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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뽈뽈러 Mar 15. 2023

책 이야기 33. 줬으면 그만이지

# 김주완 지음


작년 말쯤인가, 지역방송 시간에 MBC경남에서 제작한 한 프로그램의 예고 방송이 계속 나왔습니다.


'어른 김장하'란 제목인데, 화면에는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걸어가는 노인의 뒷모습과 옆모습을 비추면서.


뭐지 뭐지 하면서 시선을 끌다가 어느 날 유튜브를 통해 보게 됐는데, 실로 충격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분이 있는지, 정말로 그렇게 살아온 것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습니다.


전율과 감동 끝에 자세한 사항이 더 궁금하여 곧바로 책을 사서 읽게 되었습니다.




'줬으면 그만이지'.


이 책은 경남 진주시에서 오랜 기간 '남성당한약방'을 운영하면서 지역사회 곳곳에, 교육, 언론, 문화, 역사, 노동, 여성, 시민사회 등 다방면으로 자신의 부를 아낌없이, 또한 아무런 간섭 없이 지원하고 사회에 환원한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자신의 선행이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어쩌면 그래서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책 제목이 더없이 부합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저 이 분의 사회 환원과 관련해선 대표적인 게, 바로 진주시에 있는 명신고등학교입니다.


명신고교는 저도 익히 들었던 이름입니다.


마산에서 학교를 다니던 고교시절, 수능 모의고사를 치르면 항상 비교대상인 학교가 바로 진주에 있는 명신고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시절엔 그저 공부를 꽤 시키고, 또 잘하는 학생들이 모여있는 학교라는 인식만 있었습니다.


그런 학교가 이 책과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남다른 의미를 지닌 학교라는 걸 새삼 알게 되었고, 때문에 명신고 출신 인사를 만나면 혹시 방송이나 책을 봤냐면서 너무나도 훌륭한 분이 설립한 학교라고 제가 더 흥분하게 됩니다.


참고로 학교 명칭은 김장하 선생이 제시한 '明德新民(명덕신민)'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김장하 선생은 1983년 여름, 만 39세가 되던 해에 오로지 본인의 재산만으로 이 학교를 짓기 시작했는데, 1984년에 개교한 이후 1991년 여름에 이르러 갑자기 국가에 헌납합니다.


설립 초기 본인 스스로 공언한 사회 환원을 8년 만에 실행에 옮긴 것인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더욱 어마어마한 액수인 100억대의 재산이 투영된 학교를 왜 아무런 조건 없이 헌납하는지 다들 의아해했습니다.


당시 새롭게 재출범한 경남도의회 회의록에도 그런 의구심을 갖는 내용이 나오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옛 시절이라 선의를 선의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더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저 역시도 이 분의 삶을 보면서 충격을 느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듯합니다.


이렇듯 이 책은 명신고교 국가 헌납 사례를 중심으로 김장하 선생의 삶과 철학, 그리고 여러 가지 사회 환원 스토리를 계속해서 찾아내고 풀어나갑니다.


개인과 기관 구분 없이 펼친 장학사업, 학교 설립과 국가 헌납, 재정과 권력으로부터의 지역 독립언론을 위한 지원, 연극 및 문학 등 지역문화활동 지원,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진주시 태동 형평운동기념사업 지원, 가정폭력피해 여성 및 여성권익 신장 활동 지원, 지리산 환경보전 등 지역환경보전 활동 지원에 이르기까지 정치영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분야에서 김장하 선생의 아낌없는 지원이 이뤄졌음을 이 책은 보여줍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수백억 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김장하 선생 본인은 어느 것 하나 기록도 하지 않았고, 또 누군가에게 본인의 활동을 알리지도 않았을뿐더러, 누군가가 알리려고 하는 것도 정색을 하며 극도로 꺼려했다는 점입니다.


즉, 지원은 하되 간섭은 일절 하지 않는 모습이었는데, 이런 점이 50여 년 이상 지속되면서도 변함없었다는 점에서 더 눈길을 끌었고, 이 때문에 김장하 선생의 행적이 알려졌을 때 사람들에게 더 센세이셔널하게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


기자 출신인 저자가 지금껏 누군가를 취재하면서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라도 더 기억을 더듬어 얘기를 해주고 싶어 한 경우는 처음이었다고 한 대목에서, 생불, 살아있는 예수 등의 표현이 왜 자연스럽게 회자되는지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향살이가 어느덧 2년 반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로 인해 이제는 외지살이 보다 고향살이가 인생의 절반을 다시 넘기게 되었으나, 머리 굵은 시절의 외지 생활 20여 년은 이방인적 이질감을 아직까지는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하게 하는 듯합니다.


한데, 업무상 읽게 되는 경남의 여러 지역언론 등의 영향 덕분인지 이제는 점점 지역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확장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한편, 지역 또는 지방이라는 표현과 함께 요즘에는 '로컬'이라는 표현이 자주 거론되는 것 같습니다.


외래어라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같은 의미라도 조금 다른 뉘앙스를 주는 것 같은데, 그간 지역 내지 지방이라는 표현이 '처한 현실' 내지 '악화하는 실상'과 같은 느낌을 준다면, 로컬은 '새로운 방향성' 내지 '개선 방안' 같은 의미를 나타낼 때 자주 언급되는 듯한 느낌입니다.


아무튼 이런 로컬에 대한 제 시선이 이제는 로컬, 특히 제 고향이 속한 경남의 인물과 역사, 사회, 경제, 문화 등으로 점점 이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김장하 선생 이야기는 마음 한 귀퉁이를 새롭게 정립해 준 촉매제였던 것 같습니다.


'아픈 사람 상대로 돈을 벌었기에 그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똥은 쌓아두면 구린 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된다, 돈도 이와 같다',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는 것이니, 특별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고 죄송할 필요가 없다'...... 이 분의 철학과 말씀은 다시금 우리 사회에 선한 울림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분의 고향인 사천시와 활동 중심지였던 진주시는 저 역시도 어린 시절 외가가 있던 곳이라 자주 방문했던 곳입니다.


김장하 선생이 사천시에서 한약방을 처음 열었던 곳부터 진주시에서 터를 잡고 또 지원하고 활동했던 곳까지 그분의 행적을 기억을 더듬으면서 지리를 짚어가는 재미도 개인적으로 좋았습니다.


오래간만에 좋은 분을 담은 좋은 책이었습니다.



2023.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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