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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gweon Yim Aug 01. 2022

끝나지 않은 여행의 끝 2

70대에 홀로 나선 중남미 사진 여행기 67


지금부터 쓰는 이야기 중에서 4월 19일부터의 푼타 아레나스와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사위 허 군이 칠레에 와서 관련되는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종합 재구성한 것이다.



재구성된 기억의 퍼즐 조각들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가야 할 4월 19일 나는 그곳으로 가는 버스를 타지 않고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가 어느 길가에 주저앉아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쓰러져 누워 있었는지도 모른다. 탈진한 듯 보이는 나를 지나가던 경찰이 발견했다. 그것이 몇 시였는지는 확인해보지 못했는데 저녁 무렵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오후에 여러 시간을 길에 쓰러져 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경찰관이 나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내가 정신을 완전히 잃고 쓰러져 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경찰관은 나의 상태를 보고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고 나는 괜찮다고 했고 아침에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가야 한다고 막무가내로 우겼다고 한다. 내가 워낙 완강하게 버티니까 경찰관은 할 수 없이 나를 경찰서로 데리고 갔고 나는 경찰서에 있는 침대에서 잠을 잔 모양이다.  


나는 여행을 떠나면서 전적으로 여행일지만 올리기 위한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고 페이지 명칭을 ‘임세권의 80일간의 남미여행기 Dreaming of Moai’로 해두었다. 남미여행의 목적이 모아이 즉 이스터 섬을 보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멕시코시티에 도착한 제1일부터 매일매일의 여행 소식을 사진을 통해 올리기 시작했다. 한국의 친구들은 모두 이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내 소식을 알 수 있었다.


여행기를 올리기 위해 만든 페이스북 페이지



페이스북 친구 중에는 사위 허 군도 있었는데 그는 매일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보고 다니는지를 확인하고 그를 통해 나의 소식을 내 딸이나 나의 아내 등 다른 가족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 사위에게 내 자세한 일정표를 주고 왔는데 그는 내 일정표와 페이스북의 여행일지를 비교해 가면서 내 소식을 확인하고 있었다. 또 그는 가끔 카톡으로 내 안부를 묻기도 했다.


그런데 4월 14일(54일째)에 그 전날 했던 아타카마의 거인 땅그림 답사 사진을 올린 후 아무런 소식이 올라오지 않았다. 물론 카톡을 비롯한 일체의 통신이 두절되었다.


그러나 페이스북 페이지가 아닌 본 페이스북의 내 계정 피드에는 4월 17일에 올린 4월 16일 자와 4월 18일에 올린 4월 17일 자의 일지가 올라 있다. 왜 이 이틀의 일지를 페이스북 페이지 'Dreaming of Moai"에 올리지 않고 곧바로 피드에 올렸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허 군은 이 두 포스팅을 보지 못했다.



허 군은 페이스북에서 소식이 끊어진 지 닷새째인 4월 19일 나에게 카카오톡을 보냈다. 그러나 아무런 답도 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허 군은 나의 일지를 찾아보고 그날 내가 투숙하기로 되어 있던 푸에르토 나탈레스의 호텔로 전화를 했다. 그러나 호텔에는 내가 체크인 한 기록이 없었다. 불안해진 허 군은 외교통상부에 현지 실종신고를 하게 되었다.


페이스북 피드에 마지막으로 올린 일지와 사위가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 사위는 이 메시지의 답을 받지 못하자 나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실종신고와  긴급구조


실종신고를 받은 칠레 산티아고에 있는 한국 대사관은 실종된 푼타 아레나스로 연락을 취했는데 나는 다행히도 그 시간에 경찰서에 보호되어 있었다. 영사관의 담당 실무관은 신고자인 허 군에게 나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실종신고 두 시간 만에 확인된 것이다. 만일 그때 내가 경찰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어느 골목이나 바닷가에 쓰러져 있었다면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 나의 존재가 파악되었을까를 생각하면 지금 생각해도 정말 운이 좋았었다는 생각이 든다.

 



4월 20일 아침, 경찰은 내가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가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었다. 경찰관은 나를 터미널로 안내하면서 산티아고의 영사관 실무관에게 전화를 해서 나의 현재 상태를 알려 주었고 나와도 통화를 하게 했다고 한다. 실무관은 나의 건강상태를 묻고 병원에 가야 하지 않느냐, 앞으로의 일정을 알려줄 수 있느냐고 말하는 등 나의 신변 안전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던 모양이다. 그때 나는 화를 내며 내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하고 고함을 치고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실무관은 나의 태도에 기분이 상했다. 그리고 나의 건강에 대해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전화 태도로 보아 당연하였다고 생각된다. 이 사실은 다시 사위 허 군에게 통보되었다. 그러나 허 군은 나의 전화통화 내용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내가 먼 나라에 가서 나를 걱정해주는 한국 영사관 직원에게 그렇게 무례한 행동을 하였다는 것에서 나의 건강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처음 걱정했던 것처럼 내가 어떤 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하는 상태가 아니고 경찰의 보호도 받고 영사관에서도 주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일단 안심을 했다.


어쨌든 나는 하루 늦기는 했지만 버스표를 사서 버스를 타고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도착하였다. 처음 계획대로라면 어제 4월 19일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도착하여 하예프 호텔(Hotel Hallef)에 짐을 푸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날짜는 이미 지나고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도착한 것은 하루 지난 20일. 내가 들어간 호텔은 돈 기예르모 호텔(Hostal Don Guillermo)이었다.


구글 지도에서 검색을 해보면 버스 터미널에서 돈 기예르모 호텔까지의 거리는 약 1킬로미터 정도 된다. 버스에서 내려 어떻게 그 호텔로 갔는지, 왜 그 호텔로 갔는지 하는 것은 짐작도 할 수 없다. 걸어갔을 수도 있고 택시를 타고 갔을 수도 있다. 나는 호텔에 들어가서 입실 수속을 하고 2층 방으로 올라가서 침대에 쓰러졌던 것 같다. 이것은 호텔 사장의 말을 들어서 알게 된 것이다.


그 호텔의 구조는 다른 호텔과 다른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호텔 홈페이지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호텔 2층의 복도 사진을 보면 바닥은 나무로 되어 있고 바닥 중간에 두 줄로 유리창을 만들어 아래층이 보이도록 되어 있다. 또 일부 객실의 복도 쪽 벽은 방문이 있고 방문 옆 벽에 긴 유리창을 달아 복도에서 방이 보이도록 되었는데 방 안에서 블라인드를 쳐 가릴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일반 호텔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지만 이 특이한 구조 때문에 나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구글어스 스트리트 뷰를 통해 본 호스탈 돈기예르모의 모습. 2층이지만 주변이 모두 단층 건물이어서 우뚝 솟아 보인다.
호텔 기예르모의 2층 복도. 벽에 긴 유리창이 두 개씩 설치되어 있다.(www.hostaldonguillermo.com/ 캡처)

돈 기예르모 호텔의 사장은 여성이다. 4월 21일 저녁 무렵 호텔 사장은 호텔 복도를 돌아보며 이상 유무를 체크했다. 그러다가 내가 들어있는 방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사장은 내 방의 벽에 있는 창에 블라인드가 쳐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안에는 한 사람이 침대에 짐도 풀지 않고 고꾸라져 있는 것이 보였다. 놀란 사장은 방 안으로 들어가서 나의 상태를 확인하고 구급차를 불러 시내의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 엑스레이 검사 등을 한 후 뇌에 출혈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수술을 해야 하는데 현지 병원에서는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하여 긴급히 푼타 아레나스의 병원으로 후송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푼타 아레나스까지는 25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고 자동차로 4시간이나 걸린다. 나의 상태로 보아 그것은 너무 무리한 일이었다. 자동차에 흔들리는 것도 문제지만 수술을 해야 할 골든 타임을 놓칠 수 있었다.


푸에르토 나탈레스와 푼타 아레나스 사이에는 관광철에 한해서 다니는 항공편이 있었지만 4월은 여행 비수기라서 비행기는 다니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공항에 푼타 아레나스까지 갈 수 있는 비행기가 있었고 긴급 환자의 수송을 위해 동원될 수 있다고 했다. 구급 전세 비행기를 이용하여 나는 다시 푼타 아레나스로 돌아왔다.


지구 끝으로 찾아온 딸과 사위


그 사이 자정이 지나 4월 22일이 되었다. 여행 62일 째이다. 푼타 아레나스의 마젤란 국립병원(Hospital clinico de Magellanes)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 30분. 도착하자마자 CT를 촬영했는데 촬영 결과 뇌경막내출혈로 판정되었다. 뇌경막은 뇌를 둘러싸고 있는 세 개의 막 중에서 가장 밖에 있는 막으로 두개골 바로 아래 있는 것이다. 출혈된 피의 양은 예상보다 많았고 이 피가 뇌를 눌러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수술은 바로 진행되어 두개골을 일부 절단하고 고인 피를 제거하여 위험을 겨우 넘기게 되었다.


나는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UCI 집중치료실)에 입원하였다. 수술을 하고 있는 시간 한국에서는 나의 딸과 사위가 산티아고 영사관의 실무관으로부터 수술 소식을 등고 저녁 비행기로 칠레로 출발하였다.


산티아고 영사관에서 박실무관이 병원에 도착한 4월 24일, 나는 아직 의식이 없었다. 아마도 나는 그때 지독한 섬망 상을 겪으면서 힘들어했던 것 같다. 이 내용은 이 여행기의 맨 앞 2회 '죽음의 신과의 조우'편에서 간략히 쓴 바 있다.


마젤란 국립병원(www.facebook.com/hospital.magallanes에서 캡처)



4월 25일 나는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그러나 정신이 돌아왔다는 것은 극히 부분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계속 주변 사람들이 나를 해친다는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사람을 알아보고 말도 할 수 있었다. 나는 침대에 묶여 있었는데 왜 거기에 그렇게 있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병실을 한 단계 낮은 중환자실 UTI로 옮겼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산티아고에서 온 박실무관이 나를 보고 인사를 나누었다고 하는데 그것도 기억이 없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사위 허 군이었다. 뒤이어 큰 딸이 들어왔다. 내가 딸아이 부부를 알아보자 딸과 사위가 뛸 듯이 기뻐했다.


딸 아이 부부가 인천공항을 떠난 것이 한국시간 23일 저녁이고 푼타 아레나스에 도착한 것이 칠레 시간 25일 오후 도착했으니 2박 3일이 지난 것 같으나 실제 시간은 3박 4일이나 걸렸다. 한국 시간이 남미보다 하루 빠르기 때문이다. 딸 부부가 탄 비행기는 미국의 시카고와 마이애미를 경유하여 산티아고까지 가는 긴 항로였는데 비행기에 문제가 생겨 예정에 없던 리마에 내려 하루를 잤다고 한다. 예상치 않은 하루를 잡아먹은 셈이다. 또 산티아고에서 푼타 아레나스까지의 칠레 국내선도 이들의 긴 여행에 추가되었다. 모두 세 나라의 국경을 넘고 네 군데의 공항을 거쳐서 나흘 만에 도착한 것이다. 큰 딸은 도착해서 내가 와있는 곳이 이렇게 먼 곳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 이곳은 남미 대륙의 맨 끝이고 남극이 지척에 있으니 왜 안 멀겠는가?


삶에서 죽음 그리고 다시 삶에로의 여정


어쨌든 나도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게 되었다. 내가 왜 병원에 잡혀있는지도 알 수 없는데 상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니 그간의 불안과 답답함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4월 26일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호텔 사장 부부가 내가 남긴 짐을 가져왔다고 했다. 카메라 가방과 옷과 잡동사니가 든 보스턴백이다. 나는 그간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었는지 전혀 알 수 없고 딸고 사위도 이제 이 먼 곳까지 와서 정신이 없으니 내 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호텔 사장이 짐을 들고 나타났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그분들 얼굴도 보지 못하였는데 딸아이 부부가 잘 응대하고 안 받으려는 약간의 사례금도 억지로 쥐어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짐을 보니 내가 어깨에 메고 다녔던 카메라가 없었다. 아쉬움이 컸다. 그 카메라에 아리카와 푼타 아레나스의 사진이 몽땅 들어 있는데 이제 그 두 도시에서의 나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아마도 그 카메라는 내가 푼타 아레나스 길에 쓰러져 있을 때 없어졌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뭐 어떡하겠는가? 목숨이 붙어 있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 아닌가?


생각해보면 그분들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다. 그 호텔에서 조금이라도 나의 병원 후송을 늦췄더라면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생명을 구한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푼타 아레나스의 길 가에서 나를 데려다 돌보아준 경찰관들이 있고 호텔 사장이 있고 또 비행기를 전세 낼 수 있도록 해 준 관계자도 있고 나를 수술해준 마젤란 국립병원의 의사도 있다. 이 분들 중 나를 아는 사람은 없다. 이분들에게 나는 그저 길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외국 여행자의 하나일 뿐이었다. 내가 길에서 쓰러져 죽었다고 한들 이들에게는 한 외국 여행자가 갑자기 발생한 신체의 이상으로 인해 사망한 하나의 사례가 생겼을 뿐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모두 하나같이 한 외국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는 것은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감동이었다.


푼타 아레나스에서 푸에르토 나탈레스까지 와서 다시 푼타 아레나스의 병원에 오기까지, 많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나는 무의식 중에서지만 그때마다 삶의 길을 선택했다. 나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그 여정을 돌이켜 보면,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그야말로 매일 지나치는 일상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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