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에서 서울로 (2)
한국으로 떠나기 며칠 전, 20명 정도 되는 반 아이들을 모두 집으로 초대해 송별 파티를 했다.
내가 다녔던 독일학교는 4년 동안 담임교사와 학급이 바뀌지 않았고 아이들 수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4학년이 되자 남녀 구분 없이 우리는 모두가 서로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나는 비록 다른 학교에서 전학을 오게 되어 이 학교에서 4년을 다 채우지는 못했지만 대략 3년을 함께 한 친구들은 지금은 사진을 보면 그들의 각 특징과 표정이 다 기억이 날 정도로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다. 아동기에 축적된 시간의 힘이란 정말 어마어마한 것이다.
우편으로 편지를 주고받기 위해 모든 아이들에게 이사 갈 한국 집 주소를 메모지에 적어 나누어주었다. 주소를 보더니 한 친구가 물었다.
"우와, 너희 집 엄청 큰가 봐, 105부터 805번지까지 전부 다 너희 집이야?"
아파트의 105동 805호이라는 표기가 어려워서 동수와 호수를 생략하고 알려준 것이 105번지부터 805번지까지를 전부 우리 집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아파트라고는 한 채도 없는 독일의 한 동네에서 한국의 아파트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적합한 단어가 뭘까 고민하다가 대충 설명을 하긴 했던 것 같은데, 그 순간,
'아, 나는 이제 완전히 다른 세계로 가는구나.
내가 앞으로 살아갈 한국은 이곳과 정말 다른 곳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아파트의 동호수가 무엇인지 설명하다가 독일과 한국에서의 삶의 이질감과 이곳을 정말 떠난다는 사실이 그 순간에서야 실감이 났던 것이다.
친구에게 독일과 다른 한국의 아파트 문화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대부분 한국사람들은 독일과 다르게 아파트에 산다는 사실을 먼저 설명해야지,라는 생각까지 미쳤다가 결국 도무지 시작할 자신이 없어 대충 넘어갔던 기억이 난다.
나의 작별의 시간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그러나 그 덤덤함은 슬픔과 아쉬움의 반대의 마음이 결코 아니었다.
지금의 나와 달리 열한 살의 나는 꽤나 외향적이었고 친구들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학교 시간 외에도 하루 중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한국으로의 귀국은 정말 큰 헤어짐의 순간이 분명했다.
그 변화는 많이 슬펐고 또 많이 아쉬웠지만, 당시에 나의 마음에는 무엇인가가 넘칠 만큼 차 있었기 때문에 그 눈물을 충분히 누를 수 있었던 것 같다.
당시의 마음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벅차오른다. 아직까지도 나를 벅차오르게 만들고 당시에 나의 눈물을 위로했던 그 무언가는, 열한 살의 아이 안에 가득 찬 4년간의 시간들과 사람들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낯선 곳에 던져진 후 4년 동안 어렵게 쌓아 올린 독일에서의 안전한 나만의 울타리는 떠나면서 버리고 갈 무언가가 아니라 마음에 품고 갈 열한 살 아이의 자신감이었고 자긍심이었다.
그곳에서 유일했던 나의 검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은 이미 모두의 눈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서로를 알아가며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었던 수많은 친구들, 나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며 사랑을 베풀어준 선생님들과 이웃들, 그리고 그 낯섦을 익숙함으로 바꾸는 데까지 똘똘 뭉쳤던 우리 가족 넷의 축적된 수많은 시간들, 이것이 곧 독일을 떠나는 열한 살 나의 자랑스러운 전리품이자 트로피였다.
그리고 나는 그 트로피를 자신 있게 손에 쥐고 또 가슴에 품고 덤덤하게, 그러나 애틋하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모든 경험은 유의미했다. 정말 그러했다.
그것이 모질었던 계절이든, 아름답기만 했던 계절이든 상관없이 그곳에서의 모든 경험은 지금까지도 매일 나에게 보이지 않는 트로피를 선사해 주었다.
다만, 나는 몰랐을 뿐이다. 지금의 나를 더욱 빛나도록 돕는 것은 지난 나의 모든 몸으로 부딪혔던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쓰도록 돕는 것 역시 지난 어렸던 나의 모든 부딪히고 흔들렸던 마음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이제, 지난 마음들을 기억하며 방향을 돌려 앞으로 나아갈 차례다. 두 달 앞으로 다가온 나의 새로운 이주를 준비하며 지난날의 빛나는 트로피를 다시금 붙잡는다.
앞으로의 미국에서의 낯선 날들도 분명히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이번에도 빛나는 트로피를, 의미 있는 마음과 시간들을 얻을 수 있을 거야, 라며 스스로 다독이며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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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10년 이상을 한 나라에 머문 적 없는 사람입니다. 곧 미국으로의 이주를 앞두고 지난 과거에 떠나왔던 시간들을 다시 글로 복기하며 또다시 새로운 떠남을 준비합니다. 일상과 여행의 경계에서 배우고 느꼈던 마음을 담은 브런치 북 <나는 또 떠납니다>의 다음 편도 기대해 주세요. :)