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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노키옥 Nov 17. 2020

9. 전화위복

여러 번의 자해와 한 번의 자살 시도 끝에 난 결국 반강제적으로 한 대학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다. 요즘은 정신과라고 해서 무조건 폐쇄병동에 입원하는 것은 아니다. 보호자나 간병인이 24시간 같이 한다는 조건 하에 개방병동에 입원할 수 있었다. 남편은 직장을 다녀야 했고, 친정 엄마는 나의 어린 두 딸을 돌봐줘야 했기 때문에 나는 24시간 간병인을 썼다. 그분은 잠시도 내게 눈을 떼지 않으셨고, 화장실이나 샤워를 할 때에도 문 밖을 지켜고 서 계셨다. 심지어 새벽에 몰래 일어나 화장실을 가도 어느새 따라 나와 그 앞에 서 계셨다.


내가 입원한 병동은 6인실이었는데 나를 포함한 3명은 정신과, 나머지 3명은 이비인후과 쪽 환자였다. 어머니와 함께 있는 젊은 아가씨는 많아봐야 고작 23, 24살 정도로 밖에 안 보였는데 몸무게가 30킬로 대가 나갈 정도로 많이 야위어 이었다. 거식증으로 음식 섭취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또 한분은 어머니 벌 되는 아주머니 분이신데 그분은 나처럼 간병인을 썼다. 나는 아주머니와 매일 저녁 식사 후 운동을 했다. 병원 지하 1층에는 걸으면서 운동할 수 있는 좋은 공간이 있었다. 가운데 커다랗고 투명한 유리 기둥을 두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걷기를 무한 반복했다. 우리는 저마다 링거가 걸린 거치대를 한 손으로 부여잡고 빠르게 걸었으며, 우리보다 두세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간병인 두 분이서 우리 뒤를 따라 걸었다. 원 기둥을 걷다 보면 가운데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리문 하나가 있었다. 아주머니와 나는 점점 속도를 내어 빠르게 걸었고, 간병인 두 분은 이야기꽃을 피 우시다 보면 항상 걸음이 늦어지셨다. 두세 걸음뿐이 차이 안 나던 거리가 반원 정도로 벌어지면 아주머니는 항상 나에게 속삭였다.


“아가씨, 지금이야. 우리 이 문 열고 나갈까?”


그러면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했다.


“한 바퀴만 더 돌고요.”


“그래.”


아주머니는 그럴 때마다 토를 달지 않고 내 말을 잘 따르셨다. 참 귀여운 분이셨다.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했고, 가족에 의해 강제적으로 입원한 게 이번이 두 번째라고 했다. 나는 애엄마라고 밝혔는데도 항상 나를 아가씨라고 부르셨다. 한 바퀴를 다 돌면 나는 저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도주를 해야 했다. 하지만 항상 상상에 그치고 말았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난 도주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늘 아주머니 혼자서만 탈출을 꿈꾸셨다. 반 바퀴쯤 멀어진 것을 깨달으면 간병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반대로 우릴 향해 걸었기 때문이다. 탈주 계획을 시도하기도 전에 간병인이 다가와 말했다.


“이제 올라가시죠.”


매번 같은 일이 반복됐다. 아주머니는 반 바퀴쯤 차이 났을 때 문 열고 나가자고 하셨고 나는 그럴 때마다 한 바퀴를 더 돌자고 했다. 그렇게 반 바퀴도 채 돌지 않으면 간병인들은 걷던 방향을 바꿔 우리에게 다가왔다. 매일 우리, 아니 아주머니의 탈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난 대학 졸업 후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나의 첫 휴가는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출산휴가가 처음이었다. 단 한 번도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하루를 온전히 보낸 적이 없었다. 병원에 입원해서 보니 하루가 긴 것 같기도 하면서 또 지나고 보면 너무도 짧았다. 나는 병실에 앉아 퍼즐을 맞추며 무료한 시간들을 보냈다. 남편은 이 삼일에 한 번씩 면회를 왔다. 올 때마다 손엔 늘 천 피스짜리 퍼즐이 들려 있었다. 남편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폭언과 폭력으로 번지고, 그 대상이 남편에게서 나 자신을 향할 때쯤 난 병원에 입원했다. 이곳에서는 단 한 번도 말썽을 피우지 않았다. 의사 말대로 원인인 남편과 잠시 떨어져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우습게도 난 그가 면회 올 날에 오지 않으면 그를 기다렸다. 보고 싶기도 했다.


같은 병동에 정신과 3인방은 늘 그대로였다. 이비인후과 3명은 빠르면 이틀, 느려도 5일 이내에 퇴원과 입원을 반복하며 많은 환자들이 오갔다. 그때마다 비슷한 패턴이 있었다. 이비인후과 사람들은 우리 3명의 사연을 궁금해했다. 젊은 아가씨는 늘 엄마와 24시간 함께 붙어 있었는데, 다른 가족(아빠나 오빠)이 면회 오면 홀로 남겨진 엄마는 병동에서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했다.


“우리 아이가 저렇게 되기 전엔 정말 예뻤거든요.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엄청 인기가 많았어요.”


“지금도 그래 보여요. 충분히 예뻐요. 살만 좀 찌면 괜찮을 텐데... 어쩌다가 저렇게 마른 거예요?”


“에휴.. 다 남자 잘못 만나서 그런 거죠. 내가 정말... 그 직장에 보내질 말았어야 했는데...”


젊은 여자의 어머니 말씀을 그대로 옮기자면 대학 졸업 후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사내연애를 했다고 했다. 남자 친구랑 헤어지고 나서 그 남자가 둘의 관계를 찍은 동영상과 야릇한 사진들을 사내 게시판에 올리고 회사 사람들 단체 톡 방에 올렸다는 것이다. 그 일로 충격을 받고 회사도 그만두고 식사도 거부한 체 결국 병원에 6달 넘게 입원 중이라고 했다. 병원에 와서도 몸무게가 계속 빠져서 걱정이라고 하셨다. 전 남자 친구를 상대로 소송도 진행 중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 남자는 일방적인 이별 통보에 술을 먹고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라며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고 했다. 남자의 부모님도 심심하면 찾아와서 거액의 합의금으로 소송 취하를 요구한다고 하셨다. 실제로 난 입원하면서 그 남자의 부모님을 두 번 뵈었다.


내가 입원한 날은 12월 23일.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한 번은 그 남자의 어머니가 명품백을 들고 모피코트를 입고 방문하셨다. 같이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앞날이 창창한 자신의 아들을 위해 한번만 봐달라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병실에는 들어오지도 않고 반대편 복도 휴게실에 계셨다. 추운 겨울날이었는데도 남자의 아버지는 얇은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고, 그마저도 더운지 소매를 걷어 올린 채로 있었다. 손목에는 몇 돈은 되어 보이는 금팔찌를 하고 계셨다. 딱 봐도 돈은 좀 있어 보이는 분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투에, 표정은 너무도 저급해 보였다. 자신의 아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용서 비는 게 먼저 아니었을까, 자신의 아들 앞날 걱정만 하고 계셨다. 그 아들로 인하여 한 여자의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졌는데도 말이다.   


나와 함께 매일 운동과 탈주(?)를 꿈꾸는 아주머니는 극심한 우울증에 자살 시도를 여러 번 하셨다고 했다. 아주 가끔 남편과 아들이 면회를 오지만 말투에서도 느껴졌다. 그들은 아내와 어머니의 아픔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듯했다.


“엄마, 집이 없어, 남편이 없어. 아니면 자식이 없어, 손주가 없기를 해. 도대체가 뭐가 부족해서 맨날 못 살겠다는 거야? 나 정말 엄마 이럴 때마다 피가 말라, 아주.”


“미안해, 아들... 00이(아마 손주 이름인 듯)는 잘 있지? 보고 싶네.”


 때마다 아주머니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미안해만 하셨다. 그분의 삶에 대해 다는   없어도 나는 조금은 이해할  있을  같았다. 그분이 살아온 세월,   세월 동안 얼마나 외로웠을지를... 나는 평소에 드라마를 즐겨 보지 않았는데  막장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지   같았다. 우리네 인생은 그보다 더한 막장이었던 것이다. 드라마 같은 일이  눈앞에 현실로 나타났다. 병실에 계신 분들은 나의 사연을 궁금해했다. 나도 많이 마르긴 했어도 거식증의 젊은 아가씨처럼 야윈 것도 아니고 아주머니처럼  기운 없어하며 죽고 싶다고 떠들어 대지도 않았다. 비교적 정신과에 입원한 환자 치고는 아주 멀쩡해 보였다.


아니, 나 스스로도 나는 여기에 입원할 사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잠시 아주 잠깐 어리석은 생각을 했을 뿐, 그게 이렇게 입원까지 할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의사 선생님 외에 그 누구에게도 나와 우리 부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 알았다. 매일 아침 회진을 도는 의사 선생님 때문에 그 비밀은 오래 지켜지지 않았다. 의사가 회진을 돌 때마다 내 자리에 커튼을 치고 이야기는 나누었지만 방음 효과는 전혀 없었다. 안 그래도 나에게 관심이 폭발한 사람들인데 사람들이 그 순간을, 기회를 놓칠 리가 만무했다.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 내 앞에서 굳이 티를 내지 않았을 뿐. 병실 안에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남편의 외도로 충격받아 입원했다는 것을...


이비인후과 역시 증세가 가벼운 사람부터, 증세가 심해 중환자실로 넘어가는 사람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그 안에서는 내가 제일 정상과 가까운 사람이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 사실이 새삼 감사하게 여겨졌다. 비록 잠시 정신줄은 놓았지만, 어느 정도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정화가 되었고 몸은 조금씩 나아져갔다. 신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고통만 준다고 하셨다. 처음엔 이건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아픔이라며 신을 원망하기도 했었지만, 그랬던 나의 생각도 조금씩 달라졌다.  


입원하는 동안 나는 어떠한 사실들을 깨닫기 시작했다. 깨달음은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이었지만 나중에 그것은 내가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데 아주 커다란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나는 내가 내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이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엄마에게도... 난 항상 나를 온전히 보여준 게 아니라, 내가 이러한 행동을 하면 당신이 이러한 대가를 주겠지. 그 대가가 내 기대에 못 미치면 실망을 했던 것이다.


‘내가 이렇게 헌신했는데 나를 헌신짝 취급해?’


‘내가 이 많은 걸 희생하고 아이들을 키웠는데 돌아오는 대가가 고작 이것뿐이야?’


내 사람이라서, 혹은 내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그들이 이래야만 한다는 생각은 나 스스로를 옭아매고 힘들게 할 뿐이었다. 그런 기대감에서 벗어나니 차츰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지금까지는 못 그래 왔지만 앞으로는 지금 이 순간부터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겠다고 깨달은 순간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거짓말 같게도 지금 당장 그가, 남편이 보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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