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밤늦은 공항 대합실은 한산했다. 산티아고를 경유해서 푼타아레나스로 가는 23시 40분 비행기를 타려는 사람들로 보이는 몇몇이 썰렁한 대합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사람들이 탑승구 앞에 줄을 서는 것을 보면서 줄 뒤에 섰다. 갑자기 뒤에서 한국말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몇 사람 뒤에 두 젊은 여성이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리카 쪽으로 오는 한국 여행자는 매우 드물다. 반가운 생각이 앞서 인사를 건넸다. 이번 여행 중 알게 된 것이지만 낯선 곳에서 한국사람을 만났다고 분위기 파악 않고 인사를 건네는 것은 상대방이 그리 좋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리마에서였다. 리마대성당 안을 둘러보고 있는데 바로 앞에서 한국 여성 둘과 마주쳤다. 여행 중 한국사람을 만난 경우가 별로 없어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더니 나를 흘낏 보고는 인사를 받아주기는 커녕 빨리 자리를 피해버렸다. 내가 뭔 실수를 한 모양인가? 그러나 특별히 실수를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든 생각이 이제는 낯선 여행지에서 한국사람을 만나도 인사를 건네는 것은 매우 신중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인사를 건네고 나서 바로 아차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의 인사를 받은 두 여성이 웃으면서 인사를 받아 주었다. 두 사람은 자매 사이인데 동생이 먼저 남미 여행을 한 후 너무 좋아서 언니에게 권해서 함께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자매의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
12시경에 출발한 비행기는 두 시간 반이 지난 새벽 2시 30분경 산티아고 공항에 도착했다. 여기서는 짐을 모두 찾아서 푼타아레나스 행 비행기에 다시 수속을 해서 탑승을 해야 한다. 출발시간이 6시 40분이니 대략 4시간 반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 새벽인데도 공항은 매우 복잡했다. 그래도 다시 수속을 하고 탑승할 대합실을 찾았으나 복도의 의자 한 옆자리를 겨우 차지할 수 있었다. 졸다 깨다 비행기를 탔다.
멕시코 시티에 도착한 지 57일째인 4월 17일, 칠레의 최남단에 속하는 푼타 아레나스에 내렸다. 오전 11시가 훨씬 지났으니 대강 4시간 반을 타고 온 듯하다. 아리카에서 푼타아레나스까지 모두 11시간 반이 걸렸고 이중 비행기에서 보낸 시간이 7시간가량이니 칠레가 긴 나라라는 것이 실감 났다.
마젤란 해협에서 기억을 잃다
밖으로 나오니 갑자기 한기가 몸으로 스며들었다. 지금 이곳은 늦가을인지 초겨울인지, 아무튼 그 경계에 있다고 느껴졌다. 아리카에서 7시간을 날아오는 동안 계절이 한 여름에서 초겨울로 바뀐 것이다.
호텔에 체크인을 했으나 방에는 오후에나 들어갈 수 있었다.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으나 도리가 없었다. 마침 점심시간이 다 되어 밖에 나가서 점심을 먹고 들어오면 될 듯싶었다. 거리를 걸어보니 예상보다 추웠다. 눈앞에 식당 하나가 보였다. 들어가서 음식을 시켜 배를 채웠다. 그리고 보니 아침도 안 먹은 채였다.
춥기는 하지만 점심을 먹고 근처 길거리를 좀 걸어 다녔다. 거리는 지금까지 거쳐온 여느 도시와는 달리 남미 도시에서 기대되는 그런 특징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옛날 머물렀던 미국 LA의 변두리 어디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리는 너무 황량했다. 휑한 도로에 찬바람이 스쳤다. 길을 걸어도 재미가 없었다. 그것은 추위 때문 만은 아니었다. 호텔로 다시 들어왔다. 다행히 입실이 가능했다.
이상하다. 이날부터는 호텔 안에서의 기억이 전혀 없다. 아리카에서도 호텔 안에서 씻고 컴퓨터로 사진 정리를 하고 했던 기억이 나는데 푼타 아레나스에 도착한 이날부터 호텔 안의 기억이 없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저녁은 호텔 1층 식당에서 먹은 것으로 기억나는데 다시 방으로 올라간 기억 자체가 없다. 호텔 방 기억이 사라지다니 도대체 객실 안에서 무슨 기억해서는 안될 일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내가 입원했던 병원의 창문으로 본 푸에르토 나탈레스 시가지. 앞의 바다가 마젤란 해협이고 그 건너 보이는 육지가 티에라 델 푸에고 섬의 북단이다.
아무튼 다음날 낮에는 하루 종일 푼타 아레나스 시내를 돌아다녔다. 박물관에도 가보고 바닷가 산책도 했다. 바다가 보이는 어느 작은 카페에서 커피도 마셨다. 거리는 넓고 황량했지만 다녀보니 그런대로 남미의 끝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아무런 사진도 남아 있지 않지만 푸른 바다와 하늘색은 그리 짙은 남색도 아니고 회색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의 색을 띠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바다의 밝은 회청색이 도시의 색과도 매우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푼타 아레나스 앞의 바다는 지도를 보면 커다란 호수처럼 보인다. 푼타 아레나스에서 동북쪽으로 올라가면 좁은 바닷길의 목이 나오고 그 목을 통과하면 대서양으로 나간다. 또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서북쪽으로 올라가도 바닷길은 좁고 긴 목을 통과하는데 이 목을 벗어나면 태평양으로 나가게 된다. 이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바닷길이 유명한 마젤란 해협이다. 포르투갈의 탐험가 마젤란이 1520년 이 해협을 통해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빠져나갔다고 한다. 마젤란 해협의 남쪽은 이 해협으로 대륙과 떨어져 티에라 델 푸에고 섬과 그 남쪽의 몇 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흔히 많은 여행자들이 남미 대륙의 땅끝 도시를 보려고 아르헨티나의 우수아이아를 가지만 지리적으로 남미 대륙의 끝에 있는 가장 큰 도시는 푼타 아레나스인 셈이다.
길거리에는 사람들도 별로 없어 썰렁한 분위기를 한층 더 썰렁하게 해 주었다. 아마 오후에 호텔로 들어왔을 텐데 이날은 저녁을 먹은 기억도 없다. 어쨌든 방에 들어와 잠을 잤을 것이다. 일정표대로라면 내일은 아침 8시 출발하는 푸에르토 나탈레스 행 버스를 타야 한다. 푸에르토 나탈레스는 여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4시간가량 올라가야 한다. 그곳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빙하 계곡과 눈 덮인 산봉우리들이 어우러진 경관지가 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유일하게 역사 유적이 아닌 자연경관을 보려고 계획표에 집어넣은 곳이다. 그러니 푸에르토 나탈레스는 그곳에 가기 위한 경유지에 불과한 곳이었다.
4월 19일 여행 59일째 아침, 나는 푸에르토 나탈레스 행 버스에 타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버스를 탄 기억이 없다. 나중에 억지로 머리에서 기억을 짜낸 결과이긴 하지만 이날 낮 나는 푼타 아레나스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내가 왜 이렇게 걷고 있지? 버스 터미널에 가야 하는데...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등에 진 배낭과 한쪽 어째에 걸린 카메라 그리고 한 손에 든 보스턴백 때문에 걷는 것이 매우 불편했던 것 같은데 좀 추웠었다는 생각이 나지만 그 외에는 완전히 기억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