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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자유는 곧 격동의 시작이었다

서울에서 캘리포니아로

by 스텔라정

기억의 조각들


독일에서 돌아온 지 시간이 꽤 흘렀다.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부터 나는 지난 초등학교 시절을 독일에서 보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을 정도로 익숙해진 나의 고국, 대한민국의 평범한 십대의 한 단면이 되어 살아갔다.


2000년대 초반, 강남 8 학군의 교육 열기에 불을 지피며 대치동 학원거리의 문을 연 세대가 바로 나의 세대였다. 대치동의 온갖 학원을 다 섭렵하며 재수 끝에 그토록 열망했던 명문대학교에 합격했고, 입학과 동시에 홀연히 사라져 버린 인생의 목표로 인해 그때부터 나의 목적 없는 이십 대가 시작되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1년 동안 내가 얻은 것은 캠퍼스 커플인 남자친구와 실체 없는 명문대 간판 이렇게 두 가지였다.


사춘기를 기점으로 극도록 내향적인 성격으로 변해버린 나는 학교 생활에도 늘 소극적이었고 대학교 이름만 믿고 들어간 학교에서의 수업은 생각보다 지루하기만 했다. 낯선 이들과의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았던 탓에 교내 모든 인간관계가 시작되는 방과 후 술자리와 기타 학교 활동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1학년의 시작이 이러했다면 이후의 시간은 불 보듯 뻔했다. 심지어 1학년 말에는 캠퍼스 커플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학과 친구들 사이에서 강의시간과 시험 때에만 나타나는 유령인간이었다.


그럼에도 남자친구와의 풋풋했던 캠퍼스 커플의 추억이 그나마 그 시간들을 의미 있게 잘 덮어주고 이끌어주었던 것 같다. 돌아보니 그 얼마나 다행인지, 또 얼마나 고마운지.


이거라도 해보자


그렇게 한 해가 지나고 2학년이 되었다. 2학년이 되면서 곳곳에서 무언가가 꿈틀대고 시작되는 소리들이 들렸다.


인턴을 시작하는 친구들과 유학을 준비하는 친구들, 그리고 입대를 준비하는 친구들까지, 고등학생 때와는 달리 이제부터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각자 알아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해 나가야 하는 시작 단계에 들어섰고 스펙 쌓기에 돌입한 동기들과 달리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가늠조차 못하는 여전히 그런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미국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알게 되어 '이거라도 한번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신청을 하게 되었다. 미국에 있는 몇 개의 명문대학교에 한 두 명 뽑아 보내는 소수 정예 프로그램은 경쟁률이 높아 예상대로 떨어졌고, 학비를 조금 더 내고 학점을 인정받는 방문학생 프로그램에 신청해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UC Davis 대학으로 떠나게 되었다.


1년 간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나면 한 줄의 경력과 더불어 그다음을 그려나가는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지금 생각하니 참 배부른 소리지만 챗바퀴와 같은 일상에서 잠시 떠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알았다면 과연 떠났을까?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하니 스물한 살의 이 결정은 단순한 떠남을 넘어서 나의 인생에 또 다른 큰 전환점이었다. 그때 이후에 닥칠 격동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과연 떠났을까?


먼저, 나의 뜨거웠던 첫사랑이 끝났다. 당시 남자친구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미국을 향했던 것은 나의 시들해진 청춘에게 주는 도전이었던 동시에 당시 나름 진심이었던 남자친구와의 관계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진부한 말을 나는 결국 이겨내지 못했고, 결국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없이 장거리 연애는 1년도 채 채우지 못하고 그렇게 끝이 났다.


진부한 그 이별의 끝에 존중의 마음보다는 이기적인 마음을 앞세웠던 그때의 나를 향한 안타까움과 그 친구를 향한 미안한 마음이 한동안 컸던 기억이 난다. 인생의 만남은 늘 그렇듯 예측 불가하지만, 미국으로의 떠남이 곧 나의 첫 이별의 경험으로 이어졌다는 점과 대학 시절의 유일했던 낭만과의 작별이라는 점에서 꽤나 큰 사건은 분명했다.


또 다른 큰 변화는, 내가 미국으로 떠남으로 우리 가족이 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미국으로 떠나기 몇 달 전,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동생이 호주 애들레이드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엄마는 동생의 보호자로 동행하며 떠났다. 곧 나 역시 미국으로 떠나게 되면서 졸지에 아빠는 계획에 없던 기러기아빠가 되었고, 우리 가족의 격동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때는 몰랐다. 고난이라면 고난이었고 또 축복이라면 축복이었다고 할 수 있는 우리 가족의 해외살이가 이때부터 비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호주와 미국으로 흩어지기 직전인 2007년도가 우리 가족 넷이 한국에서 함께 사는 가장 평범한 마지막 한 해였다는 것을. 우리는 그때 전혀 알지 못했다.


그때와 같고 그때와 다르다


변화가 많았던 나의 주변의 상황과는 달리, 당시에 나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물론, 그때에는 곧 닥칠 그 큰 변화들을 인지하지 못했을 때였으니 당연했다. 약간의 긴장과 함께 약간의 설렘도 있었다. 그것은 태어나 처음으로 맞이하는 자유의 시간, 가족을 떠나 그 먼 미국에서 보내는 나의 첫 자유의 시간에 대한 긴장과 설렘이었다.


그때의 내가 기대했던 자유는 1년이라는 만료기한이 있었기에 어쩌면 더 설렜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제한되어 있고 돌아올 곳이 있다는 사실은 도리어 두려움이 많았던 나에게 더없이 완벽한 자유의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적당한 도전과 적당한 성공, 적당한 실패가 모두 용납되는 그런 시간이었다. 무엇인가를 꼭 이루고 돌아와야 한다는 압박보다는 홀로 떠나는 그 자체가 의미 있는 도전이고 경험이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는 것이 가능했다.


그때의 그 자유를 지금의 나의 시간에 가져와 대입하며 비교해 본다.


두 달 뒤에 나는 그때의 그 미국으로 다시 떠난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질 자유는 그때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곳에서의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고 돌아올 곳조차 명료하지 않다. 적당한 경험으로 채우고 끝날 그런 가벼운 자유가 아닌, 가정을 돌보는 아내로서 그리고 두 아이의 보호자로서 한계 없는 무거운 시간들에 온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책임감이 앞서는 자유를 앞두고 있다. 나의 일신만을 책임져야 했던 그때와 달리 이제는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작은 두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그런 무거운 자유의 시간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날의 시간을 다시 떠올리니 지금의 나의 두려움과 긴장이 조금은 누그러진다. 그때와 같이 무엇인가를 이루고 돌아와야 한다는 압박감을 내려놓고, 떠나는 그 자체를 의미 있는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을 지금도 충분히 가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도전적인 생각도 든다. 17년 전인 그때만큼은 아닐지라도 지금도 충분히 홀가분하게 이 긴장과 두려움을 설렘과 기대로 조금은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더 내려놓고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오늘의 단서


이번 나의 두번째 미국에서 나는 또 어떤 새로운 격동을 마주하게 될 것이며 감당하게 될까. 돌아보니 큰 변화가 몰아치기 전에 언제나 단서는 있었다. 다만 우리는 몰랐을 뿐이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시간에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 모든 시간들이 강물같이 흘러 다가올 그 어느 순간에 가 닿았을 때 오늘처럼 생각에 보탬이 되고 마음에 위안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오늘 내가 잡을 수 있는 미래를 향한 유일한 단서이다. 잘 살아낸 오늘의 순간이 미래의 나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어주길 바라며, 오늘의 떠남도 잘 이겨내보자, 잘 살아내보자, 또 새롭게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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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10년 이상을 한 나라에 머문 적 없는 사람입니다. 곧 미국으로의 이주를 앞두고 지난 과거에 떠나왔던 시간들을 다시 글로 복기하며 또다시 새로운 떠남을 준비합니다. 일상과 여행의 경계에서 배우고 느꼈던 마음을 담은 브런치 북 <나는 또 떠납니다>의 다음 편도 기대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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