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하는가족 Mar 04. 2024

꽉 들어찬 한국 근현대 소설의 힘

『한국단편문학선 1』 김동인 외(이남호 엮음), 민음사

개학 첫날 아침이다. 나의 아이가 새로운 학년, 새로운 반으로 처음 등교하는 날. 오늘 아침 나는, 설렘 반 긴장 반으로 무장한 아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마음 같아서는 교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이제 제법 머리가 굵어진 아이는 친구와 교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늦으면 안 된다면서 엄마, 나 갈게, 하고는 휑하니 뛰어가 버렸다. 그래, 이제 혼자 갈 나이가 되었지. 내 손에 남아 있던 아이의 온기를 느끼며 문득 나는 아주 오래전, 내가 맞이했던 새 학기들을 떠올렸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새 학기를 기다리던 나의 마음을.


선생님은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교과서를 나누어 주곤 하셨다. 그런 날이면 안 그래도 묵직한 가방이 더 무거워지기는 했지만 나는 새 교과서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궁금한 마음에 그걸 무거운 줄도 모르고 고 오곤 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모든 과목이 다 궁금했던 것은 아니고 국어책이랑 문학책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나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곤 새 교과서를 받은 지 채 하루가 지나기 전에 그 안에 담긴 단편소설이며 시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다. 그리고 그럴 때면 결론이 궁금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읽고 싶은 마음과 아껴가며 천천히 읽고 싶은 마음이 서로 싸움을 벌였다. 이제 더 이상 표지까지 빳빳한 새 교과서를 받아볼 일 없어진 나에겐 참으로 그리운 추억.


아이의 개학을 맞이해 오늘 들춰본 책은 『한국단편문학선 1』이다. 1920년대 초, 김동인으로 대표되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것이 아마도 학창 시절 교과서를 통해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교과서를 읽다가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나면 나는 그 작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담긴 책을 찾아 소설 전체를 읽어보기도 했는데 그 시절 접했던 단편들, 가령,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같은 이야기를 통해 단편소설의 맛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심장을 관통하는 충격이랄까, 혹은 감동을 전하기 위해서는 글이 반드시 구구절절 길 필요는 없는 것이로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의미에서 이남호 교수님께서 엮어낸 민음사의 『한국단편문학선 1』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꽉 들어찬 행복이었다. 수록작 대부분이 이미 여러 차례 읽었던 작품들인지라 결말을 알고 있었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분명 한국어이건만 오래전 쓰인 작품들인 만큼 오늘날 사용되는 단어나 맞춤법과 다르게 쓰인 부분이 많은 데다 토속어까지 종종 등장해 간혹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장을 펼치면 손에서 놓기 힘들 정도로 흥미로운 글들이 많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수록된 열아홉 편의 단편들은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을 정도로 주옥같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태준의 「토끼 이야기」와 염상섭의 「임종」이었다. 같은 작품이라 해도 언제 누가 읽느냐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양상이 다를 테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작품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을지 궁금하다. 그 옛날 학창시설, 교과서를 통해 접했던 한국 단편문학의 조각들을 다시 만나보고 싶은 이, 그리고 단단하고 야무진 단편을 읽는 행복을 느껴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고픈 소설집이다.


수록작품

김동인 「감자」, 「발가락이 닮았다」

현진건 「빈처」, 「운수 좋은 날」

이광수 「무명」

나도향 「물레방아」

최서해 「홍염」

김유정 「동백꽃」, 「만무방」

채만식 「맹 순사」, 「치숙」

이상 「날개」

이효석 「산」, 「메밀꽃 필 무렵」

이태준 「밤길」, 「토끼 이야기」

정비석 「성황당」

염상섭 「임종」, 「두 파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