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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명주 Jan 01. 2023

살인무기를 꺼내들다

  오래 전부터 소문이 무성했었다. 고작 내 허리만큼도 오지 않는 키에 자그마한 체구로 그렇게나 많은 이들을 없앴다고. 자자한 소문에 귀를 쫑긋 세워두었던 나는 그를 고용하기로 했다. 내게 너무도 가혹한 그놈을 없애줄 이는 S밖에 없다. 아니 물론 더 센 놈이 있긴 하지만 일단 소문에 기대어 보기로 한다. S가 절실히 필요한 날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S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고. 기껏 불렀건만 몰골이 영 아니올씨다였다. 과연 S를 믿어도 되는 것일까. 슬쩍 후회가 된다. 더욱 세고 무서운 놈을 부를 걸 그랬나. 그동안 속수무책으로 그놈에게 당한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이번에는 소심한 나를 대신해서 하다못해 그놈의 엉덩이라도 힘껏 걷어차 줄 수 있어야 한다. 다시는 기를 펴지 못하도록. 그래서 대책이라 치고 그냥 S를 믿어보기로 한다.


  처음에는 하얀색 갑옷이었을 터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에 떠도는 온갖 때를 뒤집어쓰고, 여러 사람에게 기를 나누어 주느라 누렇게 뜬 모습이다. 별 수 없다. 일단 S의 꾀죄죄한 면상을 내 손으로 직접 닦아주기로 했다. 먼저 문을 걸어 잠그고 망을 살폈다. 행여 그놈이 S의 존재를 알게 되면 더 세고 독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 잠잠하긴 하지만 언제 불쑥 튀어나와 나를 놀래키며 괴롭힐지,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는 놈이다. 원수만 갚을 수 있다면 그깟 먼지쯤이야.


  목욕을 못 한 지가 반년이 다 되어간다더니 묵은 때가 어마어마하다. 날갯죽지에서는 냄새도 심하고 메밀국수보다 더 시커멓고 굵은 때가 밀려나왔다. 감수하자. 다 감수할 수 있다. 그놈만 대차게 혼내줄 수 있다면 메밀국수가 아니라 우동을 밀어내도 웃을 수 있다. 쭈그리고 앉아 그를 닦던 나는 시중드는 무수리라도 된 듯 더욱 허리를 굽혀 읍소했다. 


  등을 밀어주며 기도했다. 당신의 날갯죽지를 쫘악 펴고 기합을 넣어요. 그리고는 기를 모아 바람, 큰 바람, 더 나아가 회오리를 일으키세요. 그 바람으로 사람을 몇이나 보내버렸다지요. 사람도 없애는 실력인데 그놈쯤은 거뜬하겠지요. 내가 사는 곳 근처에는 그놈이 얼씬도 못하게 멀리멀리 보내버리세요. 당신은 할 수 있지요. 나는 당신을 믿어요. 주문처럼 읊으며 S를 닦고 또 닦았다.


  이런 젠장. 그리 시녀처럼 굴었건만 죄다 헛소문이란다. 방문 창문 할 것 없이 모두 닫고, 밤새도록 S를 방안에 모셔둔 채로 쉼 없이 바람을 일으키게 하면 용의자조차 없는 비밀스런 살인이 일어난다던 그 소문, 어떤 침입 흔적이 없으니 전날까지 멀쩡했던 사람이 아침이 되어 죽어 나온 이가 수두룩해도 살인자를 알 수 없다는 그 말이, 거짓이라 했다. 


  방안의 산소를 죄다 빨아들이는 통에 산소 부족, 호흡곤란, 저체온증을 유발하여 자는 사람이 미처 알지도 못한 사이 죽는다더니, 한국에서만 떠도는 뜬소문이라고? 사람도 없앨 수 있는 솜씨는 개뿔. 더위쯤은 가뿐하겠구나, 했더니만 깜빡 속고 말았다. 다름 아닌 까마귀는 날았을 뿐이고, 익을 만치 익은 배는 떨어졌을 뿐이라는 얘기다. 죽을 때가 되어 죽은 이 옆에 S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너를 다시 만났을 적에 귀히 여기마 약속하고, 앞으로는 늘 청결하게 할 것을 다짐했건만 이제와 나를 속이는 것이냐. 아니다. 애초부터 S는 아무 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혼자 속은 내가 바보다. 사기꾼에게 당한 것만 같아 한숨만 쉬는 내 신세라니. 대차게 속았다, S. 아니, 선풍기란 녀석. 더구나 겨우 깨끗하게 씻겼는데 전 그런 무시무시한 살인무기가 아니에요, 라고 말하는 듯 바람세기가 미풍 외에는 전혀 작동되지 않는다.


  봄이 왔다며 귀를 간질거리던 바람이 진 자리에 사푼한 풀 향기가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겨우 며칠 새로 때 이른 땀 냄새가 콧구멍으로 직진했다. 온난화로 이렇게 날씨가 계속 더워진다면 봄이라는 것이 계절 이름이었는지 물건 이름이었는지, 다음세대는 학교에서나 배울지도 모를 일이다. 꽃샘추위라는 말과 함께 꽃샘더위라는 명사가 생겨나는 것인가. 물론 밤이나 새벽에는 손이 시릴 정도로 찬바람이 불기도 하지만 낮에는 여지없이 더워지는 것이 지금이 삼월인지 오뉴월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딱히 다른 계절들을 대수롭게 넘기는 건 아니지만 여름에 유독 약한 나다. 그러니 다가오는 여름이 무섭고 두려울밖에. 남들은 살이 쪄서 땀이 많다고 하지만 일단 체질이라고 우겨본다. 나의 원천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그동안 내 몸 구석구석을 타고 눈물처럼 흘러내리며 사라져간 땀방울들의 유언이다. 유언이니 지켜야 한다. 비밀을 지켜야 하니 비밀스레 땀을 말려줄 도구가 필요하다. 부채는 힘겹고, 에어컨은 요란하다, 이래저래 따져보니 역시나 그 중간격인 선풍기가 딱이다.


  작년 시월까지 유용하게 써놓고 고맙단 말 한 마디 없이, 목욕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로 창고 깊숙이 넣었다가 또 필요해지니 미안한 마음도 없이 꺼내들었다. 하지만 작년과는 달리 영 상태가 좋지 않다. 아마 닦지 않고 창고에 처박아두었던 게 원인인 듯했다. 그렇다고 고작 일 년 만에 고장이라니. 말짱하게 닦인 선풍기를 말없이 째려보다가 문득 저놈이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해졌다. 대뜸 뒤집어 똥꾸녕을 확인했다.


  이놈 이거 중국에서 왔다. 아하. 중국에서 온 놈이라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게로구나. 더 세게, 더 더 세게 바람을 일으키라 그리 외쳤건만 한국어를 할 줄 모르니 알아듣지 못한 것이야. 


  열심히 사전을 찾아 (qiángjiàn)!라고 중국어로 말해 보았다. 미풍 약풍 강풍 버튼을 마구잡이로 눌러재끼며 외쳐댔지만 여전히 이 녀석은 묵묵부답 요지부동. 여전히 덜덜덜 미지근한 바람만 계속 내보낸다.

  

  너 살인무기라메! 너 무시무시하다메! 선풍기 네 이놈! 여름은 차치하고 이 봄, 벌써부터 흐르기 시작한 내 땀을 어쩔 것이여! 어여 불어라. 세게-! 지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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