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히 아끼는 연인을 만지듯, 그의 손길이 조심스럽다. 긴장한 것이 역력한 그의 손이 내 정수리에 살포시 닿았을 때는 나까지 가슴이 둥둥거리며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과연 그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이대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를 믿고 나를 맡겨도 되는 것일까.
쌔액쌔액. 사내의 숨소리가 생생하게, 그리고 심상찮게 들린다. 두툼한 배가 들썩일 때면 슬쩍슬쩍 내 작은 귀에 그의 뱃가죽을 덮은 옷자락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더구나 곁눈질로 슬쩍 보았을 때는 삐죽 삐져나온 코털이 부르르 떨릴 때마다 고약한 담배냄새가 섞인 숨이 내 뺨을 스치기도 했다. 이 남자, 정말 믿어도 되는 거야?
몇 가닥인지 세어보기라도 할 셈인가. 빗고 또 빗고, 또 빗어 내린 내 머리카락을 들춰 세세히 살피고 매만지더니, 드디어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갑작스레 쌕쌕거리던 그의 숨소리가 멈추자 덩달아 사방도 고요해지는 듯했다. 그의 숨이 멈추는 순간부터 나는 차마 이 꼴을 더는 보아낼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드디어 시작인 건가!
다니던 미용실이 웬일인지 문을 닫은 채로 몇 달이 지났다. 내 이마를 가리던 머리카락은 기다려주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서 금세 눈을 찔렀고 귀밑머리는 하얀색으로 변한 지 오래여서, 이제 겨우 오십 줄을 넘겼을 뿐인데 거울을 볼 때마다 얼핏얼핏 할머니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무엇보다 흰 머리카락이 자라면서 불러오는 가려움을 참을 수가 없어 외출을 할 때면 내 눈은 온통 마땅한 새 미용실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는 기어이 찾아냈다.
며칠을 지켜보았다. 손님은 많은지, 시설은 양호한지, 친절한지. 손님은 많은 것 같았지만 시설은 웬만한 동네 미용실이 다 그러하듯 좁아터진 공간 안에 온갖 화초들이 정글처럼 자라고 있었다. 미용실 사장님이 나이가 좀 지긋해 보이는 게 흠이긴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항상 손님이 많다는 것은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한 거니까, 라는 안일한 결론을 내리고 더 고민할 것 없이 그 집으로 정해버렸다.
삐거억-, 문을 열고 들어가니 파마를 말고 있는 사장님과 대기석이랄 수도 없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손님 두어 명의 시선이 모두 나를 향했다.
“어서 와용-. 뭐, 빠마하시게?”
“아뇨. 염색 좀 하려고….”
“응. 우리 집 빠마도 잘하지만 염색도 잘해-. 근데 오늘은 예약이 다 찼어용-.”
“내일 오후 네 시는 가능할까요?”
“그럼 그럼. 내일 네 시? 알았어용-.”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호기롭게 내일을 예약하고 돌아서는데 기다리는 손님 중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어 미용사에게 항의하듯 말했다.
“내일 네 시에 경자네 빠마한다고 하지 않았어?”
“아-, 그러네.”
미용실 사장님은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걱정 말아용-. 기술자가 한 명 더 있으니깡-.”
나는 그 때 됐다고 말했어야 했다. 말끝마다 콧소리를 섞는 그 사장님을 믿지 말고 서둘러 다른 곳을 알아봤어야 했다.
다음 날 그 곳을 찾았을 때 역시나 사장님은 경자네로 보이는 여자의 머리를 말고 있었다. 또 역시나 대기 손님은 두 명이 있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에 아차 싶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어제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대기 손님이 아니라 사장님 친구들. 며칠을 지켜봤으면서도 그들이 늘 드나드는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진정 내 눈은 삐꾸였던 것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했던가. 나는 그 때라도 도망쳐 나왔어야 했다. 얼마나 내 안에서 치열하게 나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는지, 내 머릿속을 읽지 못한 사장님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어제 말한 그 기술자를 불러냈다.
“얼른 와. 응. 응. 바뻐. 손님 기다려, 빨리 와. 쪼금만 기다려용-. 빨리 오라고 했으니까 금방 올 거양-.”
나는 그 순간 그렇게 도망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를 잃었다.
십 분쯤 기다렸을까. 오래되어 낡은 문이 역시나 또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리자 연세 좀 잡수신 듯한 남자 어르신이 등장했다. 자다 일어났는지 머리는 까치집이 몇 채나 지어져 있고, 배는 곧 애기가 나온대도 믿을 만큼 불렀으며, 그 배를 가린 것은 메리야쓰 한 장이 전부였다. 거기다 체크무늬 칠부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직직 끌고 나타난 어르신은 뛰어 온 건지 아니면 부른 배 때문에 걷기만 해도 숨이 찬 건지 모르지만 쌔액쌔액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이 분이야?”
남자 어르신이 나를 가리키며 묻자,
“여보 왔어? 응. 저기 다 섞어 놨으니까 그걸로 하면 돼.”
헉. 말하던 기술자가 여보였어요? 기술자라면서요. 저기, 이봐요? 나는 이 여보 기술자 싫은데. 한 시간이 아니라 두 시간이라도 기다려 줄 수 있으니 사장님이 직접 해주면 안 될까요? 흰 머리 검은 머리 구분도 안 될 거 같은데, 이러다가 내 머리통이 숱 검댕이 마냥 온통 까매질 거 같은데, 그냥 직접 해주시면 안 될까요?
내 입안에서만 부르짖는 아우성을 듣지 못한 여보 기술자는 마냥 태연하게 내 머리카락을 들추며 상태를 살폈다. 그 와중에 대기 손님을 가장한 사장님 친구가 한 마디 보탰다.
“아유-, 진짜배기 기술자 납셨네-.”
포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포기밖에 없었다. 소심한 나는 또 그렇게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도 잃고 말았다.
응? 뭐지? 한참이나 질끈 감겼던 내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여보 기술자의 손길이 의외로 섬세한 이유였다. 설마, 하며 거울을 통해 보니 자못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붓질을 하고 있었다. 포기하고 나니 마음도 편했거니와 제법 정성을 다하는 듯 보여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 됐어. 뭘 더 바랄 것이냐.
어떻게 염색을 마치고 샴푸를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염색이 잘 나왔다고 웃으며 나오긴 했지만 다시는 그 집 근처도 가지 않기로 다짐한 순간만은 확실하게 기억한다. 그것이 집에 돌아와 밝은 조명 아래서 확인하니 군데군데 있는 하얀 머리카락을 확인했을 때라는 것을. 정성을 다해줬으니 그걸로 됐지, 뭐.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만족하려 해도 꽤 오랫동안 화가 가시지 않았다.
모시 고르다 베 고른다더니, 고르고 고른 것이 하필 그 곳이다. 이제는 염색할 때가 됐나, 싶으면 눈에 띄는 아무 미용실에나 들어가려 한다. 고민해봤자 머리만 아프고, 성격 까칠하다는 말만 듣기 일쑤다. 그러니 무엇이든 쓸데없는 고민일랑 오래 하지 말고 부딪쳐 보고 겪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