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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10년 차의 떠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1)

시드니에서 멜버른으로 (1)

by 스텔라정

결혼생활 10년 차란 이런 것이었다


결혼으로서 인생의 두 번째 막이 시작되고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본래 결혼이란 그런 것일까. 돌아보니 결혼 전의 시간들은 마치 인생의 저 다른 편에서 잠시 꾼 꿈과 같이 느껴지고 본래 이 자리에 늘 있었던 것처럼 지독하게 익숙하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그런 것이었다.


이제는 혼자 있는 시간보다는 남편과 함께 있어야 더 안전하게 느껴지고, 숨 쉬듯이 오고 가는 남편과 아이들과의 대화의 시간은 내가 멈추어 있지 않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10년 동안 내가 이룬 가족이라는 것은 고군분투하며 함께 나아가는 운명 공동체와 같은 것이었다. 나라는 사람의 생존과 역동성은 오로지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고 확인되었다.


이제는 나의 이름 석자보다는 아이들의 엄마이자 누구누구의 와이프로 불리고 그에 맞는 행동양식을 갖추는 것이 익숙해졌다. 만 8년 정도의 육아 시기를 지나오며 점점 일상의 주인공은 나보다는 아이들에 가까워졌다.


가정에서 누구보다 완벽한 역할을 감당하고자 고군분투하며 달려온 나의 시드니에서의 10년은 그렇게 흘러와 어느덧 나는 배테랑 주부이자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꽤 오래전부터 깊숙이 박혀있던 일상의 나사 중 하나가 빠질 듯 말 듯 위태롭다는 신호를 알아차렸다. 겉으로는 고요하게 모든 일이 잘 굴러갔지만 언제까지 이런 나의 모습이 유지될는지는 확신할 수 없는, 그런 한계에 부딪혔다는 나만 아는 신호였고, 이것은 곧 나의 정체성, 엄마도 아내도 아닌,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이 사라져 간다는 구조요청과 같았다.


그러던 와중에 나는 감사히도 엄마와 아내의 역할을 잠시 벗어나 그 누구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덕분에 위태로웠던 나사들이 다시 조여지며 일상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그것은 이전과는 다른 원동력이 분명했다.


오래전에 죽은 줄만 알았던 나의 자아가 살아나 춤을 추기 시작했고 나는 그 어느 때에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상의 즐거움과 나라는 사람의 생기를 맛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결혼 10주년이자 시드니살이 10주년을 맞이했다. 여느 때보다 모든 것이 참 좋은 해였다.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입학하면서 육아도 비교적 수월해졌고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고자 마음먹으면 아름답게 보이던 그런 해였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앞날은 알 수 없는 것


그렇게 10년째 해를 통과하며 우리 가족은 갑작스럽게 새로운 떠남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였다.


남편이 회사를 이직하게 되면서 시드니에서 멜버른으로 이주를 하게 된 것이다.


단 한 번도 다른 곳으로, 심지어 시드니 내에서도 다른 먼 지역으로 이사를 생각해보지 않았던 우리였다. 우리가 교류하는 일상적인 관계들은 대부분 시댁과 교회가족으로 무척이나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지난 10년 간의 생활 반경 역시 매우 좁았고 그만큼 관계의 밀도도 높았다. 오롯이 가족 넷이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그 촘촘한 반경 안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내며 산 시간들이었다.


단 한 번도 시드니를 떠나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을뿐더러 떠나는 이유가 남편의 커리어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늘 성실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회사를 다녔지만 단 한 번도 가정보다 일을 앞세운 적 없는 남편이었다.


그런 남편을 너무나 잘 아는 나로서는 남편의 이직 결심이 더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지난 10년 간 가정을 이겨본 적 없던 남편의 커리어가 단 한 번에 우리 가정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멜버른으로의 이주를 결정하며 나는 지난 10년 간 이룩한 그 촘촘했던 우리의 생활 반경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동시에 사람의 마음과 계획은 결코 우리의 생각대로만 진행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다. 사람의 일이란 정말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다. 또다시 이주라니. 또다시 떠나야 한다니.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다


시드니에서 멜버른까지의 거리는 대략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의 약 두 배다. 시드니의 바로 아래에 위치한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쉽지만 거리를 생각하면 꽤 먼 거리임에는 틀림없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해서 다녀오는 거리감과 시간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심지어 주이동은 생각보다 큰 일이다. 호주는 주(State)마다 법도 다르고 운전면허증부터 차 번호판까지 전부 바꿔야 하기 때문에 주이동은 단순한 이사와는 달랐다.


이것은 10년 만에 찾아온 새로운 떠남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떠남은 이전의 것들과는 달랐다. 이제는 나에게는 남편이라는 동반자가 있고 무엇보다 두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부모님이 결정한 대로 따르며 부모님의 그림자 뒤에 숨었던 지난 어린 시절과 홀로 용기를 내어 결정한 대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했던 지난 나의 떠남의 시간들과는 조금은 결이 다른 상황이었다.


이제는 나 자신으로서만이 아닌, 한 남편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보호자로 나는 동시에 여러 개의 마음들을 챙겨야 했다.


가장 먼저는 예상외로 남편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유아시절부터 시드니에서 자라 첫 취업한 직장에서 지난 15년 간 일을 하고 첫 세례를 받은 교회에서 청년부, 집사, 장로 임직까지 지난 17년 간 신앙생활을 해온 남편에게는 호주 시드니가 고향이자 단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는 엄마의 품과 같은 곳이었다. 어릴 적부터 한국을 떠나 타지를 옮겨 다니며 살아온 나와는 정반대의 삶이었다.


또한 결혼을 통해 우리는 모두 양가 부모님으로부터의 독립을 공식화했지만, 결혼 후에도 시드니에 계시는 시부모님과 오랫동안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결혼과 동시에 친정 부모님이 있는 애들레이드로부터 물리적인 이별을 한 나와 남편 사이에는 분명 큰 차이가 존재했다.


결혼 후에 완전히 부모님으로부터 떠나오지 못했던 부분들을 끊어내야 하는 도전적인 부분이 존재했고 그래서 우리의 떠남은 시부모님께도 적잔이 큰 충격이었다.


15년을 다닌 자신의 첫 직장을 그만두는 날, 퇴근한 남편은 며칠을 몸져누웠다. 심한 감기몸살이 걸렸다고는 했지만 분명 정신적인 것이 더 컸으리라.


남편에게 작은 다발의 하늘색 드라이플라워를 선물하며 그동안 수고했다고 그의 어깨와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특별한 애정이 깊었던 첫 직장에서의 15년을 마무리하며 지난 우리 가정의 10년을 먹여 살린 회사와 남편의 수고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동시에 남편의 커리어의 한 시대가 마무리되는 기분으로 함께 새 출발을 자축했다.


그리고 그렇게 며칠을 푹 쉰 뒤 남편은 지난 무게를 훌훌 털며 가볍게 다시 일어났다. 어쩌면 그에게는 그 시간이 꼭 필요했으리라.


시드니에서 멜버른으로 (2)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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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10년 이상을 한 나라에 머문 적 없는 사람입니다. 곧 미국으로의 이주를 앞두고 지난 과거에 떠나왔던 시간들을 다시 글로 복기하며 또다시 새로운 떠남을 준비합니다. 일상과 여행의 경계에서 배우고 느꼈던 마음을 담은 브런치 북 <나는 또 떠납니다>의 다음 편도 기대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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