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시절의 내가 학교 이외에 가장 자주 방문했던 장소는 책 대여점이었다. 멀리에서 보면 커다란 글씨로 딱 한 글자, ‘책’이라고 쓰인 간판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던 그 가게를 볼 때마다 오늘은 어떤 걸 빌려 읽을지 몹시 기대되어 얼마 남지 않은 나와 책 대여점 사이의 거리가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나는 당시를 풍미했던 유명 만화가 선생님들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며 집 근처 대여점에 있던 만화책이란 만화책은 죄다 빌려보곤 했었는데 그때 읽었던 수많은 작품 중에서 신일숙 선생님의 『아르미안의 네딸들』은 명작으로 뇌리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이 작품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기원전 5세기경 페르시아가 중동지역을 지배하던 시대, ‘아르미안’이라는 가상 왕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지금 기억으로는 이십 권가량이 될 정도로 분량부터 보통이 아닌 데다 등장인물도 많고 다루는 사건도 방대해 헷갈리지 않기 위해 등장인물 관계도를 공책에 직접 그리고 메모해 가면서까지 읽었던 기억이 난다.
오랜만에 『아르미안의 네딸들』을 떠올렸던 것은 후안 룰포(Juan Rulfo, 1917. 5. 16. ~ 1986. 1. 7.)의 소설 때문이다. 작가의 고국인 멕시코를 넘어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문학작품으로 평가받는다는 『뻬드로 빠라모』는 신일숙 작가의 대서사시가 그러했듯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이 작품을 접하기 전까지 소위 마술적 사실주의로 분류되는 문학작품들을 읽으며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해 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소설은 읽는 내내 내가 지금 무얼 읽고 있는 것인지 긴가민가하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기 싫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그럼 잠시,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전반부를 이끌어 가는 첫 번째 화자인 나(후안 쁘레시아도)는 어머니의 유언을 좇아 모친의 고향인 꼬말라에 도착한다. 생전 어머니의 기억 속 모습과는 다르게 메마르고 휑한 모습으로 나타난 꼬말라는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마을, 아니,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모호한 마을, 아니, 죽은 자가 산 자 행세를 하며 살아가는 마을이다. 후안은 그곳에서 자신의 아버지이자 한때 어머니의 남편이었던 뻬드로 빠라모를 찾아 헤매지만 이 신비한 동네에서 그를 맞이하는 이들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호한 꼬말라의 주민들뿐이다.
소설에는 후안이 꼬말라에서 보고 겪은 현재의 이야기와 그가 만난 꼬말라 사람들이 들려주는 과거의 이야기, 그리고 이제는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뻬드로 빠라모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후안의 어머니가 과거 또는 지금 이 순간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뒤죽박죽 섞여있다. 피곤하거나 졸린 상태에서 읽은 부분은 다음에 다시 책장을 펼쳤을 때 내가 정말 읽었던 내용인지 헷갈릴 정도로 정신이 없다. 하지만 살다 보면 내가 직접 겪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일이었으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당사자인 나조차도 가늠이 되지 않을 때가 많지 않은가. 비교적 평범한 시대에 태어나 평범하게 살아가는 나조차도 그러한데 멕시코 혁명(1910~1917)의 기운이 채 가시지도 않은 시기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끄리스떼라 반란을 거치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몇 년 사이로 줄줄이 잃은 후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후안 룰포에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 입장에서는 야속하게도 언제나 제 속도대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것을 조금이나마 (자신이 생각하기에) 더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뻬드로 빠라모들과 후안 쁘레시아도들을 비롯한 수많은 인간군상들. 나도 그들 중 하나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기에 큰 물살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오늘도 나는 누구이고 여긴 어딘지 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을 던지며 살아가고는 있지만 시간이 흐르고 흘러 현재가 과거가 되면 그제야 어렴풋이 내가 거쳐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안심이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