토너는 자신의 결혼이 실패임을 깨닫는데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아내를 사랑했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불행한 남편이 되어 있었다. 스토너는 결핍이 많고 유별난 아내에게 다가가는 법을 몰랐다. 그저 가난하고 매력이 부족한 자신이 아내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해 자책하기 바빴다. 실제로 이디스는 결혼 때문에 자신이 버려야 했던 것들을 토로하며 울음을 터뜨리고는 했다. 스토너는 자신의 욕망은 감추고 철저히 이비스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으로 남편으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했다. 왕자와 공주는 결혼 후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는 말 그대로 동화 속 이야기였다. 스토너의 결혼은 누가 보더라도 명백히 실패였다. 



우리 삶의 빌런은 기본값이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유지했던 스토너에게도 한줄기 빛이 내려온다. 바로 아버지가 된 것이다. 어찌 된 일인지 이디스는 갑자기 우리도 자식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스토너에게 관계를 허락했다. 이디스와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된 스토너는 행복했다. 하지만 정말 임신만이 목적이었던 관계였다. 임신 직후부터 이디스는 스토너의 손이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을 거부했고, 얼굴을 마주 하는 것조차 거북해 하며 자기만의 동굴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레이스를 낳고 난 뒤에도 이디스는 끝없는 무기력에 빠져 하루 종일 이불 속에 있었다. 모든 집안 일과 육아는 스토너의 몫이었다. 딸인 그레이스는 생후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사랑으로 성장하게 된다. 직장 생활도 하면서 집안 일과 육아까지 모두 전담하라는 배우자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스토너는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감내했다. 새벽에 일어나 미리 수업 준비를 했고, 출근 전까지 그레이스에게 아침을 먹이고 아내와 딸이 먹을 점심까지 준비해 놓았다. 수업이 끝나면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와 집안 일과 육아를 했다. 


 그에게 사람들과의 관계나 취미 생활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박사 과정 이후 계획했던 두 번째 책 집필도 포기해야 했다. 내 주변에 스토너 같은 친구가 있다면 차라리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낫겠다며 당장 이혼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딸인 그레이스와의 시간이 스토너에게 큰 행복이었다는 것이다. 그레이스는 아빠를 잘 따랐다. 기발한 그림을 그려 아빠를 기쁘게 했고, 아빠의 서재에서 함께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었다. 스토너 역시 그럭저럭 딸과 함께할 수 있는 자신의 일상에 만족했다. 


 하지만 삶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스토너 인생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최고의 빌런들 때문이다. 아내인 이비스와 새로 교수로 부임한 로맥스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과 가정에서 보낸다. 두 곳 모두 빌런이 존재하는 스토너의 삶은 정말 고단하지 않았을까. 현대 사회에 스토너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이혼'과 '퇴사'라는 용기 있는 선택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스토너처럼 참고 살아간다.


 스토너와 그레이스의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이비스의 질투심도 커져갔다. 급기야 그녀는 아빠와 딸의 사이를 갈라놓기 시작했다. 그레이스에 집착하며 딸을 엄격하게 자신의 기준대로 관리했다. 자연스럽게 그레이스는 스토너와 멀어졌고, 자발성을 잃은 그녀는 정신적으로 병들어 갔다. 


 자신의 딸이 힘들어하는 상황에서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스토너가 답답했다. 작품 내내 스토너는 이비스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스토너 입장에서 이비스는 참고 감내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비스 입장에서도 아무런 감정적 동요 없이 묵묵히 상황을 견디기만 하는 스토너와 함께하는 삶이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다같이 더 불행해지는 길로 가족들을 끌고 들어갔다. 남편으로서 아내의 모진 행동을 참았더라도 아버지로서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나서야 했다.



왜 당신의 인생이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고 스토너가 늘 참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작품 속에서 스토너가 유일하게 화를 낸 대목이 있다. 그에게도 절대 물러설 수 없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찰스'라는 대학원생의 임용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스토너 입장에서 수업 태도가 좋지 않고, 영문학 교수로서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찰스가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찰스는 학과장인 로맥스가 아끼는 제자였다. 로맥스는 찰스가 합격할 수 있도록 스토너를 집요하게 압박했다. 


 하지만 스토너는 끝까지 로맥스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학자와 교사로서의 양심을 저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로맥스는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스토너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때부터 로맥스가 주도하는 직장 내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자신이 지닌 지위를 이용해 모든 합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스토너를 힘들게 만들었다. 가령 스토너는 오랫동안 교수로 재직했음에도 부교수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수업 과목 선택이나 시수 배분에도 불이익을 받았다. 사실 대학뿐만 아니라 일반 학교도 마찬가지다. 교장이나 교감이 마음만 먹으면 학교 안에서 합법적인 방법으로 얼마든지 교사를 괴롭힐 수 있다. 그것을 알기에 보통은 권력자가 원하는 대로 자신을 맞춰 간다.


 평생을 몸담았던 직장의 부조리 앞에서도 스토너는 적극적으로 위기를 해결하고자 나서기보다 조용히 참고 인내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자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못했다. 반면에 그와 대척점에 서 있던 무리들은 계속 승승장구했다. 스토너는 마흔셋의 나이에 처음으로 사랑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지키지 못했다. 대학원생이었던 캐서린과의 불륜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한 시간을 경험했지만, 로맥스의 보복으로 시간 강사였던 캐서린은 그의 곁을 떠나야 했다. 


 집안 또한 평온하지 못했다. 인기녀가 되어야 한다는 이비스의 부추김으로 남자들과 문란한 관계를 이어갔던 그레이스가 임신을 하게 된 것이다. 아이의 아빠와 급하게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곧 과부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 입대한 그레이스의 남편이 전사한 것이다. 그레이스는 젖도 떼지 못한 아기를 시댁에 맡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실의 괴로움을 이기지 못한 그레이스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그레이스는 해가 갈수록 술을 조금씩 더 마셔서 공허해진 자신의 삶에 맞서 스스로를 무감각하게 만들면서 하루하루를 조용히 살아갈 터였다. 그는 그녀에게 적어도 그런 생활이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레이스가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스토너, 351쪽


 보통의 부모라면 자식이 혼전임신에 원치 않았던 결혼에 과부까지 된 상황 앞에서 기가 막히고 화가 날 것이다. 심지어 아직 살아갈 날이 창창한 자녀가 오직 술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속이 타들어 갈 것이다. 하지만 스토너는 그런 딸의 삶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딸을 탓하기는커녕 오죽하면 딸이 괴로운 상황을 잊을 수 있게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고난을 대하는 그의 덤덤한 태도를 보고 러시아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왜 당신의 인생이 무조건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힘든 시간도 당신의 인생입니다."



당신은 삶에서 무엇을 기대했나


 로맥스의 끝없는 괴롭힘 속에서도 스토너는 직장을 그만두지 않았다.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캐서린과의 이별 이후 스토너는 육체와 영혼 모두 급속히 늙어갔다. 예순이 된 스토너는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미 암종양이 많이 퍼져 있어 수술을 해도 완치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되물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것들도 자신이 살아왔던 시간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그는 아내를 부르는 대신 고요히 혼자만의 시간을 선택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찾은 것은 자신이 쓴 책이었다. 그의 삶 일부가 그 책에 영원히 남아 있을 거라는 즐거운 확신과 함께 처음 대학에서 느꼈던 공부의 설렘과 강의에 대한 열정이 여전하다는 것을 느끼며 편안히 죽음을 맞이했다.


 그럼 '스토너'의 삶은 성공일까, 실패일까. 임종 직전 그는 냉철하게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실패했던 경험들을 떠올렸다. 그는 학자로서 명성을 떨치지도 못했고,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지도 못했다. 평생 동안 냈던 책은 박사 때 썼던 논문을 모은 책 한 권이 전부였다. 학생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교육자였지만, 교육자로서도 학생들의 존경을 받지 못했다. 무심한 태도로 일관하며 학생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던 평범한 선생님이었다. 평생 동안 마음을 나눈 친구가 몇 명 없을 정도로 진실된 우정을 나눈 인간관계 역시 풍성하지 못했다. 가정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고, 뒤늦게 찾아온 사랑도 지키지 못했다. 오랜 세월 학문 연구를 통해 깨닫게 된 결론 역시 자신은 여전히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얼핏 보면 실패투성이의 인생이라 할 수 있다. 가족, 사랑, 직장, 자아실현, 인간관계, 소소한 삶의 즐거움 그 어떤 것에서도 뚜렷하게 성공이라고 평가할 만한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왜 그의 인생을 다룬 이야기를 끝까지 읽고 나면 먹먹한 감정과 함께 짙은 여운이 찾아올까. 아마 대부분 사람들이 스토너처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진학이나 진로 선택 앞에서 실패하고, 관계 때문에 힘들어하고, 원치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자식 때문에 속상해하고, 직장 상사의 이해할 수 없는 언행으로 상처를 입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에 아파한다. 계획하고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는 스토너의 이야기에 울림을 느끼게 된다. 


 인생의 기본값이 고통이더라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삶이란 살아간다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 영광의 순간과 힘들었던 순간도 인생이라는 강물에 비추어 보았을 때 하나의 작은 과정일 뿐이다. 스토너는 자신을 찾아온 시련을 해결하고 극복한 초인 같은 존재는 아니다. 다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받아들였다. 잘못된 선택 후에도 늘 최선을 다했다. 지난 과거를 후회하는데 시간을 쓰기보다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본인에게 주어진 것들을 해나갔다. 우직하게 직장에서 버티며 자신이 좋아하는 가르치는 일을 끝까지 성실하게 해냈다. 그는 우연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 하지만 평생 그 일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꾸준하게 해 왔다. 언제부턴가 수업이 취소되면 룰루랄라 신나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누가 뭐라고 하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끝까지 할 수 있었던 스토너의 삶은 그 자체로 성공이다. 그는 건강이 허락했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교단에 섰고 책과 함께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내리는 평가와 판단은 죽음 앞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스토너 본인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내가 기대하고 원했던 삶을 살았다는 확신과 함께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의 인생이 우리에게 묵직한 감동을 주는 이유이다.


 그의 일대기를 통해 평범해 보이고 무미건조한 내 일상에 애착을 갖게 되었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특별하고 거창한 이벤트는 우리의 삶에서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대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당장 내일 생을 마감하게 되더라도 오늘 하루를 나답게 살고 싶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들로 하루를 채우는 것이다. 그 길의 끝에 내 삶의 의미를 찾게 될 거라 믿는다.


 소설을 두 번 읽고 나니 왜 이 소설이 50년 만에 역주행 신드롬을 일으켰고, 독서 친구가 여운이 깊은 소설로 추천을 해주었는지도 충분히 알게 되었다. 독하고 강렬한 이야기들에 중독되어 있는 우리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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