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다시, 시작의 감각

해파랑길 5코스 ▏계절의 문턱에서

by 헨리황

진하해변 → 덕산대교→ 덕망교 → 청량운동장→ (주)덕하역(해파랑길 5코스, 17.7km)


겨울 아침의 바다는 조용했다. 찬 기운이 코끝을 스치고, 바람은 옷깃을 여미게 했지만, 진하해변의 은빛 모래와 수평선 너머로 피어오르는 햇살은 그 모든 것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오늘 나는 해파랑길 5코스를 걷는다. 시작은 진하해변이다.


진하해변은 울산 울주군에 있는 고운 백사장과 완만한 수심으로 이름난 곳이다. 여름이면 피서객들로 북적이는 이곳도 겨울이 되면 고요한 명상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출렁이는 파도, 가늘게 번지는 햇살, 그리고 모래 위에 남겨지는 발자국 하나하나가 시간의 흐름처럼 느껴진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물결 위로 갈매기 한 마리가 유유히 날아간다. 바다의 색은 푸르다기보단 은회색에 가깝고, 그것이 겨울 바다의 깊이를 더해준다.


모래사장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화야강으로 접어든다. 이 강은 바다로 흘러들기 전, 잔잔한 내면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듯하다. 진하파출소를 지나면서부터 코스는 내륙으로 들어선다. 해변과 작별하고 강변의 정취를 벗 삼는다. 겨울 강은 삶을 가다듬는 거울 같다. 무성했던 풀잎과 나무들은 잎을 모두 떨구고,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채 겨울을 견디고 있다. 그것은 침묵 속 성찰이고, 다시 피어날 봄을 위한 준비일 것이다. 화야강에는 수많은 새가 머물고 있다. 몸을 웅크리며 강 위를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모습에서 평화로움이 묻어난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걷기 좋은 날씨다. 바람은 세지 않고, 하늘은 높고 맑다.


겨울 강의 평화


화야강 위, 물결보다 조용히

깃을 묻은 새들이 떠다닌다

햇살은 얼음장을 감싸듯 부드럽고

바람조차 오늘은 발소리를 감춘다


몸을 웅크린 채 유영하는 고요

그 무심한 듯한 선율 속에

삶의 번잡도, 시간의 굴곡도

잠시 잊힌다


강물은 흐르되 소리 없이

겨울은 맹렬하지 않고

하늘은 높고, 마음은 더 넓다


이날의 걷기는 기도처럼 느려지고

내 그림자조차 풍경에 스며든다



상화 2교를 지나며 풍경이 조금씩 바뀐다. 걷다 보니 어느새 야트막한 언덕과 바위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중 몇몇 바위는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 흡사 누군가의 옆모습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게 누군가의 미소를 닮은 듯한 형상이다. 자연이 조각한 얼굴은 무심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강을 따라 길은 이어지고, 곳곳에 쉬어갈 수 있는 벤치와 정자가 마련되어 있다. 한적한 정자 하나에 앉아 따뜻한 물을 마시며 간단한 간식을 꺼내 먹는다. 이 고요함 속에 앉아 있으면, 마치 세상의 속도가 느려진 듯하다. 셀카를 찍으며 잠시 장난도 쳐보고, 이 여정을 함께하는 나 자신에게 웃음 한 조각을 건네본다.


고즈넉한 덕동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앞을 지나는 강은 더욱 잔잔하다. 다리를 건너면 화야정수사업소가 보인다. 갑자기 시야가 트이고 큰 도로가 나온다. 아스팔트 길을 걷는 발걸음은 조금 단단한 느낌이다. 정이 넘치는 ‘양동마을’을 지난다. 도심 속 마을이지만 어느 곳보다 정겹게 느껴진다.


이윽고 덕하시장에 이른다. 시장은 생각보다 조용하다.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하는 준비를 하는 상인들 몇몇이 눈에 들어온다. 간판들은 오래되었고, 가게 앞 간이 의자엔 삶의 무게가 앉아 있는 듯하다. 시장통을 지나면서 나는 문득 오래전 장날 풍경이 떠오른다.


그리고 오늘 여정의 끝, (구) 덕하역에 도착한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폐역이다. 역사는 멈췄지만, 이곳의 시간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었다. 덕하역은 1935년에 개업한 간이역이다. 예전엔 이 역을 통해 소금 행상들과 주민들이 오가며 사람과 물류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은 그 모든 소리가 멎고, 건물만이 세월의 그림자를 간직한 채 서 있다.


한동안 역 앞에 서 있었다. 문이 닫힌 플랫폼, 삭은 간판, 그리고 흔적만 남은 철길. 이곳을 지나던 수많은 이들의 삶이 이곳에 스며 있었을 것이다. 떠나고 도착하는 그 단순한 동작 속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을까. 지금은 사라진 역이지만, 그 기억들은 사람들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있으리라.


다시, 시작의 감각


겨울의 끝자락. 바람은 차갑고, 들녘은 온통 갈색빛이다.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하늘로 뻗은 채 침묵하고 있고, 사람들의 걸음도 어딘지 모르게 움츠러들어 있다. 겉으로 보기엔 온통 쓸쓸하고 황량하기 그지없는 계절. 하지만, 이 적막 속에도 분명히 어떤 ‘멋’이 숨겨져 있다.


겨울은 떠나고 있지만, 그 작별은 언제나 조용하다. 화려한 꽃잎 하나 없이 계절은 느리게, 그러나 꾸준히 다음을 준비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마음 한편에서 묘한 그리움이 일어난다. 지나가는 시간의 소중함, 머무르지 않는 순간들에 대한 애틋함이랄까. 마치 오랜 친구와의 이별 앞에 멍하니 서 있는 듯한 감정이다.


하지만, 이 이별은 또 다른 시작을 품고 있다. 차가운 흙 속 어딘가에서는 이미 봄의 씨앗이 조용히 자라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드러나지 않지만, 머지않아 초록빛으로 세상이 바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겨울의 끝을 그저 지나치지 말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마지막 감정을 온전히 누려야 한다. 황량함조차 아름다움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마음의 눈을 열어야 한다.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다. 새로운 막을 열고 첫발을 내디딜 때, 우리의 마음은 종종 두려움과 설렘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러나 계절이 그러하듯, 삶 또한 지나가는 순간들을 품은 채 다음을 향해 나아간다. 늦겨울이 봄을 품고 있듯, 우리는 희망을 가슴에 안고 다가오는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니 지금 이 황량한 계절 속에서도 머뭇거리지 말고, 그 안의 온기를 찾아보자. 그리움과 기대가 교차하는 이 시간을 천천히 음미하며, 새로움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용기를 준비하는 것이다.


5코스 화야강.jpg 화야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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