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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땅에서 연애하고 시집가기

애들레이드에서 시드니로

by 스텔라정


광야에 나무 옮겨심기


서울을 떠나 호주 애들레이드에서 시작된 이민자의 삶은 여행자의 삶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서울을 떠나와 계획에도 없던 이민 1세대가 된 부모님은 영주권을 얻기 위해 이 작고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셨고 이후에 합류한 나 역시 부모님의 일을 도우며 인생의 새로운 도화지에 소소한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당장 눈앞에 예상치 못했던 일이 닥쳐도 이상할 것 없는, 이미 너무나 새롭고 낯선 매일의 일상이었다.


이민이라는 것은 마치 한 그루의 나무를 뽑아 새로운 토양에 옮겨 심는 일과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무 이식을 할 때에는 옮겨심기에 적합한 기후와 계절을 잘 맞춰야 하고 미리 가지도 많이 쳐주며 뿌리를 돌려주는 여러 세심한 준비가 필요하다. 전후의 모든 과정을 섬세하게 준비해도 쉽지 않은 이 작업을 우리는 너무 빠른 시간 내에 감당했어야 했다.


이 새로운 땅에서 우리는 지난 영광스러웠던 우리의 옛 열매들을 자랑하지 못했다. 고국의 땅에서 우리가 땀 흘려 일구었던 수많은 열매들을 알리 없는 이 낯선 땅에서 우리는 지난 이름을 잊어야 했고 그것은 생각보다 우리 가족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잊지 않고 지내는 것이 어쩌면 더 괴로운 일이었기에 우리는 그 망각의 축복을 받아들이는 긴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이민 1세대인 부모님과 우리 가족은 그저 새로운 땅에 이식된, 낙엽이 진 뒤 휴면상태에 들어간 작은 맨 나무 한 그루였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가족 넷이 함께였기에 다행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쉽지 않았을 서로의 시간을 받아줄 사람 역시 가족 넷 뿐이라서 버겁고 아팠던 때도 분명 있었다. 과연 이 낯선 땅에서 뿌리는 잘 내릴 수 있을지, 이전과 같은 열매를 맺을 수는 있을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불안한 시간들이 더 많았다.


이 외진 작은 지역에서 살아가는 일상의 겉모습은 서울에서의 삶보다 단순해져 편안해진 부분도 있었지만, 우리 가족의 심중에는 매일매일이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는 고되고 복잡한 훈련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내가 담대하게 호주로 떠나온 이유였던 신앙과 가족이, 곧 이민 생활에서 붙잡고 의지할 수 있는 우리의 유일한 위안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현실적인 조건이 되었다. 다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 가족에겐 정말 말 그대로 신앙과 가족이 전부였다. 이런 광야가 또 어디 있을까.


늘 돌아갈 곳이 있었고, 의지할 것이 풍성했던 지난 한국에서의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이곳은 진정 광야였다.


초고속 연애와 약혼


애들레이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시드니에 사는 한 청년과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전에 애들레이드에 잠시 어학연수를 왔을 때, 지인을 따라 시드니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때 방문했던 교회에서 만난 청년이었다. 지인이 시드니에 살 때 다니던 교회라 그 교회에 다니는 여러 사람들과 자연스레 친분을 쌓게 되었고, 대다수의 한인 교회의 분위기가 그렇듯 결혼 적령기의 청년들을 이어주려는 주변 사람들의 오지랖과 권유로 그 청년과 나는 서로의 이메일 주소를 전달받게 되었다. 이메일 주소 교환이라니, 지금도 생각하면 참 촌스럽고 웃기다.


그렇게 한참을 잊고 지내다가 졸업 후 내가 다시 애들레이드로 돌아온 후에 우연한 기회로 우리는 그제야 이메일을 주고받게 되었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신앙 이야기를 나누는 좋은 친구가 되었고 곧이어 정식으로 교제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애들레이드와 시드니라는 비행기로 두 시간 반이 걸리는 두 지역에서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고,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만날 때마다 인생과 신앙을 논하는 깊이 있는 대화로 서로를 알아갔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대화를 참 많이 했기에 짧은 시기 안에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교제를 시작한 지 7개월 만에 그가 프러포즈를 했고 우리는 초고속으로 약혼을 했다. 결혼 날짜를 잡고 형식적인 프러포즈를 하는 한국 문화와는 정반대로, 호주에서 자란 남자친구는 마치 영화 속 장면과 같이 아무런 예고도 없는 깜짝 프러포즈를 했는데 당시에 얼마나 놀랐는지 떠올리면 아직도 그 당황스러웠던 장면이 생각이 난다.


이렇게 마음의 준비도 없이 결혼을 승낙할 수 있는 건지, 영화에서만 봤던 눈물을 흘리며 감동적인 표정으로 승낙을 하는 여주인공의 로맨틱한 대사를 나는 결코 칠 수가 없어 어물쩍 입술을 깨물며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결혼이라니. 그것도 이렇게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못한 상태에서, 내가 결혼이라니.


또다시 떠납니다


그렇게 서울에서 애들레이드로 떠나온 지 몇 달 만에 나는 약혼을 했고, 1년 4개월 후에서야 결혼식을 올린 뒤 남편이 사는 시드니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호주에서는 보통 약혼 후에 그 정도의 시간과 절차(?)를 거쳐 식을 올린다고는 하지만 체감상 참 길기도 긴 준비기간이었다. 어쩌면 급작스러웠던 약혼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기도 했고, 시드니로의 새로운 떠남을 준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전의 그 어느 떠남의 결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중대한 결정이었다. 지역 이동의 의미를 넘어, 결혼이라는 결정은 앞으로 영원히 한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는 결단이었고 누구에게나 그렇듯 일생일대의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결정이었다.


어쩌면 당시 나는 그러한 무거운 정착의 순간이 절실했던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지속된 불안한 상태에서 풀어내지 못했던 나의 정체성이 결혼이라는 정해진 틀 안에서 도리어 살아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한 곳에 정착해 안정적인 사람과 안정적인 삶을 일구어 나가는 것이 돌아보니 그 당시 나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이었고,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동일했던 이 사람과 함께라면 어느 산골짜기나 사막에 있더라도 안전하고 평안할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게 축복과 같았던 나의 확신은 언제나 그랬듯이 예고도 없이 찾아와 또다시 나를 새로운 곳으로 떠나게 했다.


마치 서울에서 애들레이드로 떠나왔던 그 순간부터 모든 시간이 바로 이 결혼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온 것처럼 말이다.


1년 4개월이라는 보너스


그렇게 시드니로 떠나기 전, 보너스같이 주어진 1년 4개월 동안 나는 결혼에 대한 확신을 굳혀가는 시간을 가지며 그 확신이 굳어질수록 인생이 결코 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 깊이 깨달았다.


이 시간은 마치 한 가정을 이루기 전에 미래의 아내와 엄마로서의 자리를 준비하라고 특별히 허락된 시간과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이전처럼 새롭고 대단한 것을 이루려는 욕심보다는 그저 매일매일을 내가 믿는 하나님 앞에 성실하고 진실되게 시간을 보내고자 애썼다.


본래 끝을 아는 자에게는 마음의 여유가 주어지기 마련이다. 한 번도 다녀오기 어려운 단기선교를 그 사이에 세 번이나 다녀왔고 특별히 그중 한 번은 남자친구와 함께하며 우리는 그렇게 나름 특별한 방법으로 예비부부의 훈련을 받았다.


지금 돌아보니, 현실적인 결혼을 앞두고 함께, 또 각자의 자리에서 보냈던 이 시간들은 싱글로서의 시간을 잘 마무리하는 단계이자 새로운 가정을 세워나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특별한 선물과 같은 시간들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이 보너스로 주어진 시간들의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1+10, 덤으로 드려요


결혼 후에 내가 살아가야 할 시드니라는 터전은 정말 낯선 곳이었다. 자라온 환경과 성격, 라이프 스타일마저 정말 달랐던 남편과는 이를테면 치약을 짜는 방법부터 맞춰야 했고, 무엇보다 남편의 대가족에 융합되는 일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갓 이민 온 새댁에게 호주 이민 초창기인 70년 대부터 시드니에 거주해 온 남편의 대가족은 그 자체로 너무나 새로운 문화였고 담이 높은 울타리였다.


하나를 사면 하나를 덤으로 주는 1+1 이 아니라 이것은 마치 1+10과 같이, 아내라는 주 역할에 함께 따라온 수많은 역할을 공평하게 모두 잘 해내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도전이고 숙제였다.


11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본다. 과연, 나는 그 열한 가지를 모두 다 잘 해내었는가.


잘 모르겠다. 지금도 여전히 큰 숙제로 남아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숙제는 지난 11년 간 나에게 엄청난 시행착오와 학습량을 제공했고, 덕분에 나의 터전의 범위는 확장되었고 그 어디에서도 터득하기 어려운 생활 능력치가 전반적으로 상승되었다는 것이다. 여전히 버겁지만 감사한 일임에 분명하다.


제3의 땅, 우리의 둥지


그렇게 시드니에서 세운 가정이라는 이름의 울타리는 곧 나와 남편이 함께 일구어야 할 새로운 제3의 땅이었다. 각자 새롭게 주어진 숙제들을 짊어지고 그렇게 우리는 가정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고, 그렇게 오늘까지 11년 하고도 반년을 살아왔다. 그렇게 우리가 각자의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와 개척하고 일구어온 땅을 돌아본다.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이 시드니라는 도시에서, 문화와 환경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한 가정이 시작되었고 두 명의 보석 같은 열매들이 생겼다. 늘 햇살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태풍도 있었고 잔바람도 길었다.


오늘까지 이어지는 울퉁불퉁한 인생 곡선이지만 덕분에 지금 우리에게는 더 단단해진 믿음과 더없이 안전해진 우리의 둥지가 남았다. 그리고 지난 모진 시간을 견디며 세워진 지금의 우리의 둥지가 곧 다시 그 든든함으로 우리를 지켜주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애들레이드라는 맨 땅에 떨어져 홀린 듯 연애하고 결혼해서 시드니에서 가정을 일군 지 11년이 지난 지금, 나는 또 새로운 떠남을 준비한다. 또다시 낯설고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그러나 이번에는 나 혼자가 아니기에, 안전한 나의 둥지와 함께이므로 그곳이 어디든 우리는 각자, 또 함께, 더 자라고 단단해질 것이라 믿으며 오늘도 힘을 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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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10년 이상을 한 나라에 머문 적 없는 사람입니다. 곧 미국으로의 이주를 앞두고 지난 과거에 떠나왔던 시간들을 다시 글로 복기하며 또다시 새로운 떠남을 준비합니다. 일상과 여행의 경계에서 배우고 느꼈던 마음을 담은 브런치북 <나는 또 떠납니다>의 다음 편도 기대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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