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달수 Nov 07. 2020

목포에서 온 편지 2. 텅 빈 자유

- <핀치>에서 연재했던 글을 옮기고 수정해 적습니다.

원문 보기 : https://thepin.ch/think/pzGze/letters-from-mokpo-2

일러스트 : 이민 https://www.instagram.com/eomju_/


 잘 지냈지? 날씨가 꽤 춥다. 추우니까 목포에 처음 온 초여름 날 이야기를 해줄게.


 2017년 5월 13일은 드디어 혈연도 지연도 없는 목포로 내려온 날이야. 어떤 나라든 독립기념일을 크게 기뻐하고 매년 기념하듯 나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기념일이라 내 생일을 빼고 유일하게 - 미안, 사실 네 생일도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이 알려주지 않으면 기억을 못 하는 나를 용서해 - 내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이지.


 목포로 오는 게 물 흐르듯 순탄하진 않았어. 난 아르바이트나 인턴 따위의 일로 번 돈을 생존을 위한 정신과 상담이나 내 ‘기분'을 채우는 경험과 물건들 혹은 ‘시발비용'으로 소비했기 때문에 모아둔 돈이 거의 없었어. 특히 난 먹을 것에 돈 쓰는데 환장했잖아. 무슨 먹방 찍는 것 마냥. 우리 약속 잡을 때 훠궈데이 엽떡데이도 맨날 있었고, 자취하는 친구 집 가서 성인돼지파티도 하면서 웃기도 많이 웃었는데. 그립다 그 시절. 이제는 위랑 장 다 망가져서 옛날처럼 못 먹는 거 알지? 슬프다 이 나이. 그리고 기독교 85% 유교 15% 탈무드 5% 도합 105%로 구성된 우리 엄마 아빤 내가 겪고 있는 우울증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지. 의식주 다 부족하지 않게 채워주는데 얘는 왜 이러나.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너는 왜 이렇게 노력과 의지가 없니! 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았으니까.

 고작 여행만 두 번 다녀온 목포로 살러 간다는 내 결정에 처음엔 농담인 줄 알고 ‘그래 가서 살아봐~ 독립이 쉬운 줄 알아 참!’ 하던 부모님은 내가 진심인 걸 알게 된 후엔 꽤 오래 이 결정을 반대하다가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봐!’ 라며 8개월 만에 목포행을 허락했어. 마지막까지 엄마는 엄마 고향인 강릉엔 내가 좋아하는 바다도 있고 서울과도 가까우니 거기서 살라고 설득하시다가 ‘강릉엔 이모들이 있지 않느냐! 혈연도 지연도 없어서 목포에 간다!’는 내 말에 결국은 포기하셨지 뭐. 대신 [모든 것은 내가 알아서 하고 모든 책임도 내가 질 것]이라는 옵션이 붙었지만 말이야. 사실 가족들은 내가 서울에 곧 도로 올라올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사는 게 너무 춥고 힘들어요, 엄마 아빠랑 살면서 정신 차리고 남들 다 하는 것처럼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할게요!’하고 항복할 줄 알았으니까 허락했을 거야. 심지어 10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내 용돈 내가 벌어 썼으니 나도 좀 용돈 받아보자는 말도 안 되는 주장까지 받아들여졌기에 목포에서 일을 구하기 전까지 생활비 명목으로 엄마 아빠에게 용돈으로 한 달에 25만 원을 받기로 했어. 일주일에 25만 원을 쓴 적은 있어도 한 달에 25만 원이란 액수는 너무 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 수 있나.


 목포에서 살 집을 구하는 건 사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어. 처음 목포 부동산 앱이니 네이버 부동산이니 보는데 진짜 하나도 모르겠는 거야. 어디에 뭐가 있고, 어떤 동네가 안전한지, 아니면 조용한지 전혀 감이 안 잡히더라고. 유일하게 있는 목포 친구인 A가 알려줘도 더 알쏭달쏭한 거야. 심지어 부동산 앱에는 매물도 없었어. 다 내 예산보다 더 비싸고.. 집을 구하려고 하니까 상상의 동물 같던 독립이 현실이 되자마자 서서히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것 같더라고. 과연 내가 혼자 살 수 있을까? 서울 집에서 마음은 불편해도 몸이라도 편하게 살까? 지금이라도 그냥 목포 안 간다고 말할까? 같은 수많은 고민을 했어. 그렇지만 여자 대장부가 한 번 내뱉은 말에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어? 내가 돈은 없어도 가오가 있지. 일단 목포로 하루 내려가서 발품을 팔기로 했어. A가 목포는 발품을 팔아야 매물을 구할 수 있다는 현지인 팁을 주었으니까.

 꽤 쌀쌀한 4월에 기차를 타고 목포에 도착했어. 서울에서 고작 2시간 반 기차를 타고 왔을 뿐인데 서울과 정반대인 도시. 연세대 입구 버스정류장 인파 정도의 사람들을 헤치고 A를 만나 목포역 부근을 부지런히 돌아다녔어. 내 공간을 구한다는 생각을 하니 즐겁더라고. [임대문의] 혹은 [월세] [사글세]라고 붙어있는 종이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면서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임대하신다는 벽보 보고 전화드렸는데요.”라는 내 목소리가 너무 서울 사람이라며 대신 전화해주던 A 덕분에 화끈한 가격에 적절한 위치의 집 후보가 두 곳으로 추려졌어. 집 알아볼 때 체크해야 할 리스트와 A의 현지인 팁, 그리고 동네의 분위기를 따져 본 뒤 결정한 곳은 해가 잘 드는 큰 창이 있는 안방과, 하늘이 그림처럼 보이는 작은 창이 있는 작은방, 주방 및 거실, 화장실, 옥상이 있는 18평 남짓 되는 집이었어.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갖게 된 양지바르고 넉넉한 크기와 구역이 나뉜 공간. 발품을 딱 하루 팔았는데, 찾아냈지.


 난 여전히 이 곳에 살고 있어. 수압이 낮아서 온수로 샤워를 하려고 하면 지하 암반수를 누군가가 열심히 펌프질을 해서 그 물을 보글보글 끓인 뒤 그제야 우리 집으로 귀하게 온수가 와주신다고 상상하며 샤워를 하고, 겨울엔 외풍이 심해 미친 듯이 추워도 기름보일러라 난방을 할 경제적 여유가 없어 침대에 따수미 텐트를 치고 전기담요 고온에 파쉬 물주머니를 껴안고 살아야 해도 마음이 복잡하고 불편한 것보다는 나아. 다행히 집주인 부부는 인상도 좋고 욕심도 없으셔서 보증금 없이 월세 25만 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살게 되었어. 물론 공과금은 별도지만 말이야. 집을 구하고 나니 ‘나, 목포에 가서도 잘 살겠는데 정말?’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붙었지.

 당장 필요한 짐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 아버지 승용차에 자질구레하고 필요한 짐들만 가지고 내려오기로 했어. 모아둔 돈도 없으니 제일 저렴하고 쉽게 이사를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고. 해도 안 뜬 새벽에 바지런히 서울에서 목포로 달려가는 차 안은 내 짐들로 가득 차 비좁고 답답했어. 서울의 고민들과 걱정거리를 가지고 가는 기분이었지 뭐. 무거운 두 다리로 뒤에서 차가 오지 않나 앞에 사람이랑 부딪히지 말아야지 신경 쓰며 걷던 집 앞 골목, 사람들로 가득 차 내리는 문으로 타야 하던 버스로 가던 도로, 좋아하던 길고양이가 있던 언덕, 맛있는 빵을 파는 빵집 등 좋고 싫은 추억이 뒤덮인 서울을 떠났어. ‘아빠 차'에 타면 들어야 하는 성가대 찬송가 음악과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귓등으로 들으면서.


 햇빛이 화창한 2017년 5월 13일, 드디어 도착한 목포의 내 집 - 내 집이라니 정말 듣기 좋지 않아?- 에 엄마 아빠는 오늘 안에 보성 차 밭을 구경하고 가야 한다며 짐을 집으로 옮겨주시고, 대형마트에서 간단한 생필품을 사 주신 뒤에 부랴부랴 목포 구경도 안 하시고 떠나셨어. 참 우리 엄마 아빠답게.


 침대도, 식탁도 없는 종이 박스만 가득 한 독립은 드라마나 영화처럼 풍요롭지 않았지만 즐거웠어. 먼지가 내려앉은 창 틀을 닦고, 오랫동안 비워져 있었던 바닥을 쓸고, 종이 박스를 뜯고, ‘혼자살이'를 축하해주러 온 A와 함께 이케아에서 주문한 것 들을 조립하고, A와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헤어진 후 들어온 집은 텅 비어있어서 좋았어.


그저 텅 비어있어서.


 나는 이 텅 비어있는 공간이 필요해서 목포에 내려왔을지도 몰라.


 마음이든 공간이든 텅 비어있을 땐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좋아하는 술을 마셔줘. 늘 가득 찰 필요는 없잖아. ‘텅 빈 자유'의 맛이 궁금하면 이렇게 해서 먹어봐.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맛이지.


다음에는 가게를 열게 된 이야기를 해 줄게! 그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 안녕.


<텅 빈 자유의 맛, 베지밀 B와 제임슨 위스키>
일러스트 : 이민 https://www.instagram.com/eomju_/

베지밀 B

제임슨 위스키



1) 여름에는 시원한 냉장고에서 갓 꺼낸 팩에 든 베지밀 B를, 겨울에는 따뜻한 온장고에서 갓 꺼낸 유리병에 든 베지밀 B를 편의점에서 구입한다. (단 맛을 선호하지 않을 경우엔 매일 두유를 추천합니다.)
2) 주류 코너에 있는 포켓 사이즈 제임슨 위스키를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구입한다.
3) 텅 빈 공간에서 (텅 빈 공간이 없다면) 텅 빈 마음가짐으로 베지밀을 한 입 마시고 곧바로 제임슨 위스키를 한 입 마신다. 제임슨 위스키를 먼저 마셔도, 둘을 원하는 비율로 섞어 마셔도 좋다. 씹지 않아도 좋은 ‘텅 빈 자유의 맛'!

작가의 이전글 시작은 뭘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