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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10년 차의 떠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2)

시드니에서 멜버른으로 (2)

by 스텔라정

실컷 울어도 돼, 괜찮아


시드니에서 뿌리내린 우리 가족의 첫 떠남을 앞두고 남편 다음으로 챙겨야 할 것은 바로 아이들이었다.


시드니에서 태어나 한 동네에서 쭈욱 자란 아이들은 특별히 태어나면서부터 다닌 교회에 대한 애착이 컸다.


아기 때부터 담요에 덮인 채 품에 안겨 매주 새벽기도회를 다녔고, 엄마가 교사로 섬기는 덕택에 주일학교와 한글학교를 입학 연령이 차기도 전부터 따라다니며 태어나 처음으로 친구들을 사귀었고, 주일이면 교회마당에서 저녁까지 머리에 땀이 나도록 뛰어놀며 주말에는 집밥보다 교회밥을 더 자주 먹던 아이들이었다.


그렇게 아이들의 시드니에서의 추억은 주로 교회 친구들과 나누었던 그런 애정과 활기가 넘치던 시간들이었다.


멜버른으로의 이주 소식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전할지 남편과 고민을 하다가 시간을 따로 마련해 좋은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기로 작전을 짰다. 최대한 아이들의 충격을 완화하고자 나름 둘이 머리를 맞대어 준비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 작은 마음들에 꽂힌 예상치 못한 충격을 무엇이 과연 덮을 수 있을까. 아이들은 우리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친한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예상하긴 했지만 6살과 7살 아이들의 인생의 가장 큰 부분은 역시나 친구들이었다.


“맞아, 엄마도 너무 슬퍼. 하지만 새로운 곳에 가면 좋은 것도 많을 거야. 너흰 이제 시드니에도 친구가 있고 이제는 멜버른에도 새로운 친구가 생길 거잖아. 더 많은 친구가 생길 텐데, 얼마나 좋니!”


여러 달콤한 위로의 말들로도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 여린 마음들이었다.


그 순간, 지난 어린 시절 독일로 떠났을 때의 나의 모습과 엄마의 모습이 돌연 스쳐 지나갔다. 내가 서울에서 독일로 떠났던 나이가 바로 지금 둘째 아이의 나이였다. 대성통곡을 하며 우는 둘째를 바라보며, 그리고 그 아이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어색한 표정에 머물러 있는 나 자신을 보며, 지난 시절의 어린 나와 그 옆을 지키는 엄마의 순간들을 상상해 보았다.


나는 어떻게 이겨냈을까, 그리고 엄마는 어떻게 이겨냈을까.
그 당시에 우리는 어떻게 그 시간들을 지나왔을까.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당시의 나도, 엄마도 모두 그 순간들을 이겨냈다는 사실이다. 그저 그 사실이 나에게 얼마나 큰 안도감을 주었는지, 다시 떠올려도 참 놀랍다. 과거가 어떻게 현재를 도울 수 있는지, 그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가능한 참으로 단순한 일이었다.


지금 그들은 슬픔에 빠져있고 나는 그들을 위로하며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분명 우리는 이 순간들을 이겨내고 저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단순한 사실을 깨닫자 도리어 나는 울고 있는 아이들을 향한 강제의 위로를 멈추고, 우는 그들을 안도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더 울어도 돼. 실컷 울으렴. 괜찮아. 너희들은 괜찮을 거야. 너희들은 분명히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아빠와 엄마가 늘 옆에 있잖아. 그리고 우리 가족은 지금처럼 늘 함께 있잖아."


부모의 여유라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없는 부모의 지난 경험과 그에 따른 의지적인 믿음과 같은 것. 결코 두렵지 않아서도, 마냥 수월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우리의 이 여유는 승패와는 전혀 상관없는, 부모인 우리가 가장 선두에서 부딪쳐 나아가겠다는, 두렵지만 호기로운 포부에 더 가까웠다.


과거의 발자취에 모든 단서가 있는 것은 아닐까


6세와 7세 인생에 닥친 두려움과 슬픔은 곧 친구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부모의 눈앞에는 그 너머의 수많은 보이지 않는 도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곧 살아갈 멜버른에는 가까운 지인도, 가족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처음부터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우리를 새 울타리를 세울 준비를 해야 했다.


먼저는 멜버른에서 아이들이 다닐 새로운 학교와 살아갈 동네를 탐색해야 했다. 사실 동네보다는 아이들이 전학해서 새롭게 다닐 학교가 우선이었다. 학교가 정해져야 모든 것이 정해지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나 학교만 정해지면 또 뭐 하나, 학교와 가까운 곳에 마땅한 렌트집이 적합한 시기에 적합한 가격으로 나와야 학교도 가능해지는 것이 아닌가. 모든 요소들의 조건과 타이밍이 딱 들어맞아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멜버른으로 이주를 약 네 달가량 앞두고 출장을 가는 남편을 따라 마치 정탐을 가듯 멜버른으로 향했다. 2박 3일 동안 아이들을 시부모님께 맡기고 (이런 기회도 얼마 남지 않았기에) 주말 동안 멜버른 지역을 미리 밟아볼 작정이었다.


그리고 멜버른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내가 처음으로 호주 땅을 밟은 곳이 바로 멜버른이었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오르며 지난 나의 모든 발자취에 미래에 대한 단서가 곳곳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재미난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이 미국과 호주로 흩어지기 전, 그야말로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그 시절에 가족여행 겸 멜버른에 살던 이모를 방문하러 처음 호주 땅을 밟았던 것은 지난 2007년, 대학생 시절이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와 새하얀 구름으로 기억되던 그 청정했던 당시의 호주의 첫인상을 마음에 품고, 과연 이번에 방문하는 멜버른은 나에게 어떤 인상을 남기고 어떤 마음을 품게 할까 고대하며 다시 그곳으로 향했다.


두려움마저 압도하는 엄마와 아내의 무게란


출장을 와 일을 해야 하는 남편을 두고 하루는 홀로 차를 렌트해서 이곳저곳을 다니며, 주로 동네 쇼핑센터와 도서관에 들어가 그 동네의 분위기를 살폈다. 어디를 가나 시드니와는 다른, 조금 더 이국적인 분위기에 살짝 겁이 나기도 했다.


멜버른 시티에서는 그렇게나 많이 보이던 한국 사람들도 근교로 나오니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신 시드니에서와 같은 교통체증은 거의 없었고 전반적인 도시의 분위기가 훨씬 깨끗하고 더 정돈된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 시드니가 화려한 도시라면 멜버른은 잘 가꾼 정원과 같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동네가 있었다. 나지막한 산 같은 지형에 경치가 좋고 위치도 편리하고 무엇보다 나무가 많아서 분위기가 참 편안했던 곳이었다. 잠시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그곳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단대농(Dandenong) 지역을 바라보며, '하나님, 혹시 이곳이 맞을까요.' 라며 조용히 기도를 했다. 그리고는 그 근처에 있는 프라이머리 학교 앞을 어슬렁거리다가 갑자기 밀려오는 두려움과 낯선 느낌에 차에 들어가 멈추지 않는 눈물을 닦으며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
차라리 혼자였다면 없었을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가족 넷이 함께라는 안도감보다는, 아내와 엄마로서 새롭게 짊어져야 할 책임감과 무게감이 더 컸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곧, 이 무게감이 나의 두려움까지 압도해 버렸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멜버른으로 떠남을 준비하는 그 시간들은, 불과 몇 달 전 결혼 십 주년을 지나오며 다시 찾은 평온함과 그제야 그 안에서 새롭게 춤추기 시작한 나의 자아가 다시 엄마와 아내라는 이름에 갇혀버리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 이전의 시간들과는 달리 한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나 자신을 적절히 가두는 것에서 오는 더 큰 자유와 평안을 배워가는 순간들이기도 했다. 이것은 정말 나의 마음에 엄청난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의 마음에도 성장수치가 있다면 이 기간 동안 대략 한 3센티 정도는 자랐을 것이다.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하는 남편의 옆에서 안정적인 아내의 자리를 지켜내는 것,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가장 큰 변화를 겪을 두 아이들 곁에서
나의 가장 큰 품을 내어주는 엄마의 자리를 지켜내는 것.

그 이전의 내가 이 자리의 무게를 단순히 머리로 지고 있었다면, 이번 떠남을 통해 나는 그 무거움을 온몸과 온마음으로 끌어안으며 품게 되었다. 말과 글은 이렇게 대여섯 문장으로 표현되었지만, 이 문장들을 쓸 수 있게 되기까지 나는 50일 이상의 밤을 뒤척이며 잠 못 이루었다는 사실을 이곳에서라도 생색내고 싶다.


정말로, 그러했다.


그렇게 우리의 예행연습은 시작되었다


감사하게도 당시에 멜버른을 정탐하며 가장 마음에 들었던 동네에 우리는 집을 구하게 되었다. 그렇게 새로운 곳에 정착하고 몇 달 뒤 나는 지난 사진을 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당시에 차를 세워놓고 울며 기도하던 그 길가가 바로 지금 우리 집 옆 길이었고, 아이들을 떠올리며 기도했던 그 프라이머리 학교 앞은 딸의 교실이 바로 보이는 학교의 정문이었던 것이다.


이럴 때 소리를 높여 부르짖는 말이 있다. "할렐루야!"


지난 나의 시간들을 돌이켜 떠올리며 다시 기록하는 이 일이 점점 무뎌지는 현재 나의 일상에 대한 놀라움과 감사를 준다는 점에서 얼마나 유익한 일인지를 오늘도 다시금 깨닫는다.


그렇게 나만의 안락의 성은 깨어졌으나 이 깨어짐을 통해 나는 더 중요한 나의 진짜 자리를 깨닫는 동시에 우리 가족 모두의 평안의 성은 이전보다 확장되었다.


어쩌면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떠남을 통해 남편도,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도 평온했던 각자의 성이 깨어졌으리라. 그리고 그들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 더 성장했으리라.


그리고, 그럼에도, 그렇게. 결국 우리는 앞으로 나아갔다. 곧 일 년 뒤에 또다시 닥칠 더 큰 떠남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그렇게 멜버른이라는 새로운 땅에서 3센티가량 자란 마음들을 안고, 우리 가족만의 성을 더 견고히 만들어갔다.


돌아보니 어쩌면, 우리 가정의 이 떠남의 시간은 그다음에 있을 미국으로의 이주를 위한, 예행연습과 같은 시간이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이 징검다리와 같은 시간을 잘 건너왔고, 앞으로도 이 남은 다리를 더 잘 건너갈 것이며, 언제나 그랬듯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시간들을 열심히 감당해 갈 것이다. 그리고 또 언제나 그랬듯, 돌아보니 이미 다리를 훌쩍 건너와 있는 우리의 3센티가량 더 자란 마음들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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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10년 이상을 한 나라에 머문 적 없는 사람입니다. 곧 미국으로의 이주를 앞두고 지난 과거에 떠나왔던 시간들을 다시 글로 복기하며 또다시 새로운 떠남을 준비합니다. 일상과 여행의 경계에서 배우고 느꼈던 마음을 담은 브런치 북 <나는 또 떠납니다>의 다음 편도 기대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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