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관부하니 떠오르는 이름
*이름은 실제와 가까운 가명입니다.
송덕규, 잘 지내니.
얼마 전 성교육 강의를 듣다가 네 생각이 났어.
벌써 89년생도 삼십 대 후반이 돼서 이제는 학교 친구도 만나는 게 아니라면 이름도 가물해지던데. 너랑 나는 만나지도 않는데 너 이름은 어떻게 된 게 잊히지가 않아. 13년. 아니네, 23년이 지났는데도 통 잊히지가 않으니 징글징글하다. 잊을만하면 꼭 한 번씩
네 생각이 나.
강의 중에 한 선생님이 내게 물었어. 왜 이 교육을 받기로 결심했냐고.
나는 한국여자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살면서 (넓은 의미의) 성폭행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없는 걸 보고 놀랐다고 했어. 성교육 공부를 해서 나 한 명이라도 깨어있으면 뭐라도 좋겠다는 마음에 왔다고 말했지. 실제로 얼마 전에 아는 언니 2명과 성추행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내가 고1 때 지하철에서 내외투 안으로 손을 짚어넣고 배를 만지던 (너무 멀쩡하다 못해 고상하게 생긴) 아저씨를 말했어. 살면서 내가 당한 성추행은, 몇 명인지 모르겠는 바바리맨을 빼고 그게 다인 줄 알았어. 다행히도 내가 ‘아는’ 남자들 중에서 성추행과 연관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거든.
혹시 젠더기반폭력*이라고 들어봤어? 영어로는 Gender-Based Violence라고 하는데, 사회적으로 부여된 성역할의 차이를 바탕으로 개인의 의지와는 달리 약자에게 행해지는 물리적·언어적·성적폭력을 일컫는 포괄적 용어야. 말이 어려워서 그렇지, 뜻이 익숙하지 않니? 나는 책에 나온 수많은 성교육 전문 용어 중에 여기에 시선이 머물더라. 너 생각이 나면서 비로소 이해가 되더군. 스물 하고도 2년 전이라고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우리 중학교 2학년 때 친구였잖아.
너는 반에 몇 명쯤은 있을 법한, 키가 나와 비슷하고, 머리카락이 유독 까만, 안경을 쓴 남자애였어. 안경을 쓴 남자애들은 보통 눈이 작던데. 너는 그 안에 있는 큰 눈과 진한 속눈썹이, 자주 더러워져 있던 네 안경알을 용케도 뚫고 나올 만큼 보여서 기억이 나. 우리는 짝꿍이 몇 번 됐다는 이유로 친해졌어. 친해지긴 했는데 널 이성적으로 좋아한 것 같진 않아. 넌 잘 삐지곤 했는데, 너의 큰 눈이 그때마다 유독 도드라졌고, 툭 튀어나오는 입술까지도 진짜 꼴 보기가 싫었거든.
너도 알다시피 나는 항상 좋아하는 남자애들이 있었는데, 너는 아니었어. 너는 딱 좀 친한 남자사람친구였지. 그렇게 넌 여전히 잘 삐지고 꼴 보기가 싫다가도 이상하게 친한 관계는 오래갔어. 그러다 우리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는 반이 달라졌잖아. 그래도 종종 버디버디와 문자로 연락을 했고, 가끔 복도에서 만나면 장난치듯 인사하고 갔었지.
그렇게 3학년이 된 지 얼마 안 된 무렵이었어. 학원 가기 전에 켠 컴퓨터 안에서 우린 버디버디로 만났지. 무슨 얘기로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는 똑똑히 기억나. 내게 비밀을 말해줄 거라 했어. 비밀이란, 너는 부모님 몰래 친척누나랑 사귀었다고 했고, 그 누나랑 잤다고 했어. ‘‘남녀가 잔다’라는 게 무슨 의민지 알지?’라며 굳이 한번 더 상기시켰던 것도 기억나. 마치 나는 해봤고 너는 못해봤으니 뭐라도 대단한 걸 안다는 사람의 태도였어. 친척누나애인이라니. 나는 이미 이때부터 얼굴에 터질 듯이 피가 몰리고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어.
그런데 알지. 이게 시작도 아니었던 거.
그날 너는 누나랑 헤어진 지 며칠 안 된 상태고, 그 일로 너무 괴롭다고 했잖아. 그래서 옥상에 올라와 있고 내게 죽고 싶다고 몇 번이고 말했지. 쿵쾅대던 심장에서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어. 내가 손이 떨린 건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 하나 때문이었어. 그때 나는 너에게 어떤 위로와 붙잡음의 말을 했을까.
도저히 정신을 못 차릴 때쯤 학원 갈 시간이 됐어. 시스템종료를 해야 했지. 도대체 어쩌지만 수만 번을 되뇌다 결국은 사색이 된 얼굴로 엄마한테 말하기로 했어. 친척누나 애인사건은 일말의 우정으로 치고 지켜줄 생각이 있었어. (지금 생각해 보니 지켜준다기보다 남의 얘기여도 어른한테 그런 얘기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싫었던 것 같기도 해.) 내 일이라면 정말 극성을 부리는 엄마라 친구얘기는 정말 하기 싫었는데, 그때는 엄마의 극성을 이용해서라도 어디든 가서 너를 구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친척누나 얘기까진 안 하고 싶었는데, 너의 죽음에 근거가 무색해지는 게 더 문제인 것 같았어. 결국 ‘누나랑 잤다’는 것만 빼고 다 얘기한 것 같아.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빠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어. 네 얘기를 들은 엄마도 얼굴이 굳었고, 일단 알아볼 테니 학원에 가라고 했어. 학원에 가긴 했는데 공부가 들어올 리 있겠어? 여전히 사색이 된 채로 의자에 앉아만 있다가 좀 일찍 집에 온 것 같아. 집에 와보니 아빠도 있었어. 분명히 아까 엄마는 나보다는 덜하지만 어쨌든 사색이 된 상태였는데, 무슨 일인지 지금은 화가 나 있는 것 같더라. 아빠는 의외로 차분한 상태였어. 그 분위기가 너무 어색했던 기억이 나.
우리 집에서 나는 일방적으로 윽박지름을 당하는 식으로 혼나는 것 말고는 그런 진지한 대화체로 마주 앉아본 기억이 별로 없거든. 나는 분명히 엄마한테 말했는데, 아빠가 운을 떼었어. 그게 신기하고 어색한데 그만큼 중대하게 느껴졌어. 아빠는 일단, 진짜 죽을 사람은 그렇게 대놓고 죽는다 하지 않으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했어. 요즘 자살연구에 의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던데, 그때는 그 말에 안심이 조금 됐어. 그리고 아빠는 이어서 말했어.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건대, 네가 나한테 관심을 사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는 말이었어.
그 말을 듣고 신기하게 제대로 안심했어. 진짜 죽을 사람은 죽기 전에 떠벌리지 않는다는 말보다도 너의 비밀이 모두 거짓일 수 있다는 게 이유였어. 정확히 말하면 분노와 수치가 걱정을 덮은 거지. 그제야 나는 엄마의 경직된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진 이유를 알겠더라고. 덕규 네가 나에게 말한 비밀이 진실이었으면 좋겠다고 딱히 생각한 적도 없지만, 거짓이길 바란 적도 없었는데. 나는 다시 몸이 떨렸어. 엄마가 학교에 전화해서 작년 담임인 윤지영선생님을 찾는 목소리를 들으며 역시 떨고 있었어. 너의 얘기가 여전히 진실이기도, 거짓이기도 바랄 수 없었어.
다행히 윤지영선생님과의 통화는 비교적 오래 걸리지 않았어. 무슨 우연인지 선생님 옆자리가 너의 중3담임선생님이시더라. 엄마는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아마도 중간에 내가 수화기를 넘겨받았을 거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얘기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엄마는 일단, 상황이 이러니 그 아이를 통해 사실 관계를 확실히 했으면 좋겠고, 혹시라도 이게 진실일 경우 조치를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렸어. 그 조치가 너의 안전조치인 건지, 나에 대한 사과인 건지, 둘 다 인지는 모르겠어.
엄마와 나의 얘길 듣고, 윤지영선생님은 옆자리 동료와 얘기를 나누셨겠지.
다시 우리 집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 사실은 충격적이었어. 나한테 비밀이랍시고 했던 그 얘기를 너네 반 선생님도 모조리 알고 계시더라는 거야. 그 당시 인터넷상에 반카페 만들기가 유행이었는데, 거기 익명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얘기였대. 그게 송덕규 너라는 걸 알고 너네 반 선생님은 무슨 생각이 드셨을까. 익명으로 음란 소설을 쓴 채 반 분위기를 휘적거린 것이, 안경 쓰고 공부도 곧잘 하는 부반장 송덕규 너란 사실을 알고 말이야.
어른 네 명이 모이자 모든 것이 다 어떤 못된 녀석의 몹쓸 거짓말인 것이 들통났어. 선생님들이 너를 교무실로 데리고 와서 어떤 조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어. 다만, 너는 내게 어떠한 사과도 없었고, 학교에서도 너에게 어떤 벌도 주지 않았다는 건 알아. 아마도 다음날 학교에서 양지영선생님과 내가 면담을 했고, 선생님도 격양된 표정으로 내게 아빠와 비슷한 얘기를 하셨어. 송덕규 네가 나한테까지 진짜 짓궂게 관심을 받으려고 그랬던 것 같다고. 그냥 착한 네가 넘어가 주라고.
양지영선생님은 중학교에 입학해서 만난 선생님들 중에 가장 각별한 선생님이었어. 중학교 2학년 때 알게 된 이후로 학년이 바뀌고서도 약간 언니처럼 지내는 선생님이었지. 실제로 그날 선생님의 언어는 흐릿한 선명함에 묻어있는 기억보다 훨씬 내 편처럼 느껴졌어. 하지만 결과적으로 젠더기반폭력의 피해자인 나를 두고, 피해를 알고 있는 어른들과 기관은 모두 그것을 쉬쉬해 주었어. 극성이었던 엄마도, 남자어른인 아빠도, 나랑 친한 선생님도, 학교도. 가해자인 너는 너무도 멀쩡히 모범생 프레임을 갖고 뻔뻔하게 살아갔어.
네가 받고 싶었던 관심은 이런 거였을까.
나는 젠더기반폭력이란 단어를 읊으며 너를 떠올렸지만, 과연 이게 젠더에 기반한 폭력뿐인가 싶어. 그보다는 송덕규 너란 자만이 가지는 끔찍한 도덕성에 더 과녁을 맞히고 싶다. 사람들은 자꾸 사회 전체 성교육이나 성평등 의식이 부재해서 딥페이크니 N 번 방이니 같은 사회적 문제가 생긴다고 했어.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그렇게 따지면 동시대 사람들 대부분이 완전하고도 이상적인 성교육을 받지 못하고, 불평등하고 잘못된 성의식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다 부정한 짓을 저질러야 하지 않을까. 대중적인 조건으로만 봤을 때 같은 교육과 분위기에 살면서도 성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한정적인 것에 주목하고 싶어. 분명 사회에도 책임이 있지만, 거기에 사회적 책임을 들이대는 게 사회에 좀 죄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개개인이 가진 죄악과 도덕성의 차이가 큰 것 같아. 고작 16살에 친척누나와 잤으며 헤어지고 죽고 싶다는 소설을 여자인 친구에게나, 익명게시판에나 주절거리던 너를 보니까.
네가 받고 싶었던 게 관심이라면 단순한 신체적 폭력이 아니라, ‘성’ 폭력에서 이상하게 유야무야 넘어가주는 어른들을 감안하고, 더 세게 나갈걸 그랬어. 아니, 나는 너무 어렸으니까 어른들도 더 적극적으로 조치해 줬어야 했어. 그래서 너랑 너네 집 어른이 우리 집에 와서 싹싹 빌거나, 그도 안된다면 내가 너네 반에 가서 친척누나랑 사귀고 잤다는 소설을 쓴 새끼가 이 송덕규새끼라고 까발릴걸 그랬어. 그럼 진짜 너는 인생 최대의 관심을 그때 다 받았을 텐데. 아쉽다.
나는 너무 어렸고 유약했어. 그런데 너는 어렸는데도 어쩜 그리 추악했을까.
그래서 잘 지내니? 너 결혼은 했니? 설마 아이도 키우니? 그 나이에 그런 행동을 해놓고도 처벌하나 받지 않았던 네가 어떻게 컸을지 정말 궁금해. 결국에 잘못돼서 감방에 있는 너를 생각했는데, 그 시절 뻔뻔하게 모범생 행세하며 커나가던 너처럼, 지금 너도 뒤에서는 N 번 방의 일원이, 그전에는 소라넷의 일원으로 살면서 보란 듯이 살아가는 어떤 잘나 보이는 인간이 되어있을 것 같아서 화가 나.
덕규야, 네가 잘 못 살기를, 아니면 제발 잘 살고 있기를 바라.
*출처. Pexels, 김양희.(2013). 젠더기반폭력에 대한 이해와 사례연구. 한국국제협력단 연구보고서 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