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애들레이드로
대학교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누구나 그렇듯 취업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늘 그랬다. '누구나 그렇듯'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평범한 집단에 늘 속해있었지만 언제나 그 모두와 같은 선택을 항상 했던 것은 아니었다.
졸업을 일 년 앞두고 나는 한 학기를 휴학하고 가족들이 있는 호주 애들레이드로 잠시 떠났었다. 당시 미국을 다녀온 후 부모님은 남동생이 유학 중이었던 호주 애들레이드로 이주를 하게 되었고 나는 미국에서 돌아와 서울에서 홀로 학교를 다니던 중이었다.
반년 간 호주에서 어학연수를 하며 부모님이 호주에서 막 시작하신 사업도 도울 계획이었지만 사실 속내는 아직 방향을 찾지 못한 진로에 대한 준비를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은 마음이었다.
6개월 간 애들레이드에서 나는 그동안 흐트러졌던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가족들과의 시간을 통해 꽤 오랫동안 허기졌던 마음을 채울 수 있었다.
당시 내가 처음으로 만난 애들레이드라는 곳은 참 이상한(?) 곳이었다. 오후 다섯 시면 대부분의 샵이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해가 지면 집 안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마당과 거실이 보통 뒤쪽에 있는 하우스들의 현관 쪽 창문들은 빈 집들 마냥 깜깜했다. 도대체 이 지역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사나, 늘 궁금할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 지역 사람들이 무슨 재미로 사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자연이 곧 그들의 놀이터였다.
주말이 되면 우리는 먹을 것을 챙겨 바다에 갔다. 망만 있으면 가능한 게 낚시를 해서 잡은 게를 라면에 넣어 먹고, 바다수영을 하며 조개와 전복을 따고, 끝이 없는 푸르른 파크에서 삼겹살과 소시지를 구워 먹고, 나지막한 산을 오르며 캥거루와 코알라를 발견하는 그런 자연 속 소소한(?) 재미가 바로 애들레이드의 진짜 재미였다.
또한 심심한 환경 덕분에 서울에서는 교회 출석이 전부였던 나의 껍데기 신앙생활은 다시 진지하게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에 쫓기는 마음 없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짧고도 길었던 6개월 간의 휴식시간을 애들레이드에서 보내고 다시 현실의 서울로 돌아왔다. 졸업까지 남은 일 년 간 다시 학교 수업을 들으며 초년생 때는 즐기지 못했던 캠퍼스 생활을 즐겁게 보냈다. 남들이 하는 취업 준비도 시작하고 새로운 연애도 시작하며 바쁜 일상을 보냈다.
그렇다고 확실한 진로를 정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다수의 방향을 따르고 있었을 뿐, 정확한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남들이 다 넣는 대기업들에 낼 자기소개서를 날마다 쓰며 그렇게 마지막 학년을 보내고 있었다.
바쁘게 지내가다도 잠시 가만히 멈추어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때,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지 못했던 나의 속사람은 여전히 방황했고 불안했다.
그러던 중 예상하지 못했던 한 작은 언론사에 기자직으로 합격을 했다. 합격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기분이 좋지 않은가. 어딘가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멈춰있던 마음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딱 이틀, 그 활기의 효력은 거기까지였다. 정확한 목표와 방향이 없었던 나는 그때부터 더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 대기업을 안 가고?", "솔직히 그 회사로 가기에는 너의 학력이 아까워."라는 가까운 사람들의 반응이 더 크게 다가왔던 이유는 그들에게 자신 있게 응대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그 회사에 입사해야 할 이유도 없었지만 동시에, 우습게도, 그 회사가 아닌 다른 회사여야 할 이유조차 나에게는 없었다. 회사 입사라는 목표는 애초부터 내 마음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때 나의 질문은 이것 하나였다.
"진짜로 내가 원하는 것은 뭘까?"
유치할 정도로 늘 생각하지만 결코 끄집어내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어쩌면 훨씬 그 이전부터 꺼냈어야 할 질문이었고 그 질문을 그때까지 미루었던 것이 당시 방황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당시에 그 질문에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오래 머물렀다면 아마도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조금이라도 원하는 것에 가까운 무엇인가를 찾아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시에 나는 그 질문에 더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찾아내는 일은 지금보다 더 어둡고 더 긴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보다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만 했다.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깨닫기 전에,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로부터 먼저 나를 구해내자.'
이것이 내가 당장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향이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라 함은 곧 당시에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은 곧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었다.
대기업 취업 하나로 단결되는 졸업생에 대한 기대, 생산적인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도태될 것만 같은 분위기,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수많은 반짝이는 유혹들, 그리고 무엇보다 곁에 가족이 없다는 외로움. 조용히 휘몰아쳤던 시기에 그 불안을 어디에도 내려놓을 수 없었던 공허함과 외로움이 가장 나를 괴롭게 했다.
졸업학기가 끝난 뒤에 결국 나는 결심을 했다. 나를 구해내는 가장 빠른 방법을 택하기로.
정확히 말하자면 도피 이주였다. 호주이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서울을 떠나기 위해 떠나는 것이었다.
졸업 후에 당장 진로를 결정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 스스로를 인정해 주기 위해, 나 자신을 더 알아가는, 더 "생산적인 일"을 하기 위해, 이것이 결코 도태되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 내기 위해, 무너진 신앙을 회복하고 진짜 신앙생활을 더 배워가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과 함께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었다.
"호주 그 시골로 가면 시집은 어떻게 가려고?", "호주에서는 한국 학력도 인정 못 받을 텐데, 무슨 일을 하려고?" 등등 우려의 말들이 걱정의 말투로 쏟아져 나왔지만 더 이상 전처럼 나를 흔들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서울을 떠났고, 애들레이드에서 가족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광야와 같았던 낯선 호주에서의 이민자의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미 그전에 6개월 동안 경험했던 애들레이드에서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더 쉽게 결정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여행자로서의 삶과 이민자로서의 삶이 하늘과 땅 차이임을 그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당시에 나는 나의 뿌리인 신앙과 가족을 붙잡는 것이 결국 나를 구해내는 방법이라고 판단했고, 돌아보니 나의 판단은 옳았다.
세상 물정을 몰랐고 제대로 된 앞가림도 못하던 시절의 호기로웠던 그 도전은 그저 내 자신을 구해내는 소극적인 도피가 아닌 새로운 옥토에 나를 옮겨심는 매우 적극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하나의 큰 사건이었고 새로운 시작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새로이 시작하는 것처럼, 뿌리를 단단히 지켜내며 자라게 했던 당시의 나의 시간은 결국 돌고 돌아 결국 내가 가장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되어주었다. (놀랍게도 친구들 중에 가장 먼저 결혼을 했고, 현재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찾아가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나는 그렇다. 나의 신앙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는 일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며 그 우선순위에 따라 삶의 모든 결정과 판단을 내린다. 어디에 있든지 그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선으로 지키고자 하는 나의 신념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니 새롭게 다가온다. 정말 맞다. 장소는 그다음 문제다.
돌아보니, 내 생애 가장 혼란스러웠던 그 시기에 호주 땅이라는 새로운 선택지가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너무나 감사하고, 정말 두려웠던 그 시기에 새로운 떠남의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나의 무모했던 용기에 스스로 박수를 쳐주고 싶다.
그러나 더 나아가, 나는 안다. 당시에 선택지가 호주 땅이 아니었더라도, 그리고 내가 무모한 용기를 내지 못했더라도, 나는 지금과 똑같이 과거를 돌아보며 감사해하고 있을 것이다. 장소가 그 다음 문제이듯, 사실 시간과 상황도 문제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어떤 선택지가 있었고 어떤 선택을 내렸든, 장소와 시간, 상황과는 상관없이 나는 똑같이 나의 믿음과 가정을 최우선으로 붙잡으며 오늘처럼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순간을 협력하여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 내가 믿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는 것이 지금의 나의 믿음이고 곧 있을 미국으로의 이주를 바라보며 준비하는 나의 마음이기도 하다.
내 앞에 놓일 선택지의 내용과 눈 앞의 상황보다, 믿음과 가정을 우선으로 붙잡으며 현재를 살고 미래에 미국에서의 그날을 살아간다면, 훗날 오늘과 같은 놀라운 감사의 고백이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을거라 믿는다.
과거의 그 세상 물정 모르던, 물렁물렁했던 시절을 돌아보며 오늘도 이렇게 따뜻한 위안과 확신을 얻는다.
자, 이제 이삿짐 쌀 준비를 슬슬 시작하자. 내일의 평안과 감사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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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10년 이상을 한 나라에 머문 적 없는 사람입니다. 곧 미국으로의 이주를 앞두고 지난 과거에 떠나왔던 시간들을 다시 글로 복기하며 또다시 새로운 떠남을 준비합니다. 일상과 여행의 경계에서 배우고 느꼈던 마음을 담은 브런치북 <나는 또 떠납니다>의 다음 편도 기대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