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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니나 Feb 07. 2024

나는 어떻게 난민의 입장을 이해하는가

도덕의 기반 (2) - 장 자크 루소

2016년 9월, 프랑스 보르도에서 파레스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와 안면을 트게 되었다. 당시 어학원에서 프랑스어를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과 지속적으로 모임을 가지던 중이었는데, 파레스는 그 무리 중 한 명이었다. 우리는 함께 음식점에 가고, 때로는 파티에 참석하기도 하며 친분을 다져 나갔다. 내가 다니던 어학원에서는 근처에 앉은 사람과 짝을 지어 회화를 연습하는 시간이 자주 주어졌는데, 어느 날은 파레스와 짝이 되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을 간단한 프랑스어 표현으로 나타낸 뒤 상대방에게 설명하는 활동이 진행되었고, 짝과의 대화가 끝난 뒤에는 한 사람씩 돌아가며 "짝꿍의 인생"을 모두에게 소개해야 했다.


꽤 오래 전 일이라 모든 대화 내용이 기억나진 않지만,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는 건 "살던 지역에 폭탄이 떨어져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는 말이다. 시리아 출신인 파레스는 홈즈라는 곳에 살았는데,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폭탄을 피해 피난을 떠나야 했다고 한다. 구김살 없이 밝은데다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어 주변 사람들의 호감을 쉽게 샀던 파레스는, 쉽게 꺼내기 힘들었을 이야기를 기꺼이 들려 주었다.


2017년 7월,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 머무를 때 친하게 지냈던 파트리샤는 베네수엘라에서 온 벽화 예술가였다. 대범하고 거침없는 성격에다 웃음도 많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가깝게 지낼 수 있었던 친구였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우연히 파트리샤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파트리샤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말들을 꺼냈다. "엄마 말로는 식량 보급로가 막혀서 쌀값이 무지막지하게 치솟았대. 1kg에 60유로가 넘는다나? 엄마는 나더러 돌아오지 말고 해외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셔." 당황한 기색도 없이, 오히려 평온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가는 파트리샤 앞에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파트리샤가 말하기 전까지는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011년에 시작된 시리아 내전은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며, 베네수엘라 역시 극심한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사상 최악의 난민 위기를 겪고 있다. 유엔 난민 기구에 따르면 베네수엘라는 시리아 이후 최대 난민 발생국으로 2023년 5월 기준으로 약 732만 명, 인구 4명 중 1명 꼴로 조국을 떠났다. 이유는 당연히 생존을 위해서다. 당장 살던 곳에 폭탄이 떨어진다면 어느 누구도 떠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초 인플레이션에 식량 보급로까지 막힌 상황에서는 누구도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할 것임이 분명하다.




베네수엘라, 물가상승률 130060% … “IMF 예측 보다는 낮아”

[...] 자료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지난해(2018년) 물가상승률은 13만60%에 달했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베네수엘라의 이전 물가상승률은 2016년 274.4%였으며, 2017년에는 862.6%였다. ‘한 나라 두 대통령’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는 2015년 이후 경제는 사실상 붕괴 수준이다. 지난 5년 동안 베네수엘라 경제 규모는 절반으로 축소됐다. 기초 생필품과 의약품조차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베네수엘라를 떠난 국민만 340만명에 달한다. [중앙일보, 2019. 5. 29.]




나는 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부끄러운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신문기사나 뉴스를 통해 시리아에서 내전이 이어지고 있으며 수많은 난민이 발생했다는 소식은 전해들었지만, 그뿐이었다. 심지어 베네수엘라에 대해서는 아예 알지도 못했다. 나의 시리아인 친구가, 베네수엘라인 친구가 너무도 담담한 목소리로 전해줬던 그 이야기들을, 그리고 한번도 난민의 상황을 헤아려본 적 없었던 나에 대한 부끄러움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낯선 누군가가 처한 현실이 아니라, 내 눈앞에 있는 친구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 처한 현실이었다. 그 때 느꼈던 감정들은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남아, 더는 난민 이슈를 예사로이 넘기지 못하게 되었다. 난민에 대한 기사나 뉴스를 보면 친구들 생각이 난다.


베네수엘라의 초인플레이션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철학자인 장 자크 루소(Jean Jacque Rousseau, 1712~1776)는 인간의 도덕성이 동정심pitié이라는 감정을 통해 발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1762년에 출판된 <에밀>을 통해 한 인간의 생애를 유아기(1~5세), 아동기(6~12세), 소년기(12~15세), 청년기(15~20세, 제2의 탄생기) 그리고 성년기(20세~)로 나누고, 각 연령에 적합한 이상적인 교육 방식을 논하였다. 교육과 관련하여 주목할 부분이 많은 저작이지만, 이번 편에서는 제3부(소년기)와 제4부(제2의 탄생기)에 초점을 맞춰 도덕의 기반을 감정에 두고자 한 시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제1부와 제2부에 걸쳐 유아기와 아동기에 적합한 교육들을 논한 루소는, 그가 "인생의 제2단계"라고 부르는 청년기(15~20세)가 되어서야 한 명의 아이가 도덕적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본다.




우리의 어린이는 어린이 단계를 벗어나 한 개인이 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을 사물과 연관시키고 있는 어떤 필연의 끈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우리는 먼저 그의 신체와 감각을 훈련시켰고 그 다음 그의 정신과 판단력을 연마시켰으며 마지막으로 손발의 사용과 재능의 활용을 결합시켰다. 그를 행동하고 생각하는 존재로 만든 것이다. 그를 인간으로 완성시키기 위해 남은 일은 그를 사랑할 줄 아는 인간으로 만드는 일이다. 즉 감정에 의해서 이성을 완성시키는 일이다. (루소, 『에밀』)




루소에 따르면, 모든 감정(감성, 정념)의 원천은 자기에 대한 애착심, 즉 자기애amour de soi이다. 자기애는 의식주와 같이 삶에 필수적인 요소를 충족시키는 데 유용하기 때문에 생존과 성장에 도움이 되는 선한 성질을 지니지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게 될 때에는 선한 것이 되기도 하고 악한 것이 되기도 한다. 자기 자신의 생존만을 고려하다 보면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감정인 자존심amour-propre은 자기애에서 파생된 감정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생겨나며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고 그들의 인정을 받는 것을 지향한다.




정념의 원천이며 다른 모든 정념의 근본이 되는 것,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 언제나 존재하는 유일한 정념은 자기에 대한 애착심이다. 이것은 근본적이고 본능적이며 다른 모든 감정에 선행하므로 그 외의 다른 감정은 그것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든 정념은 자연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자기애는 필요가 충족되면 만족하지만 자존심은 비교 대상을 가지므로 절대로 만족하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이 감정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좋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자기를 본인보다 더 좋아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루소, 『에밀』)




필요가 충족되면 만족하는 자기애와는 달리, 자존심이 지향하는 목표에는 제한된 필요나 한계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결코 만족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자존심을 잘 활용하면 타인을 의식함으로써 자기애의 파괴적인 작용을 저지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이처럼 자존심을 긍정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서 자신을 느끼고 그들의 고뇌를 함께 괴로워하는" 마음, 즉 동정심pitié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나는 파레스로부터 폐허가 된 고향을 떠나 타국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전해 들으며 그가 처한 현실을 안타까워했고, 물가 폭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파트리샤의 가족 이야기를 들으며 마치 내 일인 것처럼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기사가 아닌, 내 눈앞에 있는 친구가 처한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공통된 괴로움"이라는 "고통의 감정"을 통해 같은 인간에게 애착을 느끼게 되며, 자신이 알고 있는 타자의 고통과 불행에 관심을 가지고 공감하는 순간부터 도덕성 발달이 가능해진다. 도덕적인 사고가 있기 이전에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동정심이라는 감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루소가 이성을 등한시했던 것은 아니다. 가까운 친지들에게 국한된 감정에서 출발해 인류 전체를 향한 동정심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성을 통한 도덕적 추론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도덕성의 발달은 감정으로부터 비롯되지만, 동정심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게 된 뒤에는 이성을 통해 추론하는 능력을 발달시킴으로써 감정을 보완하고 합당한 행동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나의 경우에는 파레스와 파트리샤의 이야기를 통해 동요되었던 감정, 그들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처럼 여길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동정심이 발동된 후에, 시리아와 베네수엘라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거나 두 국가의 국민들이 겪고 있는 구체적인 어려움을 파악하는 일 등에 이성을 활용함으로써 감정을 보완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우리가 같은 인간에게서 애착을 느끼는 것은 환희의 감정에 의해서라기보다 오히려 고통의 감정에 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고통의 감정에서 우리의 본성을 보다 더 잘 인식하게 되며, 그들의 우리에 대한 애정의 보증을 한층 더 분명하게 알아보기 때문이다. [...] 우리의 공통적인 필요가 이해관계로써 우리를 결합시킨다면, 우리의 공통된 괴로움은 애정으로써 우리를 결합시킨다. [...] 이렇게 해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최초의 감정인 동정심이 생기는데, 어린이가 감수성과 동정심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신과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비슷한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초월하여 고통스러워하는 대상과 일체가 되어야만 동정심을 갖게 된다.


사람은 자신도 똑같이 불행을 당하게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남의 불행을 동정하지 않는다. '내가 불행한 사람을 돕는 것은 불행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구처럼 아름답고 뜻이 깊고 감동적이며 진실한 말을 알지 못한다. 왕은 왜 신하를 동정하지 않을까? 부자들은 왜 가난한 사람에게 냉혹할까? 귀족은 왜 천민을 학대하는가? 모두가 상대방의 입장을 경험하지 않았고 그 입장에 처하리라고는 생각조차 않기 때문이다. (루소, 『에밀』)




"사람은 자신도 똑같이 불행을 당하게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남의 불행을 동정하지 않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상대방의 입장을 경험하지 않았거나 그 입장에 처하리라고는 생각조차 않는 사람들은 자신보다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쉽게 무시하고 배척하게 된다.


루소는 고통을 견디는 것이야말로 어린이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교훈이며 꼭 알아야 할 일이라고 본다. 고통으로부터 어린이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어른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소위 '온실 속 화초'로 키운다면) 그런 어린이는 고통이라는 것 자체를 알 기회를 박탈당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에 공감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도덕 수업에서 난민들을 태운 구명보트가 해상에서 전복된 참사 사례를 다뤘던 날, 놀랍게도 한 학생이 보트가 뒤집히는 뉴스 속 영상 자료를 보고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지적인 능력이 꽤나 발달한 학생이었고, 도덕 지필평가 성적도 100점이었다. 그날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감정이 성숙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성만 발달한 사람을 마주한 심정 - 칸트라면 오히려 그가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할 테지만 - 이었다. 공부를 무척 잘했던 그 학생의 어머님은 아이의 부주의로 미인정 지각 처리가 되면 담임선생님에게 전화해서 내신이 깎이지 않게 해 달라고 들들 볶는 분이셨는데, 하나의 사례로 모든 것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그 학생의 경우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기에 앞서 고통이 무엇인지조차 잘 알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소에 따르면 "열여섯 살이 된 청년은 괴로움을 경험했기 때문에 괴로움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지만(나는 현 시대의 흐름 속에서는 열여섯 살이 되어도 괴로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청년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느낌을 상상하지 못하므로 타인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이때 감각이 발달하여 그의 상상력을 자극해야만 타인에게서 자신을 느끼고 그들의 고뇌를 함께 괴로워할 수 있는데, 이는 상상력이 나 자신을 초월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의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없다는 맥락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실제로 상대방의 입장에 놓이지 않는 이상 불행에 대해 느낄 수 있는 육체적인 감정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과거에 겪었던 고통에 대한 기억력을 통해 그 느낌을 연장시키고 다른 사람이 겪고 있을 고통에 대한 상상력을 통해 확장시켜야만 동정심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적절한 양의 고통을 견뎌내는 연습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루소가 말한 대로, "고통을 알지 못하는 자는 인간다운 사랑의 감정이나 따스한 연민의 정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인용문 출처 : 『에밀』, 장 자크 루소 지음, 정영하 옮김, 연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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