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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각 Jan 28. 2021

디자이너에게 디자인 툴이 중요하지 않은 이유

내가 뉴욕의 디자인 스쿨에서 배운 것들 – 3화 –

“교수님, 과제 무슨 프로그램으로 해 와야 하나요?”


첫 디자인 전공 수업이 시작되는 2학년 1학기에 어느 교실에서나 한 번쯤 들을 수 있는 질문이다. 특히 나처럼 착해서 선생님 말씀 잘 듣는데 조금 모자라는 친구들이 많이 물어본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선생님은 얕은 한숨을 쉬면서 “네 맘대로” 하라고 한다. 나도 이 질문을 한 번인가 두 번 정도 해 봤는데 미간이 찌푸려지는 선생님 얼굴을 보면서 이건 이제 그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디자인 스쿨에서 첫 학기가 시작하기 한 달 전부터 나는 어도비 포토샵 Adobe Photoshop과 일러스트레이터 Illustrator 같은 디자인 소프트웨어를 열심히 익혔다. 유튜브도 변변찮던 시절이라 책을 보면서 “셀렉션 툴은 v 키, r 키 누르고 로테이션하고, t 키 눌러서 글씨 쓰고, 어쩌고 저쩌고 중얼중얼” 하면서 열심히 툴을 익혔다. 그런데 막상 디자인 수업 첫 시간을 들어갔을 때 문제는 툴이 아니었다. 포토샵 실력이 아무리 기가 막히게 좋아도 디자인을 위한 좋은 아이디어와 솔루션(해답)이 없으면 말짱 헛수고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디자인을 종종 예술과 혼동하지만 사실 모든 디자인 작업은 문제 해결의 과정이다. 디자인 기반의 사고를 통한 문제 설정 및 솔루션 탐색 과정을 거쳐 주어진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 생각을 한 뒤에야, 포토샵이건 일러스트레이터건 디자인 툴이 활약할 기회가 생긴다. (이 글에서는 포토샵을 ‘전문적인 디자인 툴’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디자인 툴 이름 아무것으로나 치환해 읽어도 무방하다.)


모든 디자인은 문제 설정, 문제 해결, 결과물 생산이라는 세 가지 단계를 거쳐 완성된다. 예를 들어 서울 지하철 노선도 디자인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포토샵으로 지하철 노선도를 그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지하철 노선도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어려운 도전 과제가 무엇인지 생각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지하철 노선도 디자인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 가운데 하나는 좁은 지면에 엄청나게 많은 선과 글씨가 들어가야 한다는 점이다. 작은 지면에 많은 정보를 넣어야 하는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 과제로 설정하는 것, 그것이 디자인의 시작이다.


그다음으로 할 일은 앞에서 설정한 문제의 솔루션을 찾는 일이다. 현실 지도에 맞추어 선을 그리면 엉망으로 알아보기 힘들 테니 직선과 45도 사선을 조합한 반쯤 추상적인 형태로 노선도를 그려내는 것이 바로 전 세계의 지하철 노선도 디자이너들이 공통으로 채택해 온 솔루션이다. 이제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냈으니 비로소 디자인 결과물을 생산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라고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아 포토샵을 켤 필요는 없다. 아무리 포토샵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펜과 종이로 하는 낙서의 속도를 따라가진 못한다. 포토샵으로 이리저리 지하철 노선도를 그리기 전에 펜과 종이로 간단히 그림을 그려보고 자신이 머릿속으로 구상한 디자인이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할지 가늠해 보는 것이 좋다. 그렇게 그려 본 낙서 가운데 가장 실현 가능성이 있고 유망해 보이는 녀석을 대강 스케치 해 본 뒤에야 비로소 포토샵과 같은 전문적인 디자인 툴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디자인 스쿨에서 과제를 할 때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이 얼마나 포토샵으로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어왔는지에 민감한 편이다. 가령 새로 나온 음료수 캔을 디자인 해오라는 과제가 주어지면 학생들은 엄청나게 공을 들여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스타일리시하고 진짜 가게에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의 캔을 그려온다. 하지만 정작 교수는 그 캔을 보면 “왜 이렇게 디자인했니?”라고 물어본다. 그 순간이 바로 좋은 디자인을 해 온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이 나뉘는 순간이다. 이 질문에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 대답을 할 수 있는 학생들과 ‘어... 그냥...’으로 시작하는 대답을 하는 학생들이 각각의 그룹에 속하게 된다.


사실 교수들은 프로페셔널 디자이너들이기 때문에 학생들이 얼마나 그럴듯하게 과제를 만들어오던 거의 놀라지 않는다. 그들이 학생들의 작품을 보면서 놀라는 경우는 그 학생의 디자인 과제물 뒤에 숨은 발상이 교수 자신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경우뿐이다. 포토샵의 얼마나 어려운 기능을 사용했는지, 얼마나 유행에 민감하게 만들었는지, 심지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서 만들었는지조차 교수들의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포토샵 실력은 디자인 스쿨을 한 달만 다녀도 취미로 일 년 정도 한 만큼은 는다.


그러니 나를 포함한 조금 모자란 학생들이 “선생님, 포토샵 말고 피그마 Figma로 그려와도 되나요?” 하고 물으면 교수들은 ‘아, 이런 착하지만 모자란 학생들을 데리고 이번 학기를 어떻게 운영해 나가야 하나’ 하면서 한숨을 쉬게 되는 것이다. 혹시 독자 가운데 그래픽 디자인이나 웹 디자인을 배우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포토샵 같은 디자인 툴에 너무 신경 쓰지 않길 바란다. 어도비 한 달 구독료가 너무 비싸다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왠지 어도비에 돈을 갖다 바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예비 디자이너라면, 차라리 그 돈으로 예쁜 디자인 잡지라도 한 권 더 사 보는 것이 낫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업에 종사하는 디자이너들 가운데 ‘요즘 트렌드’에 적응하기 위해 특정 툴을 배워야 하는 것 아닌지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피그마는 분명 포토샵보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다른 디자이너들과 협업을 하기에 백만 배쯤 편한 도구이고, 그래서 요즘 더욱 핫한 툴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새로운 툴과 프로세스의 도입이 당신의 디자인 자체를 더욱 발전시켜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당신이 새로운 툴로 향상시키려는 것은 업무 프로세스 혹은 협업 효율 등 회사 생활이나 비즈니스에 관한 어떤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 프로 디자이너라면 단순히 새로운 디자인 툴의 트렌드를 따르기보단 자신이 새로운 툴의 도입으로 어떤 효과와 이익을 누릴 수 있는지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미련한 나는 생각만큼 디자인 툴이 중요치 않다는 사실을 학교를 한참 다니고 난 후에나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솜씨 없는 목수가 연장 탓한다는 속담은 알았는데, 그 솜씨 없는 목수가 난줄은 몰랐던 것이다. 지금은 업무가 익숙하다는 이유로 가끔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냅다 포토샵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중간 과정을 무시한 시한폭탄 같은 결과물은 훗날 어마 무시한 청구서를 들이밀며 내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디자인 수업과 과제에 관해 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아래 글을 추천합니다:

절박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위하여


피그마와 재택근무에 대한 글을 읽으시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재택근무 시대의 디자인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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