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버른에서 윌밍턴으로
멜버른에서 정착한 지 세 달 만에 우리는 또다시 계획에 없던 떠남을 마주하게 되었다. 남편이 회사의 본사가 있는 미국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결국 우리는 멜버른에서 딱 1년 만을 채우고 새로운 곳으로 또 떠나게 되었다. 남편과 '언젠가 미국으로 갈 수도 있겠네.'라는 생각을 스치듯이 나눈 적은 있지만 그 시간이 이렇게 빨리 다가올 줄은 몰랐다.
우리에게 세 달이라는 시간은 정착이라는 단어를 쓰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시드니보다 여러모로 마음이 조금 더 자유로웠던 새로운 생활이 점점 편하다고 느끼는 시기였을 뿐 아니라 집 안 가구들의 배치가 가장 편안하게 완성된 것처럼 생활의 모든 부분들이 가장 아름답게 자리 잡은 시기였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세 달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는 그전에는 겪지 못했던 큰 산들을 맞서왔다.
익숙한 생활 터전을 떠나와 이 낯선 곳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들을 지나왔는가.
또한 우리를 가장 잘 알고 서로를 가장 잘 아는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와 새로운 관계의 첫 단추를 채우는데 그 3개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용기를 내야 했는가. 떠남을 경험해 본 자들만이 토로할 수 있는 정말 높고도 어려운 산이었다.
특별히 처음으로 전학이란 것을 경험한 아이들에게 이 시기는 분명 큰 도전의 시기임에 분명했다. 낯을 유독 가리는 둘째 아이는 전학 온 지 대략 세 달째가 되는 첫 학기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눈물을 그치고 교실로 들어갔고 나 역시 그제야 전쟁과 같던 등교 시간에 안정을 되찾았다.
아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멜버른에서의 일상은 영어를 한마디 하지 않아도 사는데 지장이 없던 시드니 교민생활과는 전혀 달랐다. 좁디좁은 나의 인간관계는 시드니에서는 주로 한인교회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멜버른에 오며 호주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아주 개인적이고 특별한 언어 훈련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로 인한 극한의 외로움의 훈련까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의 첫 삼 개월은 눈앞에 놓인 낯설고 쉽지 않은 높은 산들을 각자 그리고 함께, 직면하고 맞서며 조금씩 각자의 호흡을 조절하며 나아가던 그런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또다시. 떠나야 한다니.
그것도 이제는 더 먼, 저 미국으로.
맞다. 결국 그렇게 멜버른에서 남은 9개월 간의 시간은 우리에게 연습이자 훈련의 시간이 되었다. 낯설었던 여행이 익숙한 일상으로 자리 잡으려던 찰나, 다시 우리의 일상은 또 새로운 떠남을 준비하는 여행이 된 것이다.
과연 무엇을 어떻게 연습하고 훈련하라고 주어진 시간일까. 우리는 이 여행과 같은 남은 멜버른에서의 일상을 어떻게 채워나가야 하며 어떤 마음들로 그다음을 준비해야 할까. 현재에 집중하지만 그다음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여행자이자 이방인의 삶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올해 11월쯤에 미국으로 떠나는 것이 결정된 뒤 우리는 4월쯤 미국 출장을 가는 남편을 따라 온 가족이 우리가 내년부터 살아가게 될 노스캐롤라이나 주, 윌밍턴이라는 곳으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 미리 한번 가서 앞으로 살아갈 동네와 학교 등을 알아볼 계획이었다. 대략 2주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며 생각보다 너무나 좋은 환경과 미국의 대도시와는 전혀 다른 안전하고 보수적이며 깨끗한 도시 분위기에 감사히도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계획을 확정 짓게 되었다.
다만, 내 마음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던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시아인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윌밍턴은 거주하는 아시아인이 1퍼센트 밖에 되지 않고 철저하게 80퍼센트 이상이 백인으로 이루어진 그런 도시였다. 말로만 들었을 때와 직접 그곳을 방문해 경험을 해보고 느껴지는 이질감은 상상 이상으로 달랐다.
그 어느 나라와 도시보다 다문화로 이루어진 호주에서의 외국 생활과는 분명 다를 것이 확실했다. 예를 들어, 윌밍턴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러 찾아간 중대형 교회에서 백인이 아닌 사람은 딱 우리 가족 넷 뿐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뿐 아니라 전교인이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그 당시에 느껴졌던 나만의 이 어색함은 이전의 그 어떤 순간들보다 강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나를 흔들었다.
이것은 시드니에서 멜버른으로 넘어오며 나와 아이들이 각자 맞서야 했던 그 도전들과는 결이 다르고 어쩌면 그 차원을 넘어서는 어색함이었다. 멜버른에서는 단순히 낯선 환경과 언어로 인한 장벽을 우리가 직면했었다면, 미국 윌밍턴에서는 그것을 넘어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보이지 않는 고뇌와 그로 인한 만만치 않은 장벽들이 예고되는 순간이었다.
산 뒤에 더 큰 산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첫 번째 산을 정복해 가는 중이었기에 두 번째 산도 해볼 만하게 느껴졌다. 돌아보니 정말 그랬다. 멜버른에서의 시간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훈련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멜버른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미국으로 떠나는 일은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고 가능했더라도 그 충격을 과연 한 번에 감당할 수 있었을는지, 아마도 불가했을 것이다.
시드니에서 멜버른으로 건너온 우리의 모든 여정은 곧 더 큰 도전을 연습하기 위해 주어진 떠남이었고 더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징검다리와 같은 시간이었다.
익숙한 사람들과 편안한 언어를 떠나왔지만 덕분에 우리는 이곳에서 낯선 이들과 연결되는 법을 배웠고 새로운 언어를 장착하게 되었다. 단 1년이었지만 그중 미국으로의 이주를 결정한 뒤 보낸 우리의 지난 9개월은 더 큰 바다로 나아갈 준비를 하는 여행자이자 이방인의 마음을 연습할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시간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나아가 이 정확한 밑그림을 알아차린 뒤 우리는 우리의 방향에 대해 더 확신을 갖고 더욱 자신 있게 치고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의미를 발견하는 일은 언제나 그렇듯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선사한다.
아, 그럼에도 산을 넘으니 더 큰 산이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다. 설마 그다음 산은 없겠지?
미국으로 가는 여정은 폭풍과 같이, 혹은 신기루와 같이 지나갔다. 멜버른에서의 1년 생활을 정리하고 시드니로 떠나, 시드니에서 마지막 열흘을 가족들과 친구들과 아름답게 장식하고 미국으로 들어가는 계획이었다.
여러 반갑고 감사한 만남들이 많았지만 무엇보다 정말 오랜만에 양쪽 부모님들이 다 함께 모이는 시간이 더없이 참 특별하고 귀했다.
시드니에 계시는 시부모님과 애들레이드에 계시는 친정부모님은 종종 친정부모님이 시드니에 우리를 만나러 방문할 때마다 한 번씩 다 함께 만나곤 하셨지만, 네 분이 만날 때마다 솔직한 마음으로 나는 딸과 며느리의 입장이 겹쳐지면서 자동으로 곤두서는 예민함에 늘 깊은 피로감을 느끼곤 했었다. 이번 만남은 우리가 멜버른으로 이주하면서 굉장히 오랜만에 이루어지는 만남인 동시에 떠나는 우리 가족을 함께 배웅하는 부모님들의 특별한 만남의 시간이기도 했기에 나는 평소보다 더 특별한 피로감(?)이 가중될까 싶어 만남 전부터 혼자 더 곤두서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나의 우려와 피로감을 덮을 만큼 우리의 떠남의 무게는 컸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며칠 동안 나는 그저 우리 부모님의 딸이었고, 남편은 그저 시부모님의 아들이었다. 누구도 우리에게 그 이상의 요구나 기대를 하지 않았고 우리 역시 11년 전 우리 각자가 떨어져 나온 옛 자리에 아주 잠시, 편안하게 머물렀다.
잠시동안 딸과 아들이 된 부모 옆에 선 우리 아이들은 우리의 옛 자리에 찬물을 끼얹었다가도 금세 또 아름다운 꽃잎을 뿌려주기도 했다. 3대가 함께 하는 시간이란 그렇게 찬물과 꽃잎들이 뒤섞이며 정신이 없는 사이에 지나가버리는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우리가 조금 더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떠남의 무게가 그만큼 더 무거웠기 때문이리라.
미국으로의 출국을 하루 앞두고 양쪽 부모님들과 다 같이 편안하게 동네 산책을 했다. 두 할아버지와 두 할머니는 놀이터에서 까불며 노는 손주들의 표정과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그에 반응하며 우리 네 명의 모습을 열심히 눈에 담았다. 그리고 나는 평소와는 다른 그들의 그 눈빛을 열심히 마음에 담고 카메라에 담았다. 곧 닥칠 작별의 시간을 미리 예고하고 걱정하기엔 우리가 담아야 하는 현재의 마음들과 표정들이 너무나 많았다. 다행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타이머를 맞추고 다 함께 가족사진을 찍었다. 사진의 퀄리티는 상관없었다. 이날의 의미와 우리의 표정들을 최대한 많이 담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에 되는 대로 열심히 찍었다. 그리고 가족사진을 찍으며 문득 나는 생각했다.
'마치 두 번째 결혼식 같다.'
11년 전 우리의 결혼식날, 양쪽 부모님과 우리는 이날과 비슷한 구도와 표정으로 다 함께 사진을 찍었었다. 아이들이 없이 아주 깔끔하고 세련되게 나온 가족사진이었고 우리 모두의 표정에는 그저 한없이 가벼운 미소만이 담겨있었다. 그 사진을 찍은 뒤 나와 남편은 공식적으로 각자의 둥지를 떠나 우리만의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이날,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의 두 어린아이들이 더해진 새로운 가족사진을 찍었다. 마치 두 번째 결혼식 사진과 같이, 그러나 11년 전의 첫 번째 사진과는 다른 마음, 그리고 다른 표정으로.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그래서 너무나 모두가 자연스럽고 활기가 넘치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이 사진을 찍고 남편과 나는 각자 이미 11년 전에 공식적으로 각자의 둥지를 떠나왔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아직 떠나오지 못한 여러 마음들에 참 작별을 전했다. 이제는 비로소, 완전히 떠나와야 하는 것임을 우리는 말하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번 더, 부모를 떠났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한번, 홀로 섰다.
밀려오는 그리움과 슬픔, 안타까움과 후회, 고마움과 미안함. 부모님에 대한 이 모든 감정들이 뒤섞여 그저 눈물만 흐를 때에 달려가 부모님의 얼굴을 마주하면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안도가 되는 시간들이 있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시간들이었다.
이제는 달려가 그 얼굴을 마주하지 못해도 이 모든 나의 연약한 감정들에 흔들리지 않고 그것을 잘 녹여 가장 정제된 언어로 그들에게 전해야 하는, 어른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이미 예전부터 시작되었어야 하는 그 어른의 자리를 이렇게 나는 부모를 두 번째로 떠나고 나서야 시작하게 되었다.
익숙한 시간을 떠나고 공간을 떠나는 일은 정말 엄청난 일이다. 지난 모든 떠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면 예외 없이 모두가 그랬다. 개인의 정체성을 뒤흔들 만큼의 각각 일생일대의 전환의 순간들이 분명했다. 그러나 부모를 떠나는 일은 그보다 몇 백배 더 큰 사건이라는 것을 이번에서야 깨달았다. 지난 나의 모든 떠남의 순간들은 나를 이렇게까지 뒤흔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무른 땅이 굳어지면
우리의 뿌리는 더욱 단단해지리라.
마치 우리의 부모님이 단단한 뿌리로 우리를 지금까지 지탱하며 꽃을 피우도록 지지해 주었고 지금까지도 그러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꽃과 열매들을 잘 피우도록 이 눈물을 닦아내고 더욱 굳건해져야 할 것이다. 우리의 시간보다 늘 조금씩 더 빨리 흘러가는 부모님의 시간에 우리의 아름다운 꽃잎들을 계속해서 뿌려드릴 수 있도록 말이다.
이 땅이 굳어지면 우리의 뿌리는 더욱 단단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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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10년 이상을 한 나라에 머문 적 없는 사람입니다. 곧 미국으로의 이주를 앞두고 지난 과거에 떠나왔던 시간들을 다시 글로 복기하며 또다시 새로운 떠남을 준비합니다. 일상과 여행의 경계에서 배우고 느꼈던 마음을 담은 브런치 북 <나는 또 떠납니다>의 마지막 편! 도 기대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