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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명주 Mar 07. 2021

세탁소집 여편네와 깍두기

 현관을 나서서 계단을 내려서면 덜렁 감나무 한 그루와 사철나무 두 그루가 고작인 자그마한 화단이 보이고, 그것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열 발자국 정도 걸어 길을 건너면 바로 백조세탁소다. 그곳은 사시사철 문을 열어놓고 일을 하는지라 내가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마주치게 되는 눈길에 서로 고개 숙여 인사를 나누거나 그도 안 될 양이면 눈인사라도 건네며 머쓱함을 메웠다. 


  백조세탁소 사장님은 둘이다. 세탁을 맡아하는 남자와 수선을 맡아하는 여자, 둘은 부부다. 자그마한 키에 동그란 눈을 가진 여자와는 달리 남자는 둥글넓적한 얼굴에 어깨도 떡 벌어진 것이 영락없는 깍두기 모양새다. 평소에는 그리 금슬 좋은 부부가 없으나 생긴 것처럼 쟁쟁거리는 여자, 그리고 생긴 것처럼 두루뭉술 넘어가려 하는 남자의 부부싸움도 심심찮게 목격되곤 한다. 그럼에도 열심히 사는 모습에 동요되어 남편과 나는 자주 그들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옷을 맡길 때도, 맡겼던 옷을 찾을 때도 나는 늘 세탁소집 여자 사장에게 깍듯하게 사모님이라 불렀다. 그때마다 그녀는 헤벌쭉 웃는 얼굴로 옷을 찾아주곤 했다. 오는 손님마다 다 그렇게 친절하게 대하는지는 모르지만 두 부부가 항상 웃으며 나를 대했기에 장사가 잘 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네들의 친절이라 여기며 백조세탁소를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그리 좋다며 입이 닳도록 칭찬하던 세탁소를 향해 내 눈이 옆으로 길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아침부터 체크무늬 감색 바지를 찾는 남편 때문에 장롱을 이리 헤집고 저리 뒤집었지만 체크무늬는커녕 네모칸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어디에 두었을까, 생각을 떠올리려 애쓰며 주방으로 나가 압력솥의 김을 뺐다. 치이익-하고 김이 빠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세탁소 다리미의 수증기가 생각났고 문득 떠올려지는 것이 있었다. 옷매무새를 살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세탁소를 향해 뛰었다. 


  “사모님, 체크무늬 감색 바지요.”


  “음… 보자… 없는데요. 없어요.”


  아침부터 부부싸움을 했는지 그녀의 목소리에 언뜻 가시가 느껴졌지만 그것에 신경을 나누어줄 여유가 없었다. 셔츠에 양말까지 신고서 아랫도리는 휑한 팬티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는 남편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얼마 전 대청소를 한답시고 장롱 안에 처박힌 채 구겨진 옷들을 죄다 찾아내서 세탁소에 맡겼었다. 그 안에 분명 남편의 체크무늬 감색 바지도 있었다. 그런데 없단다. 내가 장롱을 헤집어놓을 때보다도 훨씬 더 얌전하게 옷가지 몇 개를 들춰보더니 가볍게 뱉어냈다. 없다고. 


  이게 무슨 거지발싸개 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고 다른 가게들을 다 제쳐두고서 열 걸음이나 되는 길을 걸어와 내가 직접 맡겼건만, 손님이 왕인 것을 잊고 이리도 불친절하게 굴어서야. 남의 바지를 잃어버렸으면 미안하다든가, 보상을 어찌해주겠다든가, 하는 사과의 말이 먼저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속에서 욕이 치올라왔다. 친절하기는 개뿔. 결국 바지를 찾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여태껏 사모님이라 깍듯하게 부르던 그녀가 여편네가 되는 순간이었다.


  한번 밉게 보기 시작하니 그 여편네가 그리도 눈에 거슬릴 수가 없었다. 현관만 나서면 보기 싫어도 마주쳐야 하는데 하물며 창문을 열고 고개만 살짝 돌려도 그 여편네가 바로 눈앞에서 알짱거렸다. 동그랗다고 생각했던 눈은 뺑덕어멈 저리 가라 하게 쫙 찢어져 보였고, 아담하다고 생각했던 작은 키는 난쟁이 똥자루만 하게 보였다. 깍두기는 또 어떠한가. 더할 나위 없이 뒷골목에서 형님이라 불리며 한 가닥 했을 것처럼 보이는데, 틀림없이 저 셔츠 안에는 용 몇 마리가 등을 휘감고 있을 것이었다. 다시는 저 여편네랑 깍두기네 세탁소에 손수건 한 장이라도 맡기나 봐라, 하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후로는 몇 블록을 더 가야 하는 수고를 해야 했지만 일부러 경쟁업소인 양지 클리닝 세탁소를 보란 듯이 이용했다.


  눈이라도 마주칠라치면 팩 돌아서고, 팩 돌아서고. 그렇게 몇 달째 나 혼자 삐쳐서 눈인사조차 나누지 않으며 지내고 있을 때다. 한참 전에 출근한다고 나섰던 남편의 목소리가 잔뜩 날이 선 채로 꼭꼭 닫아둔 창문을 뚫고 날아들었다. 오가는 말을 대충 주워듣자니 주차문제로 싸움이 난 모양이었다. 얼른 창문을 열고 밖을 내려다보니 화단을 지나 주차장 입구까지 시커먼 그랜저 한 대가 떡하니 막고 있어 남편 차가 시동이 걸린 채로 오도 가도 못한 채 부릉부릉 속만 태우고 있었다. 그것을 본 내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내 이놈을 그냥. 성격 급한 나는 팔을 걷어 부치고 검지를 뾰족하게 세워 삿대질할 준비부터 했다. 그 차는 전부터 주차할 공간을 자꾸만 막아놓는 바람에 눈엣가시로 찍어둔 지 꽤 오래였다. 그런데 서둘러 나갔는데도 나는 너무 늦게 도착한 꼴이 되었다. 이미 다른 이가 대신 싸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세탁소의 여편네와 깍두기가 나서서 대신 고함치고 삿대질을 해주고 있었다. 세탁소 부부에게도 그랜저는 미운털이 잔뜩 박혔던지 굳이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이 사납기 그지없는 여편네 목소리와 우락부락한 깍두기 덩치에 밀려 그랜저가 찍소리도 못하고 꽁무니를 내빼느라 바빴다.


  싸움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베갯머리송사라고, 내내 백조세탁소의 여편네와 깍두기를 있는 대로 깎아내렸기에 뭐라 감사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남편도 어물쩍 어물쩍하다가 서둘러 출근했다. 싸움구경을 하려고 잔뜩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가자 듬성해진 사람들 사이에 서있던 여편네와 얼핏 눈길이 마주쳤다. 머쓱하여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려 웃어 보였다. 여편네가 환하게 마주 웃었다. 깍두기도 나를 향해 고개를 넙죽 숙이고는 서둘러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화도 오해도 다 풀렸는데 아직 세탁소 출입은 하지 못하고 있다. 튼실한 두 다리를 자랑이라도 하듯 장롱을 빠져나와 베란다 구석까지 몰래 숨어든 체크무늬 감색 바지를 얼마 전에 찾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지 부린 것이 더 미안해 그들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 다만 대가리만 숨기면 아무도 찾아내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타조처럼 아들아이를 시켜 몰래 이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그들을 칭할 때 여편네와 깍두기라고 한다. 왠지 입에 짝짝 엉기는 게, 더욱 정감이 간다는 이유다.


  오늘도 백조세탁소는 성업 중이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일감으로 인해 여편네의 재봉틀 소리가 드르륵거리고 깍두기의 다림질 소리가 치이익거리며 요란하다. 그 수선과 다림질에 먼지로 더럽혀진 옷가지가 아닌 오만과 편견으로 덕지덕지 때 묻은 나를 맡기고 싶다. 그들이라면, 여편네의 수선 솜씨와 깍두기의 세탁 솜씨라면, 시커멓게 변해버린 마음까지도 세탁소 이름인 백조처럼 하얗게 표백해줄 것만 같다.


  매번 용기가 없어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머뭇거리지만 아침마다 눈을 뜨며 생각한다. 오늘은 먼저 말을 걸어 봐야지. 그러자면 아마도 세탁소집 여편네와 깍두기가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살 눈웃음치며 대답해 줄 것이다. 어머, 오랜만에 오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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