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에서 서울로
미국에서의 네 번째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었다.
함께 온 친구들 중 절반 이상은 마지막 학기가 끝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갔고 나는 정리를 핑계로 두 주 정도를 더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본래는 미국에 온 김에 뉴욕 여행을 짧게 하고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마침 2009년까지 이어진 미국의 금융 위기 시기가 겹치고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 않아 결국 고민 끝에 취소를 하고 바로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
은행 계좌 정리와 렌트비 납부 등 마지막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하며 마지막 남은 일주일은 매일 학교 캠퍼스와 동네를 돌아다니며 그리울 풍경들을 눈에 담았다.
1년간의 여행을 정리하는 일은 생각보다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적인 정리보다는 1년 동안 구석구석에 흩뿌려놓았던 순간들을 어떻게든 최대한으로 복기하는 작업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작은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1년간의 나의 일상적인 장소들을 다시 밟아야 했다.
캠퍼스 안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Memorial Union (MU)과 만남의 광장이었던 푸드코드, 매일 아침 들르던 커피 스테이션과 그곳에서 물 같이 마시던 미국식 블랙커피, 날 좋은 날 앉아서 멍 때리며 광합성을 즐기던 넓은 잔디밭, 새보다 더 자주 보이던 작은 다람쥐들, 공강 시간마다 숨어들던 도서관과 안락한 내 전용 자리.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를 하며 다녔던 그 길고 긴 자전거길, 심심할 때마다 갔던 Safe Way (대형마트), 그리고 매번 시장을 보고 자전거에 짐을 싣고 낑낑거리며 돌아오던 길, 처음으로 브리또의 맛을 알게 해 준 멕시칸 음식점, 내가 살던 아파트의 공원과 예뻤던 뒷 산책길, 오리가 사람보다 많았던 산책길 옆 호수.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희박한 여행지의 장면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다시 구석구석을 밟아야 했다.
아, 나는 그때에도 지금도 과거의 시간과 공간에 왜 이렇게도 집착하는가.
생각해 보았다. 떠나오기 가장 힘들었던 곳은 어디였는지, 지금도 가장 그리운 공간은 어디인지.
그곳은 바로 나의 작은 방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져봤던 자유의 공간이었다. 학생 넷이 셰어 하는 아파트 안에서 나는 운이 좋게도 가장 뷰가 좋은 방을 얻었다. 셰어 하는 외국친구들도 방문 안으로는 절대 들어올 수 없었고 무엇보다 문을 두드리고 간섭하는 엄마와 아빠가 없었다. 내가 가장 오래도록 눈에 담아두고 싶었던 풍경이었고 공간이었다. 매트리스와 낡은 책상, 옷장, 작은 수납장 그리고 늘 푸르렀던 숲의 배경이 마치 그림과 같았던 큰 창문, 이렇게가 전부였던 나의 그 작은 방은 나에게 그 어떤 좋은 집보다 아름답고 안락했던 나만의 작은 성과 같았다.
그곳은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오롯이 나의 힘으로 만든 공간이었다. 물론 렌트비와 생활비는 기러기 아버지의 땀으로 채워졌지만, 최소한의 생활비 안에서 모든 가구와 물품을 중고로 구입해서 그 모든 가구들을 차 없이 혼자 들고 또 끌고 들여와 살림살이를 꾸린 곳이었다.
도착해서 첫 며칠, 칠흑같이 깜깜한 한 밤에 편히 누울 낡은 매트리스 하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도가 되던지, 그러나 동시에 얼마나 그 상황이 낯설게만 느껴졌는지 모른다. 매일 밤 시편을 큰 소리로 읽으며 눈앞의 두려움을 잠재우곤 했다. 그렇게 낯설고 두려웠던 밤이 몇 주 지나고 나의 작은 방은 어설픈 가구들 몇 개와 노란빛 스탠드가 주는 온기로 조금씩 조금씩 채워졌다.
이 작은 공간에서 나는 나의 취향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성경 구절들, 그때그때 생각나는 생각들과 영화 속 좋아하는 구절들을 적어서 벽에 잔뜩 붙여두고 곳곳에 내가 좋아하는 소소한 것들로 방을 채워갔다. 매일 기분에 따라 이리저리 가구 배치도 바꾸어보았다. 사실 나만의 따뜻하고 안락한 성을 만드는 데는 노란빛 형광등의 작은 스탠드와 블루투스 스피커만으로도 충분했다.
네 번의 학기를 채우고 이 방을 떠나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내가 당시에 가장 좋아했던 영화 <몽상가들>에서 여주인공 이사벨라가 고전 영화의 한 신을 흉내 내며 방안의 모든 사물들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한다.
“I’ve been memorizing this room.
In the future, in my memory, I shall live a great deal in this room.”
(나는 이 방을 잊지 않을 거야. 미래에, 그리고 기억 속에서 나는 이 방에 늘 살아갈 테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장면을 떠올리며 사방의 벽과 가구들을 붙잡고 어루만지며, 당시에 나를 기다리던 친구에게 부끄러울 정도로 멈추지 않는 눈물을 닦으며 그 방을 떠났다.
다행히 방 안의 모든 가구와 물건들은 그다음 학기에 올 후배에게 그대로 넘겨주게 되었는데, 나의 안락했던 작은 성이 그 후배에게도 낯선 유학생활에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주었길.
함께 방문학생으로 온 동기와 선배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던 첫 학기와 달리 시간이 갈수록 홀로 보내는 시간이 잦아졌다. 그리고 마지막 학기와 떠날 무렵에는 소수의 친한 친구들과 혹은 나 홀로 보내는 시간이 대다수였다.
낯섦이 익숙함으로 바뀌고 삶의 일정한 루틴이 생기면서 우리는 곧 다시 쉽게 지루함을 느낀다. 참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다. 문을 두드리며 간섭하는 엄마와 아빠가 없다는 지난 자유 속 환호는, 몇 달이 지나자 방문 밖에 엄마와 아빠가 없다는 그리움으로 바뀌어 결국 나를 더 나의 방 안으로 숨어들게 했다.
생각이 떠올라도 떠들 곳이 없으니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수백 곡이 들었던 100기가 아이팟으로 음악을 들으며 당시에 유일했던 MSN 메신저를 친구들과 주고받으며 많은 시간이 보냈던 것 같다. 유튜브 숏츠와 SNS가 없던 시절이라 무엇을 했든 지금보다 낭비하는 시간은 적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첫 자유의 환호는 그렇게 조용히 끝이 났다.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했던 당시에 나는 정말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고삐 풀린 시간을 만끽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서야 그 모든 가벼웠던 자유의 진짜 무게를 깨닫게 되면서 더 골똘히 방 안에서 홀로의 시간을 채워갔던 것 같다.
그 시간들을 통해 늘 주변에 치이며 바쁘게 지내던 대학생이었던 나는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홀로 있는 시간이 주는 안락함을 처음으로 느꼈고 그것이 주는 힘이 나에게 정말 크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생각보다 더 내향적인 사람이라는 사실도 말이다.
학업과 진로에 열정적이었던 동기들 중에는 그 1년 동안 인턴 및 다양한 경험을 통해 여러 줄의 해외스펙을 가득 채워서 돌아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반면, 나는 그들과 달리 절대로 이력서에 적을 수 없는 스펙들만 가득 채워서 돌아왔다. 지나고 보면 늘 그랬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우리의 목표는 각자 달랐으니.
1년의 제한된 시간 동안 미국대학교에서 수학을 하며 캠퍼스 생활을 누린 경험은 그저 학점과 스펙에서 끝나지 않는 너무나 소중하고도 유익한 경험이었다.
낯선 환경에서 홀로 나의 일상을 일구었다는 성취감과 더불어, 첫 자유의 달콤함을 맛보았고 뒤따라오는 쓴 책임감을 배웠으며, 외로움을 통한 홀로의 유익함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이번에 다시 미국으로 떠나게 되면서 그때의 마지막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다시 미국에 꼭 올 거야, 다음에는 꼭 영어를 더 잘해서 와야지!'
라고 다짐했었던 그때를 떠올려본다. 안타깝게도 영어 수준은 그때와 비슷하지만 결국 나는 이렇게 다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의 성숙하지 못했던 자유와 홀로의 시간과는 분명 다른, 조금 성숙된 의미의 자유와 홀로의 시간이 될 것 같다.
아내와 엄마로서 현재 내가 이곳에서 움켜쥐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또 다른 자유이며, 부모를 떠나 한 가정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떠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야 떠나보내면서 나의 주된 위치를 나 홀로, 혹은 우리 가족 홀로 세워나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또 다른 홀로의 시간인 것이다.
영어는, 음, 가서 열심히 해보면 되겠지.
아, 다시 미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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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10년 이상을 한 나라에 머문 적 없는 사람입니다. 곧 미국으로의 이주를 앞두고 지난 과거에 떠나왔던 시간들을 다시 글로 복기하며 또다시 새로운 떠남을 준비합니다. 일상과 여행의 경계에서 배우고 느꼈던 마음을 담은 브런치북 <나는 또 떠납니다>의 다음 편도 기대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