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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Mar 11. 2024

사전적 의미의 영웅이 아닌

『우리 시대의 영웅』 미하일 레르몬토프(오정미 옮김), 민음사

러시아 남서부, 동양과 서양의 경계로 일컬어진다는 카프카스(캅카스, 또는 코카서스로도 불린다) 지역을 한 여행자가 지나가고 있다. 그 길에서 그는 주변 지역에 관해 꽤나 아는 것이 많아 보이는 막심 막시므이치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를 만난다. 여행지에서 만난 스쳐가는 인연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그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그들은 과거, 막심이 만났던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고 그리고리 알렉산드로비치, 일명 페초린이 독자 곁으로 불러들여진다.


“나는 매우 기뻤다. 나는 나의 적들을 사랑한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는 아니지만. 그들은 나를 즐겁게 하며 내 피를 끓게 한다. 늘 경계하는 것, 의도를 간파하는 것, 음모를 방해하는 것, 속은 척하는 것, 그리고 갑자기 한방에 그 모든 잔꾀와 계획들의 거대하고 정교한 구조를 뒤엎어 버리는 것. 이 모든 것을 난 삶이라 부른다.”


여기서 잠시, 페초린에 대해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스물다섯 살가량의 젊은 장교로 언제 어디서나 권태와 불행을 찾아내는 인물이다. 능력도 가진 것도 어디 하나 빠지지 않건만 자신이 누리고 사는 것들에 만족하거나 감사하지 못하는, 말하자면 다분히 냉소적이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인물이 바로 페초린인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이 세상 모든 존재를, 결국엔 자신까지를 포함한 삶 전체를 적으로 대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런데 막심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 숨 쉬던 페초린이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막심 앞에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는 냉정한 모습으로 금세 떠나간다. 제 앞에 놓인 삶을 아득바득 부여잡을 이유 따위는 없다는 듯 자신의 내밀한 속내를 담은 일기장을 내팽개쳐 버린 채.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바람에 실려 보내온다. 오랜 친구로부터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에 상심을 한 막심은 페초린의 일기를 버리려 하지만 우리의 화자는 그것을 냉큼 주워 『우리 시대의 영웅』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한다.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페초린이라는 인물을 창조해 냈다는 미하일 레르몬토프(Mikhail Lermontov, 1814. 10. 15. ~ 1841. 7. 27.)는 소설 속 페초린이 그러했듯이 한때 친구였던 이와 결투를 했다. 그래서 결과는? 안타깝게도 미하일 레르몬토프는 결투에서 얻은 상처 때문에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나는 가끔, 삶은 어쩌면 고무로 만들어진 공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그것을 힘없이 굴리면 데구루루 구르다 얼마 못 가서 멈춰 버리지만 내가 그것을 힘차게 내던진다면 어딘가에 부딪친 후 다시 나에게도 되돌아오는 공처럼 내가 삶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삶도 나를 어떻게 다룰지를 결정하는 것은 아닐까. 페초린의 공허한 삶을 보며 나는 안타까운 고무공을 떠올린다.


“그리고 아마도, 내일 나는 죽을 것이다! 그럼 이 지상에서 나를 완전히 이해하는 존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나를 평가절하할 것이고 다른 이들은 실제의 나보다 나를 더 좋게 생각하겠지… 누군가는 그가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하겠지. 다른 사람들은 악당이라고 할 거고. 이런저런 얘기는 모두 사실이 아니리라. 이 모든 일을 생각해 볼 때, 과연 애써 산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렇지만 모두들 살아가는 것이다. 호기심 때문이다. 계속해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기대하면서… 우습고 성가신 일이다!”


*책에서 발췌한 부분은 파란 글씨로 표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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