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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페네로 Nov 25. 2020

잔잔바리로 사는 것

[혜영 씨에게] 5년을 주기로 바뀌는 커리어

'롤모델 보다 레퍼런스' 잘 읽고 있어.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레퍼런스로 여성들의 연결을 꿈꾸는 혜영 씨를 만나며 삶과 일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어. 그리고 혜영 씨가 이야기 한 삶과 일의 방식 'Life = Work, Life vs Work, or Work in Life'을 통해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어.




Life = Work

20대, 미혼, 한국


결혼 전에는 나의 일이 곧 나의 삶이었던 듯 해. 혜영 씨처럼. 회사를 가고 일을 하는 게 좋았어. 내게 일을 빼면 별 남는 게 없었다 할 만큼 누구를 만나던 무엇을 하던 글로벌 기업 마케팅팀 전략 기획자의 아이덴티티로 매일을 살았어. 그만큼 열심히 제대로 일을 했다는 이야기도 되겠지. 일을 통해 성장하고 싶었고, 다행히 성과도 보람도 있었어. 줄 잘 선 잘난 남자들만 한다는 발탁 승진, 임 과장은 임원까지도 할 수 있을 거란 당시 상무님의 이야기를 뒤로 한 채 결혼과 함께 퇴사, 그리고 미국으로 이주. 남편이 미국에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 이때가 대학원 졸업 후 재 입사 5년 차. 경력 8년, 글로벌 기업 마케터로서의 커리어는 이렇게 끝이 났어.


Life vs Work 

30대, 결혼, 출산과 육아, 미국-일본-한국


결혼 후엔 항상 4, 5년을 주기로 새로운 곳에 있었나 봐. 미국에 와 작은 리서치 회사에 입사했어. 하는 일이 전과 달랐어. 대기업에서 전사, 142개 법인의 브랜드 전략을 기획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결과물을 만들어내던 내가 이 회사에서 하는 리서치 업무는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이런 상황에서 내 일이 곧 내 삶이 될 수 없었기에 일을 통해 형성된 정체성의 분열을 겪을 수밖에. 자존감은 끝없이 떨어졌어. 회사 내, 이민 동양 여성이란 마이너리티로써의 스테이터스도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어. 아쉬운 것은 많고, 비빌 언덕은 없고. 게다가 때 맞춰 한 임신과 출산.


이런 상황에서 나는 육아와 일을 저울질 해 가며 커리어를 유지했고,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냈어. 이런 시간을 보내며 조금씩, 천천히 나의 일을 나의 삶에서 분리하는 연습을 했었던 듯 해.


그러다 일본을 거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고, 한국에서 경단녀, 취준생, 워킹맘, 학생으로 5년을 지낸 후, 다시 미국으로 오게 돼. 남편의 직장 때문 이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녀야 했고, 상황에 맞춰 나의 커리어를 바꿔야만 했어.


Work in Life 

40대, 다시 미국


이제 미국에서 초등학교 ESL 교사로 일 한 지 4년째. 한국에서 공부한 테솔 덕에 미국의 공립 초등학교에 자리잡게 되었어.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학교에는 저소득층 이민가정의 아이들이 대부분이야. 아이들에게 부족한 게 많아 해야 할 일이 많지만, 힘든 것보단 아이들과 같이 배우며 성장한다고 느낄 때가 많아 보람 있고 의미 있어. 나의 가정을 충분히 돌보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지. 대학원도 다시 다니고 있고. 예전에 마케팅을 할 때 기획 일을 (그땐 브랜드 전략 기획이지만) 워낙 좋아했어 그런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커리큘럼 플래닝에 관심이 생겨서 말이야. 배운 게 도둑질이라더니...




잔잔바리로 사는 삶 


이렇게 난 5년마다 커리어를 바꿔가며 잔잔바리로 살게 되었는데, 이게 엄마로, 아내로, 여성으로 나 자신을 지키며, 내가 선택한 삶을 사는 방식이야. 내가 살고 있는 잔잔바리 삶은 나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최선의 솔루션을 선택하며, 나를 찾아가는 삶을 살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언제라도 바뀔 수 있는 불안한 삶을 영위하는 용기를 갖고 유연한 삶을 살아내야 .


하나의 커리어로 연결된 전문 분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회사에서 성공을 하고 고액 연봉을 받고 사는 것이 멋있다고 생각했고 (여전히 그런 여성들을 보면 대단하고 멋있어 보이긴 해), 나도 그러리라 했는데, 살아보니 이렇게 잔잔바리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가정을 돌보며 아이를 키우는 여성으로서의 삶도 나의 삶이고 잘하고 싶었어. 가정과 일, 두 가지 모두를 잘 충족시킬 수 있는 해결책이 필요했어. 그렇다면 피 터지게 치열한 전쟁터, 내가 사랑해 마지않던 그 회사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지. 가정과 아이가 있는 여성이라는 현실과 타협했다고 할 수도 있겠는데 그건 나의 선택이었고, 이 선택에 한 번도 후회해 본 적 없어. 누군가, 무언가를 위해 내 커리어를 희생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어. 내가 엄마이기 때문에 회사를 나와야 했지만, 또 엄마이기 때문에 과감히 나올 수 있었고, 내가 아내이기 때문에 남편을 따라 이 나라 저 나라로 돌아다녀야 했지만, 또 가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새로운 시도를 하며 커리어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일이 삶의 전부가 될 수는 없잖아. 여러 역할을 하며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라면, 한 가정의 아내, 엄마, 딸로서도 살아내야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면, 가정과 일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내가 원하는 걸 찾아가며 조화로이 밸런스를 맞춰가는 삶을 살아야겠지. 현실과 타협하더라도 (현실에 맞서 싸워도 되고, 꼭 싸워 이기지 않아도 ) 나는 나를 존중하고 나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면 된다고. 무엇이 '되는 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원하는 일을 해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냥 나의 자리에 맞는 삶의 방식으로, 나를 찾아가는 여정으로서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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