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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명주 Oct 27. 2021

이쁘면 다냐?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한여름 땡볕을 머리에 이고서 범계역 사거리 롯데백화점 앞 벤치에 갇히고 말았다. 말짱하게 생겨서는 짧은 다리에 두툼한 발등을 드러내 놓고 헤딱헤딱 발을 흔들고 있는 사람, 바로 나다.


  내가 왜 이렇게 신발도 없이 시내 한가운데서 이러고 있게 된 것일까?


  귀찮은 마음에 굳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꺼리는 나를 남겨둔 채 친구는 얼마 전에 산 옷의 수리를 맡기러 백화점에 들어갔고, 하릴없이 벤치에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친구를 기다리던 나에게 아름다운 아가씨가 이상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니, 그 아가씨는 사실 내내 내 눈에 담겨있던 사람이다. 내 눈에만 띄었을까. 화중왕花中王, 꽃 중의 꽃. 한 떨기 탐스럽고 찬란한 모란처럼 오가는 수많은 사람 중에 그 아가씨는 단연 눈에 띄었다. 저리 아름다우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여러 총각 가슴에 불을 지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외쳤을 것이다. 예쁜 것이 죄가 된다면 당신은 사형이오. 그렇게 치면 나는 무죄? 모범시민상? 대통령 수상? 


  흥, 나도 머-얼리서 보면 송혜교를 닮았다나 전지현을 닮았다나. 3M 송혜교. 그리 불리며 사형감이었던 적도 있었다고, 이거 왜 이러셔. 헉! 예 예, 잡소리 집어치울 테니 던지려던 돌은 그만 내려놓으시지요.


  막 쇼핑을 마쳤는지 대여섯 개의 종이가방을 양손에 든 채로 백화점을 나서던 아가씨. 애교 살에 그늘이 생길 만큼 기다란 속눈썹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하이얀 피부. 길게 늘어뜨린 삼단 같은 머리. 내 한쪽 허벅지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 같은 가느다란 개미허리. 종아리까지 덮는 길이의 하늘하늘한 실크 스커트. 그 아래로 내 팔뚝보다 가느다란 발목.  


  생긴 걸로 따지자면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 것만 같은 그 아가씨가 나에게 말을 걸게 된 이유는 그 발목 밑이었다. 


  내 손을 쫙 펴서 한 뼘이나 됨직한 웨지힐 샌들 굽에서 발등을 덮고 있던 아슬아슬한 끈이 백화점 문을 나서자마자 툭,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것도 양쪽 다! 


  내내 아가씨를 훔쳐보던 나는 이제 드러내 놓고 그녀에게 눈빛을 쏘아댔다. 어서 나에게 말을 걸어요.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왜 나를 보지 않는 거죠? 왼쪽 말고 오른쪽. 나를 보세요. 당신의 구원자가 여기 있다고요. 


  찌릿찌릿 보낸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드디어 그 아가씨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떨어진 신발 끈을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에 낀 채로 직직 끌며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얼굴처럼 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저…, 죄송한데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지요. 아까부터 내가 눈빛으로 불렀잖아요. 이리로 오라고. 

  그런데 막상 다가온 그녀에게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인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뭘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까요?”


  “신발 끈이 떨어져서 그러는데, 신고 계신 신발 좀 잠시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이런, 이렇게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아가씨를 보았나. 얼굴도 예쁜데 머리도 똑똑하네. 나는 왜 신발을 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못했지?


  아무렴, 당연하지요. 예쁘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시대에 이깟 신발 하나, 아니 슬리퍼 쪼가리 하나 못 빌려드릴까요. 그래서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세요.”


  두말없이 냉큼 벗어주는 내 슬리퍼를 감사히 받아 신고는, 좀 전에 들고 나왔던 종이가방 몇 개와 양산까지 내 무릎에 얹어놓았다.


  이거 너무하시네. 왜, 이 짐들까지 맡아달라고요? 되묻지 못하고 눈만 끔뻑이는 내게 아가씨가 말했다.


  “담보예요.”


  내가 방금 속엣말이 아니라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나? 들켰나? 


  내가 이렇게 속물이라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믿을게요.”


  “아뇨. 그래도 담보로 맡길게요.”


  키야-, 역시 얼굴이 예쁘니 성격도 확실하구나. 


  “그럼 그렇게 해요. 어서 다녀오세요.”


  신발을 새로 사러 가겠거니, 했다. 그런데 아가씨가 향한 곳은 백화점과 반대방향이었다. 그리고, 그리고는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분명 쇼핑백과 꽤나 값나가 보이는 양산까지 맡겼으니 그저께 지하상가에서 새로 산 4만 5천 원짜리 내 슬리퍼가 탐이 나서 도망간 것은 아닐 것이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5분, 10분이 지나자 슬슬 의심병이 도졌다.


  양산을 쫙 펼치면 어디 한 군데 찢어져 있는 거 아냐? 도톰해 보이는 쇼핑백은 사실 쓰잘데기 없는 신문지로 가득 찬 거 아냐? 분명 내가 먼저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정해진 사냥감이었던 건가? 내 신발이 그렇게 비싸 보였나?


  의심병 사이로 걱정도 몰려왔다.


  집에는 어떻게 가지? 맨발로 버스 타면 정신 나간 여자 취급당하겠지? 백화점 신발은 비쌀 텐데, 이참에 핑계 대고 비싼 구두 하나 장만할까? 예쁜 얼굴에 홀려서 신발 날려먹었다고 하면 얼마 전부터 도원결의를 맺은 우리 형이 그 나이 먹고 삥 뜯겼냐며 놀려댈 텐데. 오만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런데도 사기를 당한 것인지 아닌지는 쇼핑백을 열어보면 될 것을, 속물인 나를 들키고 싶지 않아 무릎 위에 얹힌 종이가방 더미는 쳐다보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하늘만 바라보았더랬다. 


  다다다다. 드디어 내 신발은 손에 들고 다 떨어진 요상한 슬리퍼를 신고, 그 아가씨가 한결 가뿐한 얼굴로 뛰어왔다. 급하게 뛰어왔는지,


  “헥헥… 고…헥헥 고맙습니다. 신발을 수선하는 곳에 맡기러 갔는데… 헥헥 사람이 많더라고요. 헥헥.”


  에이씨. 그게 다였다. 양산과 종이가방 더미를 낚아채듯 챙겨서 달랑 고맙다는 말 한마디만 하고 그 아가씨는 쌩하니 가버렸다. 


  이미 한참이나 멀어져 버린 그 아가씨의 뒤통수에 대고 나의 털 난 양심이 중얼거렸다. 예쁘면 다냐? 저기 옆에 커피숍 있던데, 엉? 거리를 걷는 모두가, 개나 소나 다 들고 다니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사 오면 어디 덧나나, 엉? 맨발로 앉아있는 동안 사람들 시선이 얼마나 따가웠는데, 엉? 그깟 양심 지키느라 종이가방에 눈길도 주지 않았는데, 알기나 해, 엉? 


  몇 분 후 돌아온 친구는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커피를 사준다고 했다.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리며 무심코 시선을 아래로 내려 신발을 바라보았다. 그때서야 깨닫는다. 아, 나는 양심이 사형감이구나. 이깟 싸구려 신발 한 번 빌려주고 뭘 그리 바랐던 거야? 그래서 결론은, 


  그 아가씨는 예뻐서 사형, 땅! 땅! 


  나는 양심에 털 나서 사형, 땅!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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