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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Mar 28. 2024

여자친구의 간이 운동화

마스다 미리 작가의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를 읽으며

마스다 미리 작가의 책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를 읽으며 많은 곳에 포스트잇을 붙였지만, 그중에 은근히 마음이 머무는 대사가 있었다. '누가 볼 것도 아닌데, 사랑을 할 것도 아닌데..'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나이 40 주인공 여성이 밖을 나가면서 읊조리는 구간이었다.

읽고 있는 나는 36, 결혼과 출산으로 남편과 아이가 있는 여성이라는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40은 나와 '아직'이 어울리는 숫자 같지만, (힘주어 꾸미지 않거나, 아예 꾸미지 않은) 평범한 날들에 비추어본 거울 안 내 모습을 보며 같은 생각을 하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결혼 전 남자들에게 인기 많은 타입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제 와서 저런 아쉬움이 드는 건지, 마치 해서는 안될 생각을 한 것 같은 기분에 묻어만 두었던 독백이었다.

단순히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을까. 아니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역력히 티가나는 얼굴과 머릿결을 보며 든 한탄이었을까. 언제는 무슨 자신감이었다고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건가 싶었다. 심지어 지금은 무릎 위 기장의 짧은 치마가 있어도, 스스로 마다하는 내가 아니던가. 스스로 마치 정절을 지켜야 될 것처럼 조신한 아줌마로 살기를 택하였으면서 무슨 생각이었던걸까.

한편 남자친구였던 남편의 차 트렁크에는 아이의 모래놀이 장난감세트가 탑재돼 있다. 구두신은 여자친구였던 내 발을 위한 간이 운동화를 준비해 두던 남자친구는 없다. 글을 쓰기 전까진 남편이 이제 나를 배려하는 운동화는 없어졌구나 하던 것이었는데, 쓰고 보니 진짜 필요가 없는 거였다. 구두 신는 여자친구도, 와이프도 없으니. 대신 일 년에 1번 정도 구두를 신으면 많이 신고, 365일 편한 운동화를 닳도록 신고 다니는 와이프가 있으니까. 여분의 여성운동화를 갖고 다니는 게 더 이상한 꼴이었다. 그리고 나는 배려의 남자친구 대신 구두를 신다 발이 아프면 차라리 맨발로 다닐, 홀로의 뻔뻔함을 얻었을거다.

모든 게 멋지고 잘생겨 보이며 좋았던 남자친구도, 남편도 사라진 지 오래. 그렇다고 이 사람이 싫은  아니다. 우린 더 끈끈해졌고, 단단해졌고, 무엇보다 가족이 되었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인연이 되었고,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가 되기로 합의를 하였으며 축복받았다. 둘이 낳은 아이가 생기고 가족이 되어 살아간다는 사실은 다분히 행복하고도 감사하며 신비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왜 아쉬움일까.
이제는 둘만 손잡고 영화 보러 가는 길이, 밤늦은 거리서 찾아들어가는 술집이, 버스정류장 앞에서 누가 보든 말든 한 잠바 안에 들어가 있던 우리는 없다. 솔직히 어떻게든 하면 하겠지만, 누구 하나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걸 안다. 꼭 그런 게 하고 싶다기보다, 상큼하고도 자유롭지만 남보기에 얄궂기도 했을 그런 애정 표현이나 행위조차도 지금은 할 수 없는 것이 된 지금이 아쉬운 걸까. 우리에겐 이제 마음에도, 눈에도 항상 아이가 있다. 나는 구두대신 운동화를, 남자는 여자의 운동화 대신 모래놀이를 챙긴다.

우아(한 척)하게 나이프로 돈가스나 고기 자르던 나는 없다. 편식 있는 아이 탓에 좁아진 외식메뉴로 지겨운 음식이 돈가스나 숯불고기가 되었다. 돈가스든 불에 굽는 고기든 썰어먹는 고기든, 칼은 고 가위가 땡큐다. 일부 나라에서는 음식을 가위로 자르는 게 그렇게 이상한 행동이라던데, 나는 이미 잘라져 나온 고기조차 더 잘게 자르고 있는 폼이라니 봐줄만하겠다.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게 행복했던 때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지금의 남편과 연애하던 때를 거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을 꼽으라면 그 남자와 함께 아이를 가진 것이다. 가장 행복할 때 나는 서툴렀지만, 진심에 열심을 더했고, 재지 않았다. 반면에 가장 잘한 일이라고 칭한 그 일에서도 열성을 다하지만 그 일은 어쩐지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기분이다.

행복과 잘한 일은 다른 걸까.

책은 매번 단순 독백으로 '누가 봐줄 것도 아닌데, '로 끝났다. 나는 혼자만 하던 생각을 책에서 같이 느껴서 좋았지만, 내 생각은 독백으로 끝나지 않는다. 내가 그 책을 읽을 때,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는 주인공을 보며 단 한 번도 손가락질하지 않았으나, 나는 매 순간 스스로를 채찍질할 준비가 돼있다. 어떻게 하면 지금에 더 만족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현명한 엄마가 되어야 하는지, 얼마큼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내 길을 가야 할지를 고민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의 자잘하지만 끊임없는 감기수발에 글을 놓은 지 오래돼서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법도, 글로 옮기는 것도 까먹었다. 죄 앞에 뻔뻔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에게 윤리적 잣대를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글 앞에서만큼은, 어렴풋하게나마 자기 검열을 하지 않는 법을 까먹었다. 잘 가고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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