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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촉

힘들면 쉬어

by 자유

엄마의 촉은 뭐랄까….

살아온 인생만큼 덤으로 얻게 되는 신비한 힘이 있는 것 같다.

며칠 전 괜히 딸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일요일 오후가 되자 마음만 먹지 말고 직접 전화를 하자는 생각에 딸애 이름을 클릭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오래갔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피곤해서 지금까지 자는 건가?' 걱정이 점점 가지를 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낮잠을 자는 것으로 위안으로 삼고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하자 딸애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몹시 아픈가?'

평소와 다르게 전화기 너머로 불길한 기운이 감지된 나는 목소리를 살짝 높여 말했다.

"어디 아프니? 목소리가 왜 그렇게 다 죽어가."

"지금 병원 다녀오는 길이야."

"병원?"

"응, 한의원에 다녀왔어. 내가 평소에도 자고 일어나면 몸이 흠뻑 젖어있었다고 했잖아. 그리고 요즘 들어 너무 피곤하고 해서 갔지."

딸애는 내가 유방암과 갑상샘암 수술을 했기에 자기도 그런 유전자가 있어 혹시 그런가 싶어 여러 검사도 했다고 한다.

"내가 지금 공황장애도 왔고, 에이디 에이치 중증이래."

딸애 목소리가 갈라지더니 이내 말을 멈췄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딸이 눈물을 삼키고 있음을 감지했다. 속이 타들어 간 나는 딱히 해 줄 말이 없어 더 답답했다.

"아이고, 어떡해, 어떡해. 지금 그럼 약은 지었고?"

"응, 일주일 약을 지었어. 엄마 나 지금 운전 중이니까 집에 도착하면 다시 전화할게."

"그래, 조심해서 운전하고. 꼭 전화해."

전화를 끊고 가슴이 답답해져 부엌으로 가 냉수를 따라 마신 나는 거실에서 내 통화를 들었을 남편의 등을 쳐다봤다. 잠귀가 밝은 남편은 소파에 앉아 한숨을 내쉬는 나를 향해 돌아앉았다. 이마에 깊은 골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깊어 보였다.

"너무 힘들다고 하는가?"

"예. 올봄에 직장 본사가 이전됐다고 한 것 같은데, 그. 청담동 쪽으로. 인천에서 청담동까지 운전하는 그것 장난 아닐 텐데."

나 역시 작년부터 왕복 두 시간 거리를 통근하는 생활을 하고 있어서 그 피로감이 만만치 않다는 걸 체감하는 중이라 딸아이가 걱정됐다. 디스크로 고생했던 일도 떠오르자 저러다 아이가 진짜 쓰러져서 큰일이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돼 소파에서 다시 일어나 딸에게 전화를 했다.



“밖에 나가기 싫어. 사람들이 날 알아보고 뒤에서 내 욕을 하는 것 같아. 집 앞 편의점에 갈 때도 모자랑 마스크를 꼭 눌러써야 돼. 가보고 싶은 식당도 잘 못 가겠어. 그냥 다 힘들고 싫어.”

딸이 울먹이며 말했다.

나는 “그래, 그래. 많이 힘들지. 그 마음, 엄마도 알아.” 하며 다독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야 하는 인플루언서라는 직업 탓에, 팔로워가 늘어날수록 딸의 일상이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관찰당하는 듯한 감정이 들었을 것이다.

빛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만큼 그림자도 짙어지는 일.

나는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한때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근무하던 학교가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안에 있어서, 평일 방과 후나 주말마다 학부모나 아이들을 민낯으로 마주칠 때가 많았다.

특히 같은 동에 사는 아이와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칠 때면,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이 생기곤 했다.

꼬질꼬질한 차림이 괜히 신경 쓰이고,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학부모를 마주치면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맨발에 슬리퍼를 끌고 슈퍼에서 물건을 고르다 아이와 눈이 마주칠 때, 동네 맥주집에서 학부모를 만날 때, 단지 내 사우나에서 우리 반 아이를 만날 때…. 그 모든 순간이 낯설고 어색했다.

사적인 나의 모습이, 의도치 않게 그들의 기억 속에 교사로서의 이미지와 뒤섞이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점점 마주치는 동선을 피하게 되었고, ‘사는 곳과 일하는 곳은 달라야 한다’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 중 하나는 그만둬야 할 것 같아. 병원에서도 내 상태가 너무 심각하다고 했어.”

딸은 인플루언서 일을 하면서 주 5일 출근하는 직장도 다닌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감당하기엔 체력과 정신 모두 번아웃이 온 모양이다.

얼마 전 딸이 집에 내려왔을 때였다. 막내 동생에게 옷을 사주겠다며 함께 백화점에 갔다. 계산대 앞에서 동생 신발값을 치르고 있을 때,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다가와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딸은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응했다.

그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딸이 걱정됐다. 온전히 자기 시간을 갖고 싶었을 텐데, 집에 내려와서조차 누군가의 관심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짠했다. 잠시 쉬러 온 자리에서도 ‘좋은 모습으로 보여야 한다’는 압박이 딸아이를 더 지치게 하지는 않을까 내심 안쓰러웠다.

다음날이 일요일이고 저녁에 올라가야 해서 오전까지 푹 자라고 했더니, 딸은 고등학교 친구가 새로 연 카페를 도와주러 가야 한다며 아침 일찍부터 준비하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 내려온다니까 친구가 부탁하더라고. 그래서 알았다고 했지. 가서 홍보도 하고, 사인도 해줘야 돼.”

오후가 되자 궁금해진 나는 그 카페 앞을 지나가 보았다. 젊은 손님들이 친구, 애인과 함께 카페 안에서 북적거리고 있었다. 딸은 그들 틈에서 웃고 있었다. 사인을 해주고, 사진을 찍고,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활기차 보였다.

오후 네 시가 지나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선 딸은 거의 녹초가 되어 있었다. 점심은 커피 한 잔으로 때웠다고 했다. 나는 딸을 데리고 근처 식당으로 들어가 솥밥을 주문했다. 밥을 떠먹으며도 딸은 연신 “오늘은 재미있었어. 근데 좀 힘드네.”라고 했다.

그날 딸이 집에 내려온 이유가 결국 친구를 돕기 위해서였다는 걸, 나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쉬지도 못한 채 저녁 기차를 타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사는 게 참, 쉽지 않구나.

문득, 내가 딸의 나이였을 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려보았다.

스물일곱 살의 나는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임용고시에 두 번 떨어진 뒤, 생활비를 벌면서 공부를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새벽이면 대학 도서관으로 향했고, 오후 세 시까지 공부한 뒤 네 시부터 밤 열 시까지 초·중·고등학생을 가르쳤다. 그렇게 삼 년을 살았다. 그때는 피곤하다는 생각보다, 이 모든 과정이 언젠가 교사가 되기 위한 험난한 과정이라 믿었다. 내 꿈을 향해 가는 길이라면, 잠시 힘든 건 괜찮다고 하루하루를 버텼다.

아마 지금의 딸도, 그때의 나처럼 스스로를 다독이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 애쓰면서 말이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 과정에서 자신의 혼을 너무 깊이, 너무 많이 갈아 넣은 건 아닐까.

그래서 이제는 몸이 잠시 쉬어가자며, 대신 아우성치고 있는 건 아닐까.

오늘 퇴원한 딸이 방에 누워 있는 모습을 항공샷으로 찍어 카톡으로 보내왔다. 이불 위에 누워 있는 딸 곁에서 두 마리의 고양이가 그녀를 걱정스럽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웃기면서도 애잔했다.

그래, 너희들이라도 곁에 있으니 다행이구나.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아도, 그 따뜻한 체온이 딸에게 위로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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