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일까? 작년 재작년? 언젠가에 우연하게 시선을 뺏는 사진 한 장을 보게 되었다. 눈이 펑펑 오는 길을 빨간 우산을 쓰고 걷는 누군가의 모습이었는데, 그 색감에 시선을 온통 뺏겨서는 사울 레이터를 검색해서 나오는 거의 모든 사진을 저장했다. 그렇게 사진이 수십 장이 쌓이고 나서 나는 그의 작품에 시선뿐 아니라 마음도 온통 빼앗겨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진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어도, 황금 분할이라던가 인물을 어느 축에 두고 어느 부분까지 잘라내야 한다거나 그런 것들을 대충은 알고 있다. 물론, 잘 몰라서 100장을 찍어주고도 혼나는 남친 분들도 있긴 하겠지만~ 몇 번 혼나다 보면 구도감을 대충 알게 될 거다.
그런데 사울 레이터의 사진은 수평이나 수직, 여백 같은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누가 사진의 주인공인지 모호한 작품도 있다. 거울이나 창문에 비친 모습이나, 빗물에 뿌옇게 된 유리창 너머의 피사체를 찍거나 원색적이고 약간 관음적이기도 하다.
예전에 한참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던 시기가 있었다. 뭐, 배운 적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마음 가는 대로 찍어댔다. 그 사진들이 어디에 저장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빗줄기가 타고 내려오는 창문 밖, 드라이브할 때 사이드 미러로 보이는 친구의 얼굴, 비나 해를 피하기 위해 내려진 차양 밖의 풍경, 번지고 흐릿한 어떤 것, 틈과 틈 사이의 사진들을 찍었었다. 물론, 내 사진은 아마추어도 못되지만, 피사체를 향한 감성과 피사체를 보는 시각이 조금은 닮은 것도 같다.
그의 사진이 알려지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80세가 넘어서야 각광을 받았다는데 진짜 사람일은 알 수가 없는 것 같다. 100세 인생이니 언제든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뜬구름 같은 말을 나는 또 이렇게 믿어보고 싶다.
전시는 1층부터 4층까지로 이루어져 있고, 4층은 옥상과 연결되어 있다. 날씨도 따뜻하고 해서 사진을 찍어보려 했는데 오랜만에 렌즈를 통해 보는 하늘과 나무들이 낯설고 뭘 어떻게 찍어야 할지 생각만 많아져서 찍지 못했다.
옥상에 빨간 우산도 구비되어 있는데, 나는 혼자 노는 것을 즐기고 불편함을 못 느끼는 사람인데 가끔 이럴 때 불편하다. 빨간 우산을 들고 있는 누군가를 찍어줬으면 얼마나 예뻤을까? 하긴, 요새 내 친구들은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부담스럽다며 사진 찍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어릴 땐 그렇게 찍어달라고 포즈를 취하곤 했는데, 네가 살아낸 흔적이 깊게 패여 지금 네 모습이 꽤 멋지다고 말해주어도 본인이 믿지 못하면 어쩔 수 없다.
전시 관람 후에 1층으로 다시 내려가서 굿즈를 샀어야 했는데... 다음 약속 장소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 잊고 말았다... 아, 왜 이렇게 나사가 하나 빠진 채로 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굿즈를 사는 기쁨을 잊다니... 굿즈로 어떤 사진들이 있었을지 너무 궁금하다.
전시장 갈 때도 길을 헤매고 약속 장소로 이동할 때도 길을 헤매고... 길치이기도 하지만 지도 앱이 뭔가 잘 못 된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나사가 빠진 것 같기도 하고, 힘든 하루였다. 그래도 좋아했던 작품을 생눈으로 보며 사진작가의 사진을 내가 다시 찍는 것이 신기하고 좋았다. 정말, 그의 사진을 최애 사진 볼 때 보다 훨씬 더 오래 샅샅이 본 것 같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이 영화 캐롤에 영감을 주었다는데 찜 목록에만 넣어놓고 손이 가지 않아 몇 년째 방치 중인 영화인데 조만간 관람해야겠다. 그리고, 날씨가 좋아지면 오랜만에 사진을 찍으러 동네를 어슬렁 거려볼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