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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각 Dec 02. 2020

절룩거리네, 꽤나 종종

처음 뉴욕에 도착했을 때 나는 비교적 자신만만했다. 눈 뜨고 있어도 코 베어 간다는 서울에서 태어나 수십 년을 살았는데 뉴욕이라고 별 거 있겠냐고 생각했었다.


뉴욕 생활 첫날 한밤중에 맥도날드에서 마약을 한 직원이 내 주문을 받고 햄버거를 내주지 않았을 때에도 당황스러웠지만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며칠 후 한국에서 가져온 신용카드가 해킹되어 오백만 원이 애플 스토어에서 결제되었지만 결국 은행이 문제를 처리해 주었기에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집을 구하려고 했을 때 은행 계좌가 있어야 한다고 하고, 은행에 갔더니 집 주소가 있어야 계좌를 열 수 있다고 해서 며칠 동안 헤매고 있을 때에도 처음이니까 겪는 작은 혼란이라고 생각했다.


3번가에 있는 3층 아파트를 보여주겠다기에 만난 부동산 중개인이 1번가의 엘리베이터도 없이 무너져가는 6층 아파트로 데려가 뻔뻔스럽게 집을 소개할 때에도 당황하지 않은 척 똑바로 고개를 들고 서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구한 월세방의 난방장치가 고장 난 줄도 모르고 방 안에서 오들오들 추위에 떨다가 집주인에게 구조되었을 때, 집주인이 “너 어떻게 이 한파에 이런 냉골방에서 살았니”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다른 집들에서 나오는 난방 열기로 아파트 복도가 우리 집 안보다 따뜻했었지만 나는 원래 뉴욕은 겨울이 이렇게 추운가 보다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빈 집에 가구를 채워 넣기 위해 아이키아 Ikea 가구점에 갔던 날의 일이다. 미니밴을 한 대 예약해 가구점 주차장에서 다섯 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아놓았었다. 침대와 옷장과 책상과 식탁과 의자를 사고 다섯 시 오분쯤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운전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약속 시간에 오분 늦었으므로 그냥 가겠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곧 나가겠다고 했지만 나 같이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들이 문제라면서 그는 불같이 화를 내더니 막무가내로 떠나버렸다. 오분 늦었다고 빈 차로 떠나는 그 운전사를 이해할 수 없었기에 누군가 더 많은 돈을 주고 내 예약을 가로챈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일 년 뒤 비슷한 일을 다시 겪은 후에는 뉴욕의 이삿짐 회사들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약속을 어긴 두 회사가 모두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회사였지만 굳이 미국에서 만난 한국 동포들이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사를 나가는 날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붙박이 침대 철거 비용 칠십만 원을 청구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설치한 것이 아니라 우리 전에 살던 사람이 설치한 것이라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칠십만 원을 내라고 했다. 긴 실랑이 끝에 오십만 원만 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영어도 못하는 내가 이십만 원이나 깎은 건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중고 가구를 사서 지하철로 나르고 40킬로그램 쌀가마를 들고 이십 분을 걸어 교통비를 아껴 보람찬 일에 썼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사설 전기 회사에서 우리 집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집에 혼자 있던 아내는 더 싼 요금제로 바꾸어준다는 말에 요금제를 변경했다. 설명과 달리 우리는 더 비싼 전기 요금을 내기 시작했다. 육 개월 후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전기 회사가 기존에 우리가 쓰던 업체가 아닌 다른 업체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아내는 육 개월 전에 전기 회사 외판원이 집을 방문해 요금제를 바꾸었다고 털어놓았다. 엉겁결에 문을 열었고 판매원의 공격적인 태도에 겁을 먹어서 어쩔 수 없이 바꿨는데, 나한테 혼날까 두려워 육 개월 동안 털어놓지 못했다고 했다. 내가 그렇게 아내에게 화를 많이 내는 사람이었나 반성했다. 집에 혼자 있다가 원치 않게 낯선 사람에게 문을 열어준 아내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나는 전기 회사에 전화를 걸어 내 명의로 된 계약을 마음대로 체결했으니 이 계약을 무효로 하지 않으면 소송을 걸겠다고 말했다. 서투른 영어였지만 소송이 두려웠는지 그들은 위약금 없이 계약을 취소해 주었다. 영어로 전화 통화만 하면 머리에 쥐가 나던 시절이라 나는 그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밖에도 학교에서 당했던 억울한 일, 인턴으로 일하면서 있었던 부끄러운 일, 전화로 자동차 보험을 취소하면서 싸웠던 일, 비싸게 나온 휴대폰 요금에 대해 항의했던 일, 인터넷 대리점 직원에게 문전박대당했던 일, 중고차를 사면서 바가지를 썼던 일, 바에서 당했던 인종차별, 어느 파티에서 당했던 또 다른 차별 등 기억은 끝없이 이어졌다. 이 정도면 내 차례에 할 말이 없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절룩거리네, 한 대 맞으면 Photo by Austrian National Library on Unsplash




 “어떡하긴, 두 배로 주지 않으면 꼼짝도 안 하겠다는데. 결국 달라는 대로 다 주고 옮겼지.”


은정이는 몇 달 전 있었던 자신의 이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삿짐센터에서 나온 사람들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짐을 모두 빼서 길에 늘어놓고 돈을 두배로 주지 않으면 그대로 가버리겠다고 협박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던 친구들은 젊은 외국인 여성이 혼자 이사를 할 때 종종 있는 일이라며 그녀를 토닥였다.


나와 친구들은 게임을 하고 있었다. 뉴욕에 유학 와서 살면서 자신이 당한 황당한 일을 이야기하는 게임이었다. 승자는 당연히 가장 황당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은정이는 방금 전의 이야기로 강력한 우승후보가 되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붙박이 침대 철거비용을 낸 에피소드를 이야기했지만 친구들은 좀 약하다면서 다른 이야기 없냐고 물었다.


“알았어, 그럼 하나만 더 해볼게. 뉴욕에 사는 내 사촌 동생이 내가 부자 동네에 집을 구했다고 친척들한테 뒤에서 욕을 하고 다닌대. 뉴욕 물가도 모르고 지리도 몰라서 내가 첫 번째 집을 좀 급하게 구했었거든. 나중에 알고 보니 엄청 비싼 동네였어. 근데 사촌 동생은 그게 맘에 안 들었었나 봐.”


한 친구가 물었다.


“그럼 네 사촌 동생은 너 왜 안 도와줬대?”


어린 시절 이민을 와 한국어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사촌 동생이 내 처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기에 나를 도와주지 않은 것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뉴욕에 와서 십여 년 만에 처음 본 사촌 동생은 어린 시절과 비교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미 나와는 다른 세상 사람이었다.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야 하는 사람은 심판도 없고 시계도 없는 복싱 경기에서 수세에 몰린 선수와 같다. 끊임없이 세상이라는 상대가 던지는 잽을 맞으면서 넘어지지 않고 버텨야 한다. 처음에는 무턱대고 상대의 펀치를 맞으면서 비틀대지만 조금 지나면 가드를 올리고 주먹을 막는 법을 배우게 된다. 여유가 생기면 상대에게 반격을 할 기회도 발견할 수 있고 수세를 공세로 전환할 수도 있다. 언제 다시 수세에 몰릴지 알 수 없지만 운이 좋으면 상대를 끌어안은 채 싸우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방법도 배우게 된다.


“글쎄, 혹독한 시련을 통해 머나먼 이국 땅에 더 잘 적응하기를 바라는 따뜻한 마음에서 안 도와준 건 아닐까?”


은정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일어나 부엌으로 향하더니 냉장고 문을 열고 한국 슈퍼에서 사 온 소중한 소주 몇 병을 꺼내 왔다. 우리는 되는대로 아무 컵이나 꺼내 소주를 조금씩 나누어 담고 잔을 마주 부딪혔다. 둔탁한 불협화음이 아름답게 방 안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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