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의식이 지나치게 미래를 내달릴 때, 기껏 왔던 졸음은 저 멀리 달아나버린다. 다음날 중요한 일정이 있을 땐 준비가 미흡한 부분은 없는지 계속 되뇌게 되고,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마음 설레하며 핸드폰 메모장을 들었다 놨다 한다. 그 아이디어는 때론 소설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업 아이템일 때도 있는데, 나의 사업아이템 구상은 소설만큼 꽤 오래된 고질병이다. 구체적인 디테일은 다르겠지만 '커피 구독권'이라든지, '옷 대여 서비스'같은 것들은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둔 지 십 년 후에 사업화된 걸 보기도 했다. 때로는 나처럼 실행력 없이 아이디어와 문제해결력만 뛰어난 INTP들을 잔뜩 모아서 아이디어 외주회사를 차려볼까 싶기도 했는데, 역시나 실행할 마음은 1퍼센트도 없다. (갑자기 그런 회사를 소재로 한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은 든다ㅎㅎ)
이리저리 날뛰는 자의식에게 이만하면 충분하니 그만 잠에 들자고 다독여 봐도 한 번 가동된 생각 회로는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한두 시간을 침대에서 뒤척일 때면 아예 포기하고 다시 일상복으로 갈아입을 때도 있다.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책상에 앉아서 제대로 된 결과물을 만들어 내."
하지만 막상 책상에 앉은 나의 뇌는 급피곤 모드를 발동시킨다. 정말 청개구리가 따로 없다. 어째서 생각이란 침대에서만 그렇게 우아하고 매력적인 것일까. 그래도 책상에 앉아 한 두 시간 정도 생각을 끄적거리고 검색을 하고 계획을 세우다 보면 생산적인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그제야 나의 뇌는 잠을 주무시겠다고 새벽 5시가 넘어 침대로 기어들어간다. 그렇게 한숨 자고 나서 피곤한 채로 출근을 하면, 그날의 하루는 뒤죽박죽이 된다.
이런 날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므로 내가 딱히 불면증 환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소설가가 되고 나서 때때로 뒤척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됐고, 좋아하는 일을 너무 잘하고 싶다 보니 나의 하루는 오로지 소설 생각뿐이다. 내가 하는 일과 나의 자아가 분리되지 않는 이런 몰입감은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충만감을 가져다주지만, 분리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이렇게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할 때도 있다.
좋아하는 일로 먹고살려면, 좋아하는 그 일을 정말 잘해야 한다. 그리고 '잘해야 한다'는 말에는 어쩔 수없이 '다른 소설가 보다'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나는 소설에서 한 번도 '경쟁'을 읽은 적은 없지만, 수많은 등단 작가 중에서 주요 문예지에 원고 청탁을 받고, 이름이 알려지고, 계속해서 소설집을 발간하는 소설가가 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원고 청탁이 오지 않은 날이 1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습작생일 때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다양한 질문들이 내 안에 쌓여갔다. 청탁이 오지 않는 이유는 내 작품이 좋지 않아서 인가? 조금 더 큰 문예지를 통해 등단했어야 했나? 중앙 신춘문예로 다시 등단해 볼까? 요즘엔 독립출판도 많은데 내가 굳이 문단의 중앙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결국 내가 소설을 쓰고자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무엇이지?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로 이루어진 불면의 밤은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들어주고 있겠지만, 어쨌건 일상을 무너뜨리는 불면의 밤은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인터넷에 떠도는 불면증 완화 방법을 수차례 검색해 보지만 다들 뻔한 내용이고 예방 차원의 지침일 뿐이다. 내게 필요한 건 지금 당장 시도할 수 있는 직접적인 수면 유도 방법이라고. 아, 근데 잠깐 딴 길로 벗어나서 평상시 나만의 수면 리추얼 하나를 소개하겠다. 그건 바로 전날 꾼 꿈을 회상하는 일이다. 미래 걱정도 아니고 현재의 고민도 아닌, 허무맹랑한 어제의 꿈을 반추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수면 가루가 뿌려진 것처럼 잠이 솔솔 온다. 물론 이 방법은 평소에 꿈을 많이 꾸는 사람들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고 앞서 말했듯이 어떤 생각에 한 번 잠식되다 보면 꿈 생각은 저 멀리 달아나버린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누구나 적용할 수 있는 직접적인 수면 유도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깊이 호흡하기'였다.(너무 뻔한가?)
인공지능이 그려준 - 호흡에 집중하고 있는 요가하는 여인
내가 처음 호흡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건 요가를 배우면서부터다. 수험생이던 시절, 도서관 아래 주민센터에서 나를 가르쳐 주시던 요가 선생님은 항상 의식적으로 호흡에 집중하도록 했다. 동작을 하다가 너무 힘들면 근육이 괴로워하는 쪽으로 호흡을 보내라고도 하셨다. 그렇게 나의 동작과 호흡을 관찰해 나가면서내가 너무 얕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막 발령을 받은 신입교사 시절에는 목소리가 너무 가늘고 높아서 발성연습을 따로 하기도 했다. 떠드는 학생들을 자제시키며 3~4시간 소리 높여 수업을 하고 나면 목이 금세 쉬어버려서 이비인후과를 내 집처럼 드나들기도 했다. 발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식호흡이고, 복식호흡을 하는 것이 건강에도 좋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나는 그게 영 몸에 달라붙지 않았다.
그런데 가만 보니, 침대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뒤척이는 순간에도 내가 얕은 숨을 쉬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바로 명상 어플을 틀어놓고 호흡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자동 꺼짐 설정을 30분으로 해두고 명상 어플 속 목소리를 따라 몸을 이완시키고 깊은 호흡에만 집중했다. 그 결과 나는 20분도 채 되지 않아 까무룩 잠이 들었고, 다음날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시간이 순간 삭제라도 된 것처럼 꿈도 하나 꾸지 않고 숙면을 취한 것이다. 만성적인 불면증을 달고 사는동거인에게도 이 방법을 추천해 줬더니 효과를 봤다는 후기를 들려주었다.
생각해 보면 호흡이란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이지만 현대인들은 하루의 시간을 잘게 쪼개어 쓰느라 늘 숨이 가쁜 것 같다. (학교에 있을 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도 바로 그런 숨가쁨과 정신없음과 시끄러움이었다) 바쁜 일상을 따라가기가 '정말로 숨이 찰 때'는 잠시 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호흡을 정렬해 볼 필요가 있다. 스읍-하. 스읍-하. 비라도 된 것처럼 의도적으로 숨을 쉬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긴장도 풀리고 마음의 여유도 따라온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데, 일이건 잠이건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사회가 짜놓은 트랙에서 내려와 삶을 온전히 내 마음대로 정렬해 가는 요즘, 나는 점점 더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주 4일 근로자로 살고 있고, 귀찮게만 여겼던 집안 살림을 밀리지 않고 차근차근 해내고 있으며, 인간관계는 중요한 사람 위주로 간결하게 정리되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그 목록에 호흡법도 추가되었다. 불안에 현재를 잠식당하지 않고 호흡으로 단단히 현실에 뿌리내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어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호흡이 깊어지면, 내 글도 좀 더 깊어지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채로운 삶의 이면들을 담아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스읍-하. 오늘도 고요하고 단단한 밤을 지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